10월 20일
2007년 4월 16일, 버지니아공대에 재학 중인 한국계 미국인 조승희가 학교 내에서 무차별로 총기를 발사한 끝에 32명의 학생과 교수가 피살되고 범인은 자살했다. 이 사건은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캠퍼스 총기 난사사건이다. 조승희가 참사를 일으킨 원인에 대해서는 많은 분석이 나와 있고, 스페인 기자 출신의 베스트셀러 작가 후안 고메스 후라도가 쓴 소설 『매드무비 : 조승희 프로파일』도 좋은 참고 자료가 된다. 그렇지만 그 많은 문서를 뒤지기에 앞서, 이런 질문을 던져 보는 것은 어떨까? 조승희가 총기 소유가 불가능한 한국에서 계속 학교를 다녔거나, 초등학교 3학년 때 이민을 갔던 나라가 총기의 천국인 미국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캠퍼스 총기 난사사건은 미국 내에서 일어나는 1만 건이 넘는 총기 사고 건수의 일부일 뿐이다. 이처럼 연일 수많은 총기 관련 사고가 줄을 잇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미국은 총기 판매나 소유에 법적인 제재를 가하지 않을까? 종교적 근본주의와 밀착해 있는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이 낙태는 금지하면서도, 낙태보다도 더 생명을 위협하는 총기 규제 법안에 대해서는 한사코 반대하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원고지 300여 매 분량의 초경량 문고로 출간된 손영호의 『미국의 총기 문화』(살림, 2009)가 그 의문에 답한다.
영국을 떠난 메이플라워호가 66일간의 항해를 거쳐 102명의 승선객을 매사추세츠의 플리머스 바위에 내려놓았던 1620년. 바다를 건너온 문명인의 눈에 비친 아메리카 대륙은 인디언과 맹수가 출몰하는 황야일 뿐이었고, 그런 상황에서 총은 새로운 땅에 정착하고자 하는 개척민의 필수품이었다. 그들은 인디언 무법자나 야생동물로부터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총을 곁에 두었으며, 사냥을 통해 식량을 마련하기 위해서도 총이 필요했다. 18세기 식민지 미국인들은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잘 무장된’ 사람들이었을 것이고, 이런 토대가 훗날 미국의 역사발전 과정에서 총기의 중요성을 인식했던 한 역사가에 의해 ‘총기 문화(gun culture)'라는 말을 만들게 했다.
영국 식민지 가운데 하나였던 미국은 1776년, 영국과의 유혈 투쟁 끝에 독립을 쟁취했다. 전쟁을 통해 자유를 얻어내고 건국을 이루었던 미국인들에게 이제 “총기 소유는 전제적인 정부에 맞서는 개인과 국민의 기본권으로, 총은 정부에 대한 저항권의 상징”이 되었다. 그래서 13개 주를 통합하여 연방 정부를 세우는 데 동의하였던 ‘건국의 아버지’들은 “규율을 갖춘 민병대는 자유로운 주 정부의 안보에 필요하므로, 무기를 소유하고 휴대할 수 있는 국민의 권리가 침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명시한 수정헌법 제2조를 채택했다.
한때 영국의 전제를 경험하였던 미국인들은 독립 전쟁에서 승리한 뒤 느슨한 연방을 만들면서, 강력한 중앙정부가 상비군의 힘을 이용하여 국민의 자유와 기본권을 유린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그 결과 중앙정부의 폭정을 견제하는 수단이자 주 정부의 독립을 지탱하는 권리로서의 국민 개개인의 무장권을 수정헌법으로 명토 박은 것이다. 이런 정신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게 “총을 가지지 못한 인간은 자유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토머스 제퍼슨), “모든 시민들은 공격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스스로 방어하기 위해서 무장할 권리를 부여받았다”(존 애덤스), “국민을 무장 해제시키는 것은 그들을 노예화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될 것”(조지 매이슨)이라는 문구들로, 이 말을 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건국의 아버지’들이었다.
1791년에 비준된 수정헌법 제2조에 의해 총기 소유가 개인과 국민의 기본권으로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총기 자율과 총기 규제를 놓고 벌어지는 두 진영 간의 혈전은 자연 200년이 훨씬 넘는 시절에 만들어진 수정헌법 제2조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벌어진다. 총기 규제론자들은 이 조항에서 주체는 개개인의 사람이 아니라, “집단으로서의 민병대”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 ‘규율을 갖춘 민병대’가 정부의 통제하에 집단적으로 총기를 보유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개인의 총기 소유를 허락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반면 총기 옹호자들은 총기를 소유하고 휴대할 수 있는 것은 ‘국민의 권리’라고 넓게 해석하면서, 저 조항은 “민병대와 같은 집단적이 조직체가 아닌 국민 개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좀 더 부연하자면 “오늘날 보통 주 방위군을 과거 ‘주 민병대’와 유사한 것으로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으나, 수정헌법 제2조가 채택될 당시 민병대는 무기를 소유할 수 있는 모든 시민을 통칭하여 언급”했던 말이라는 것이다.
2008년 6월 26일. 총기 소유의 합법성과 관련하여 미연방 대법원이 수정헌법 제2조에 대해 역사상 처음으로 유권해석을 내렸다. 워싱턴 D.C.가 총기를 가정에서 소유하는 것을 금지하자, 한 무장 경비대원이 소송을 제기했을 때였다. 워싱턴 D.C. 당국이 내세운 총기 규제의 근거는 앞서 들었던 것처럼 수정헌법 제2조에 명시된 무기 소유권을 일반 개개인의 시민이 아니라, 경찰 과 보안군의 ‘집단적 무기 소지권’으로 보았다. 하지만 연방 대법원은 5(보수파)대 4(진보파)로 워싱턴 D.C.의 총기 소유 규제 조처를 위헌으로 판결했다.
안토닌 스칼리아 대법관은 판결에 찬성한 4명의 대법관을 대표한 결정문에서 “이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총기 사건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으나, 미국의 헌법은 개인이 가정에서 정당방위를 위한 총기 소지나 총기 사용을 절대적으로 금지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각 지방 정부들의 고민은 이해하지만 헌법을 어겨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미국인에게 총기는 신대륙 개척 시대에 보편적인 필수품이 되었고, 개개인의 총기 소유는 독립 후에 만들어진 헌법으로 철저히 보장되었다. 흥미롭게도 미국에 총기 문화를 널리 확산시킨 또 다른 계기는 1861년부터 4년 동안 접전을 벌였던 남북전쟁이다. 이 기간에 미국의 총기 산업은 규모와 기술 면에서 크게 성장하여 대량생산 체제로 돌입했다. 뿐 아니라 이때부터 미국인들은 총을 해결되지 않는 분쟁과 갈등을 풀어내는 수단으로 신봉하게 된다. 식민지 미국인들을 하나의 국가, 하나의 국민으로 만들어 준 독립혁명이나 분열된 남북을 하나의 국가로 다시 탄생시키는 데 기여한 것은 모두 총구였던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이것이 바로 독립혁명과 남북전쟁으로부터 얻은 교훈이었으며, 폭력은 갈등 해결의 마지막 수단이 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선과 악의 대결 구도, 카우보이식 해결 방식이 미국인들의 가치관을 형성하게 하였으며, 총이 바로 그 해결책을 위한 도구가 되었던 것이다. 이런 미국의 정신적이며 심리적인 정서는 현재에도 살아남아, 미국이 국제 사회에서 경찰국가로서의 사명 의식을 갖게 하는 유습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이 간략한 저서는 미국의 총기 문화가 형성된 역사와 법과 가치관을 짚어낸다. 그러면서 총기 문화를 미국인들의 마음속에 실어 나른 주요 공신으로 ‘카우보이 소설’이나 ‘서부극’과 같은 미국의 대중문화를 꼽기도 했다. 저 옛날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이 이소룡이 출연한 영화를 보면서 ‘쌍절권’을 흉내 내고, 조폭영화를 보면서 조폭 세계를 동경하거나 폭력에 차츰 무감각해지듯이, 연방 총구가 불을 뿜어대는 대중문화를 통해 미국인들 역시 총기에 대한 환상을 마음속에 저장해 나갔다.
그렇긴 하더라도, 오늘날 미국의 총기 문화를 지탱하고 있는 총기 산업의 막강한 영향력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2001년 5월 <포천> 지에 의해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이익단체 1위로 선정되기도 했던 미국총기협회(NRA)는 막강한 조직과 자금력을 갖춘데다가, 미국의 건국이념과 전통적인 가치관을 대변하는 것으로 치장하고 있다. 이 단체가 유권자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얼마만 한지는 정치가들이 “선거철만 되면 NRA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총을 들고 다니는 액션을 취”하는 것으로 잘 알 수 있고, 실제로 선거 전문가들은 2000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고어가 공화당의 부시에게 패한 요인 가운데 하나로 “강력한 총기 규제 정책”을 내걸었던 것을 지적하고 있다.
고어의 패인을 분석해보았을 게 분명한 오바마는 앞서 거론한 2008년의 대법원 판결 직후, 공화당 후보였던 매케인보다는 덜 적극적이었지만 대법원의 판결을 환영했다. 오바마의 찬성 표명은 총기 자율을 당론으로 하는 공화당과 달리, 총기 소유를 반대해 온 민주당의 당론에 사실상 배치되는 거였다(총기 규제에 대한 오바마의 어정쩡한 입장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문에서 다시 볼 수 있다). 얼마나 많은 꽃들이 져야, 효과적인 총기 규제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 그것도 최대 무기 수출국이면서 군산 복합체의 전형인 미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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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