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4일
히라타 유키에의 『한국을 소비하는 일본 - 한류, 여성, 드라마』(책세상, 2005)를 읽다. - 이 책은 ‘책세상문고·우리시대097’번으로 나온 책인데, 특이하게도 외국인 저자가 한국어로 발표한 책이다. 저자는 1973년 홋카이도에서 태어나 도쿄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한국어를 제2외국어로 배운 것이 계기가 되어 한국에 유학까지 오게 됐다. 일본에서는 영문학을 배우고, 한국에서는 사회학을 배우게 된 저자는 「일본 20, 30대 여성들의 한국 관광에 관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책이 출간된 시기에는 박사 과정에 재학 중이었다. 표지 속날개에 적힌 약력을 보면, 저자는 한국인 역자와 함께 이와부치 고이치의 『아시아를 잇는 대중문화』(또 하나의 문화, 2004)를 공역했는데, 『한국을 소비하는 일본』을 읽는 도중에 띄엄띄엄 펼쳐 본 이와부치 고이치의 책을 보면, 그로부터 많은 문제틀을 빌려온 것이 감지된다. 대중문화에 있어서의 ‘초국가적transnational’ 개념이라든지, 이문화들 사이의 ‘혼종hybridity' 같은 개념들이 그런데, 곧 『아시아를 잇는 대중문화』를 읽는 대로 따로 독후감을 쓰게 될 것이다.
책의 부제에 온전히 설명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책은, 일본에서 인기를 얻은 ‘한류’에 대한 여성주의적 분석을 담고 있다. ‘한국 대중문화 열풍’을 의미하는 한류韓流는 원래 ‘새로운 유행’을 뜻하는 중국어 한류寒流가 변용된 것이다. 1999년 여름, 중국에서 한국 가요가 인기를 얻으면서 한류寒流를 비튼 한류韓流라는 조어가 만들어 진 것이다. 이처럼 한류의 물꼬는 중국 문화권에 한국 대중가요가 소개되면서부터였으나, 일본에서는 그보다 늦은 2001년부터 한국의 영화와 드라마가 관심을 샀고 2003년부터 붐을 이루었다(일본에서 ‘한류’라는 말이 어떻게 변해왔는지에 대한 재미있는 설명이 26쪽에 있다).
일본에서 한류 붐을 일으킨 것은 2003~2004년 사이에 위성방송과 지상파 방송에 되풀이 방영된 <겨울연가>의 공이 크지만, 1996년 한·일 월드컵 공동개최와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의 일본 방문, 그리고 1999년 일본에서 개봉된 영화 <쉬리>가 그 이후 폭발한 한국 붐의 시작이다. <겨울연가> 이후, 몇 개의 한국 드라마가 연이어 인기를 얻으면서, 한국과 일본의 메이저 방송사는 <프렌즈>·<소나기 비 갠 오후>·<별의 소리>와 같은 한일 합작 드라마를 만들었다. 본서의 2장이 바로 이 한일 합작 드라마에 대한 분석인데, 이 드라마들의 특징은 한국인 남성과 일본인 여성 주인공으로 국가적·성적 역할분담을 철저히 이분화한 점이다.
이런 드라마적 설정은 현실에서는 일본 남성과 한국 여성의 결혼 비율이 일본 여성과 한국 남성의 결혼 비율보다 높다는 사실로 보아, 억지스러운 면이 있다. 하지만 그런 구도는 가장 대중적인 장르인 텔레비전 드라마가 그저 대중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대량 생산된 오락물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 권력과 지배 이데올로기를 은닉하고 반영하는 게 바로 대중문화라는 것을 새삼 돌이켜 보여준다. 한일 합작 드라마에서 한국 남성과 일본 여성이라는 정형화된 캐스팅이 반복되는 비밀은 어려운 게 아니다. 36년의 식민 체험과 88올림픽 이전까지 극성스레 이루어졌던 일본 남성들의 ‘기생관광’을 치욕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한국인은 일본 남성 주인공을 용납할 수 없었던 반면, 일본으로서는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침략적인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남성을 지우고 여성 주인공을 내세우는 편이 훨씬 국가적 이익이라고 여겨왔다. 다시 말해 과거 식민지 경험에서 비롯된 한국인의 ‘남성성’에 대한 강박과, 여성의 부드러운 이미지를 내세워 자국의 이미지를 바꾸려는 일본의 이해관계가 서로 일치·부합했던 것이다.
히라타 유키에의 한류 분석은 텍스트만으로는 한류의 성공을 온전히 드러낼 수 없다는 전제 아래 “콘텍스트를 함께 보아야 한다”(35쪽)고 강조한다. 특히 시청자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텔레비전 텍스트의 경우는 더욱 사회적·정치적·경제적 맥락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일본에서 열풍을 일으킨 <겨울연가>의 성공은 여성을 소비의 주체로 호명한 자본과 남성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국가적 귀속으로부터 자유로운 여성의 ‘초국가적’ 존재 형태에 빚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 <겨울연가>가 드라마 시청을 넘어 ‘관광 상품’화 되면서 지속적으로 <겨울연가> 열풍을 이어가게 된 데에는, 일본과 한국 간의 지리적 인접성과 두 나라간의 물가(환율) 차이에서 일본 관광객이 얻는 이점도 큰 몫을 한다. 저자는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미디어와 관광의 관계성이 밀접해진다는 논의를 펼치면서, <겨울연가>의 주된 소비자인 일본 여성을 “관객성과 관광객성”(103쪽)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주체로 파악한다(이 책 118쪽에는, ‘관(광)객’이라는 용어가 나온다. <겨울연가>의 촬영지를 찾아온 일본 여성은 촬영지를 찾아다니는 관광객이자, 드라마를 보는 관객이며, 그러한 자신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관객이다).
『한국을 소비하는 일본』은 저자가 언명하듯 “텍스트 자체를 분석하지는 않을 것”(103쪽)이라는 각오 아래 이루어진 한류 분석이다. 여기에 비해 함께 읽은 최혜실의 『한류 드라마의 스토리텔링』(새문사, 2007)은 한류 또는 <겨울연가>에 대한 “내재적 접근이 거의 전무후무하다”(62쪽)면서, 히라타 유키에와 같은 콘텍스트적 접근을 공박한다. 그런데 이 책은 ‘완벽한 예술 작품’에 대한 환상과 ‘신비평이’란 철지난 보자기로 ‘한류’를 덮어씌운 다음, ‘가을의 뮈토스’니,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니, 요나 콤플렉스니 하는 주문을 한껏 되뇐다. 그러고서 보자기를 들치면, ‘한류’는 어디론지 사라지고 없다. ‘한류’란 단순히 ‘잘 된 작품’을 의미하는 게 아닐 텐데, 원형·상징·은유를 풍부히 내장하고 있으면서 수용자의 무의식을 깊이 건드린 게 ‘한류 드라마’의 비밀이라니, 역사적이고 일시적이며 지역적(아시아)인 개념임에 분명할 ‘한류’는 예술일반으로 화해버린 것이다.
최혜실은 세익스피어가 그랬듯이 한류에서도 “가장 본질적인 것은 작품 자체에 대한 판단”(24쪽)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셰익스피어가 아직도 읽히는 것은, 그의 작품이 본질적인 면도 있겠지만, 그를 부양扶養하는 콘텍스트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를 부양浮揚하는 콘텍스트가 뒷받침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텍스트만 남아 행세하겠는가? 예술 작품을 감상하고 비평하는 방식이 즉자적인 텍스트 읽기를 뛰쳐나온 지가 언젠데… 『한류 드라마의 스토리텔링』 식의 한류 분석은, 한일 합작 드라마를 발표하는 기자회견장에서 일본 여배우는 한복을 입는데 한국의 남자 배우는 왜 의전상으로라도 기모노를 입고 나서지 못하는지, 또 일본의 <NHK>에서는 한국 드라마가 방송되는데 왜 우리나라 지상파에서는 일체의 일본 드라마가 방송되지 못하는지 등등의, 한류가 가진 한일간의 비대칭성을 설명하지 못한다. 이런 사회적·정치적·경제적 콘텍스트 앞에 무력한 내재적 접근이 무슨 의미를 가진다는 말인가?
사족 1. 최혜실의 책 19쪽 첫 번째 문단은 히라타 유키에의 책 19쪽 첫 번째 문단을 인용한 것이다. 여기서 두 사람은 전지구적 경제 시스템 속에서는 다섯 개의 ‘문화 흐름 풍경’이 두드러진다면서 “민족 풍경, 미디어 풍경, 기술 풍경, 자본 풍경, 관념 풍경”을 열거한다. 그러면서 다섯 가지 풍경은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며, 특히 미디어 풍경과 관념 풍경은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고 쓴다. 그런데 이 문단만으로는 열거한 다섯 개념이 각기 어떤 것이며, 어떤 식으로 연관되어 있는지 알 수 없다. 두 권 모두 대중적이고 입문서적인 책인데, 친절하지 못했다.
사족 2. 최혜실은 한국 대중문화에는 주인공이 불치병으로 죽는 ‘불치병 모티프’가 흔하다면서, 그 기원으로 황순원의 <소나기>를 꼽고 나서, <국화꽃 향기>·<열한 번째 사과나무>·<가을동화> 등등의 영화와 드라마를 열거한다. 그래, 그 뿐이 아니다. 『아버지』니 『가시고기』니 하는 소설도 그랬다. 그래서 진짜 궁금해졌다. 한국인들은 왜 불치병으로 죽는 주인공에 감동하고, 작가들은 왜 이런 서사를 되풀이 할까? 너무 냉소적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인들은 자살할 줄 모르기 때문에, 한국 문화는 자살을 용인하지 않기 때문에, 고작 ‘불치병 모티브’나 반복하면서 거기에 열광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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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