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5일
다카시로 고이치의 『일본의 이중권력, 쇼군과 천황』(살림, 2006)을 읽다. - 원래 이 책은 히라타 유키에의 『한국을 소비하는 일본』과 함께 읽었고, 어제 씌어진 독후감에 포함되었어야 했다. 그런데 최혜실의 『한류 드라마의 스토리텔링』과 히라타 유키에의 책을 짝 지우는 바람에 쓰기가 늦어졌다.
‘한류’에 관한 히라타 유키에의 책과 일본 정치를 다룬 다카시로 고이치의 책은 함께 읽고, 묶일 책이 아니다. 그런데도 엉뚱한 시도를 하게 만든 것은, ‘책세상문고·우리시대097’번으로 나온 전자와 ‘살림지식총서231’번으로 나온 후자의 책이 똑같이 외국인 필자가 한글로 집필한 신간이라는 점이다. 외국 필자가 한국어로 쓴 이런 신간이 많아져서 우리나라 지식계를 풍부하게 하고, 한국 필자들을 긴장하게 하고, 또 독자들의 선택지를 넓혀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 않은가? 분량이 많지 않고 대중적인 특징을 가진 문고는, 한국어로 집필하고 출간을 원하는 외국인 필자에게 넓게 열린 문이다. 언젠가 독후감을 쓰기도 했던 호사카 유지의 『조선 선비와 일본 사무라이』도 문고에 가까운 시리즈 속에 포함된 외국인의 한국어 신간이었다.
『일본의 이중권력, 쇼군과 천황』은 아주 짧은 분량 속에, ‘천황제天皇制’ 형성의 역사에서부터 작동 구조는 물론 천황제를 고수하고 있는 일본 정치 비판에 이르기까지 알차게 정리해 놓았다. 일본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현재의 천황제와 같은 이중권력 구조가 유지된 것은 아주 오래되고 길다. 정신적 권위는 덴노天皇가 가지고, 정치적 권력은 쇼군?軍이 가지는 ‘권위와 권력의 이중구조’는 덴노의 친정이 이루어진 1333~1336년의 3년간을 제외한 약 700년간 계속되었다.
메이지유신(1868)은 쇼군의 막부가 덴노로부터 위임받은 통치권을 다시 덴노에게 반환한다는 의미의 대정봉환大政奉還으로 결말되었으니, 피상적으로는 이중권력구조가 덴노라는 절대 주군의 손에 통일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을 입안했던 설계자들과 신정부는 근대화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흔들리지 않고 계획을 추진할 수 있는 권위 있는 존재를 필요로 했다: “고대 이래 최고의 권위를 가진 통치자이자 정통성의 원천이었던 덴노를 정권의 상징으로 세움으로써 권위의 절대화와 권력의 집중화를 꾀한 후 그것을 정권의 권위부여에 이용한 것이다.”
덴노라는 호칭은 고대에만 일시적으로 사용되었고, 그래서 일본인들은 쇼군은 알아도 덴노는 모르는 상태였다. 메이지 설계자들은 막부 타도로 인한 “체제변환의 혼란을 수습하고 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하여, 문명개화라는 시대적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덴노를 국민적 결집점으로 만드는 시책을 차근차근 시행해 나갔다.” 그래서 메이지유신은 ‘덴노 호칭의 부활’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는데, 그 과정은 오래전에 긴 독후감을 남기기도 했던 다카시 후지타니의 빼어난 저작 『화려한 군주』(이산, 2003)에 자세하다.
700년간 쇼군이 지배하던 시절 일본인들은 덴노가 어떤 존재인지 몰랐고, 전국 각 지역에서는 유력 조상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마을 중심의 신사神社 신앙이 발달해 있었다. 신정부는 덴노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 덴노를 민중이 믿고 있는 신사의 신 중 최고신인 오오미카미의 자손이고, 각 신의 지역의 신사에 있는 신의 지위는 천자天子인 덴노가 승인한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를 통해 메이지 정부는 덴노가 가진 ‘천자’라는 신적인 권위에 대한 경외심과 복종심을 국민에게 주입하는 데 성공했다.”
겉으로 보기에 메이지유신은 쇼군 시대의 지방분권적인 이원지배구조를 중앙집권적인 일원지배구조로 전환하는 과정이었으나, 덴노의 정치적 위치는 막부시절의 덴노처럼 애매했다. “덴노가 신성불가침의 절대적 존재라고 헌법에는 규정되어 있었지만, 덴노가 실제로 정치에 임하는 것은 아니었다. 즉, 덴노는 표면상으로만 절대성을 가졌을 뿐, 실제로는 의회나 내각, 원로 및 중신들 등의 보필을 받고 통치행위를 시행하였다.” 『일본 근대 사상사』(문학과 지성사, 1994)를 쓴 구노 오사무와 쓰루미 슌스케는 이런 구조를 ‘현교’와 ‘밀교’로 표현한다. 그 책 112~113쪽에 따르면 “현교顯敎란 천황을 무한한 권위와 권력을 지닌 절대 군주로 보는 해석 체계이며, 밀교密敎란 천황의 권위와 권력이 헌법 기타에 의해 제한되는 제한군주制限君主로 보는 해석 체계이다.”
이 체계는 국민 전체에게는 “천황을 절대 군주로 신봉”하게 하면서(현교), 지배 계층끼리는 천황을 “상징적·명목적”으로만 여기면서 제국대학 출신 관료들이 포진한 “각 기관의 담당자가 천황의 실질적인 권력을 전면적으로 분할하고 대행하는 체제”(밀교)다. 구노 오사무·쓰루미 슌스케는 1936년에 일어난 육군 청년장교들의 2·26사건을 현교 세력(군부)의 밀교(문민 내각과 행정부) 정벌로 해석하는데, 다카시로 고이치는 그 사태를 메이지헌법에 병존했던 “군권주의와 입헌주의 원리”의 충돌로 설명하면서 다이쇼 시대(1912~1926)에는 입헌주의적인 이해가 깊었지만, “1930년 후반 이후 군부의 대두로 입헌주의적인 요소는 알맹이가 모두 빠져 버렸다”고 해석한다. 구노 오사무·쓰루미 슌스케의 ‘현교/밀교’를 다카시로 고이치는 ‘군권주의/입헌주의’로 바꾸어 쓰고 있지만, 뜻이나 사태 해석은 하등 다르지 않다.
다시 정리하면 “메이지헌법에 의해서 법적으로 확립되고 군부의 대두에 따라 덴노의 신격화는 더욱더 촉진되어 덴노의 권력은 마치 신과 같은 무한성을 띄게 되었다. 문제는 최고권력자인 덴노가 결정권을 행사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원훈元勳이나 중신重臣들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도구, 즉 중신들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이중권력의 문제는 헌법적으로 “각 기관은 직접 덴노에게 소속되어 덴노에 대해서만 책임”을 졌기 때문에 중신이나 행정부의 잘못에 대해서는 누구든 책임을 묻거나 간섭할 수 없었고, 반대로 덴노는 “절대 군주로서의 결정권을 행사하지 않”았기에 덴노는 ‘머리 없는 괴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기형적인 이중구조는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던 권력자들에게 많은 장점을 부여한다. 그들은 자신을 덴노와 일체화하면서 덴노를 보필하는 자신들과 일반 국민을 구분한다. 일본의 관존민비官尊民卑가 발생하는 지점이다. 또한 덴노는 ‘신성하고 불가침한 존재’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권력자들은 “덴노의 권위에 의존하거나 덴노를 방패”삼아 무책임을 일삼았다.
일본의 전후는 1946년 1월 1일 쇼와 덴노의 ‘인간 선언’으로 시작한다. 그 선언에서 덴노는 자신이 아라히토가메(살아 있는 신)가 아닌 인간이라고 일본국민에게 선언했다. 그리고 덴노를 주권자로 규정했던 메이지헌법을 개정한 신헌법은 덴노를 ‘일본국의 상징이자 일본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바꾸었다. 이처럼 전후의 민주화에 따라 덴노가 단순한 상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치의 ‘무책임체제’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는 게 저자의 진단으로, 일본의 내각 정치는 수상에게 막강한 권력을 주었지만 “자민당 내 형성된 파벌 보스들의 지지가 없으면 정권을 유지할 수 없고, 관료들을 움직이려고 해도 각 관청들은 각각 유력한 족의원들과 결탁하고 있어, 수상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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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