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5일
야마무라 오사무의 『천천히 읽기를 권함』(샨티, 2003)을 읽다. - 독자의 이해력과 책의 난해도가 빚어내는 상호조합이 독서의 속도이다. 그러니 이상적인 독서의 속도란 일반화할 수 없다. 그래서 ‘책은 어떤 속도로 읽는 게 좋으냐?’란 질문은 좀 우문이 아닐까? 그런데도 야마무라 오사무가 『천천히 읽기를 권함』을 쓴 까닭은, 우리나라 독자들에게도 친숙한 다치바나 다카시의 속독론과 다독론에 이의제기할 필요가 있어서다.
본문에 인용된 바에 따르면, 다치바나 다카시는 아직 번역되지 않은 『내가 읽은 재미있는 책, 엉터리 책, 그리고 나의 대량 독서술, 경이의 독서술』에서 “이런 방법이라면 한 쪽을 읽는 데 1초, 좀 늦더라도 2, 3초면 읽을 수 있다. 300쪽 책이라면 300초에서 900초, 그러니까 5분에서 1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자신의 속독술을 의기양양 피력해 놓은 모양이다. 여태껏 나는 독서와 교양에 대한 다치바나 다카시의 계발적인 의견에 귀 기울여 왔지만, 이건 뭐, ‘병신 인증’도 아니고… 어제 읽은 셔먼 영이 강조했듯이, 300쪽 짜리 책을 10여분 만에 읽을 수 있다고 큰소리치는 허세 속에는, 사고의 숙성을 본질로 하는 ‘책 문화’에 대한 이해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밥을 먹는다든지 산보를 한다든지 하는 일생적인 행위에는 애매모호하긴 하지만 그래도 정상적인 속도라는 게 있어서 그것을 거스르려면 생체의 리듬을 깨트려야 한다. 그런데 독서의 속도는 어느 정도를 정상이라고 해야 하는지 정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그냥 내버려두면 무엇이든 빨리 하고 싶어하는 것이 이 사회”인 탓에, 독서의 속도마저 느린 것보다 빠른 게 좋은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때문에 이런 가속도의 사회에 살면서, 책을 빨리 읽기 위해 조바심 내는 사람과 느리게 읽겠다고 작심한 사람은, 단지 책 읽기만이 아니라 각기 다른 인생관을 선택한 사람들이라고 해야 한다. 책을 빨리 읽고자 덤비는 사람은 효율과 생산이라는 현대적 방식의 삶에 적응하고 있는 것이고, 느리게 읽겠다고 다짐하는 사람은 효율과 생산 너머의 무엇엔가 몰두하는 사람일 것이다.
“읽기의 방식은 삶의 방식이다”고 저자가 쓴 바대로, 어떤 책을 어떤 속도로 또 얼마나 읽을 것인가라는 문제는, 나의 삶과 밀접히 연동된 것이다. 실제로 사회인이 되기 이전의 책과 사회인이 되고 나서의 책이 완연히 다른 것은, 나의 삶이 어떤 책을 선택하고 기피하도록 강제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러므로 속독과 다독으로 무장한 다치바나 다카시는 취재와 저술이 직업이 된 그 방면의 전문가가 어쩔 수 없이 택한 독서술일 뿐, 일상인마저 그를 흉내 내어 ‘불행한 독자’가 될 필요는 없다.
“책 한 쪽을 1초에서 3초, 300쪽을 5분에서 15분에 읽어버리는 읽기 방식”은 정상적인 속도로 메밀국수를 먹는 장면을 촬영한 비디오를 “열여덟 배 빠른 속도로 재생”한 것과 같이 “이미 살아 있는 리듬을 해체”한 것이라고 꼬집은 저자는, “살아가는 리듬이 다르면 세계관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다. 이 세계가 드러나는 방식이 전혀 달리 보인다”는 생물학자 모토카와 다쓰오의 말로 다시 한 번 ‘독서 천황’ 다치바나 다카시의 속독 예찬을 압박한다.
필요에 따라 책을 읽는 직업적인 독서가일수록 통독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독서라고 하면 우선 통독”이라는 저자는 필요에 따라 책 여기저기를 읽는 방식은 ‘살펴본다’거나 ‘참조한다’고 말해야지, 그것을 온전한 독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직업적인 다독가들은 그렇게 ‘살펴’보고 ‘참조’한 책들도 자신이 읽은 권수에 포함시킨다. “세상에, 그런 것까지 독서로 계산하다니!”라고 천천히 읽기를 권하는 이 책에는, 과연, 하고 크게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 대목이 있다. 저자는 ‘천천히 읽는’ 리듬에 따랐기에 얻을 수 있었던 즐거움의 예로, 스가와라 다카스에노 무스메의 『사라시나 일기』에 나오는 일절을 든다.
우리 고향에 일곱 동이, 세 동이 담가놓은 술항아리에 띄워놓은 호리병박 국자,
남풍 불면 북쪽으로 너울거리고,
북풍 불면 남쪽으로 너울거리고,
서풍 불면 동쪽으로 너울거리고,
동풍 불면 서쪽으로 너울거리는데
인용된 풍경은 한가롭다. 술을 담은 일곱 동이의 술항아리에 띄운 호리병박 국자가 바람이 부는 대로 너울거리며 떠도는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여러 개가 되는 국자가 일제히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데서 느긋하고 평온한 이상이 빚어지는데, 단 하나의 국자밖에 떠올리지 못했다면 ‘기준’을 넘어 너무 빨리 읽은 것이다.” 과연! 인용된 글을 읽으며, 일곱 동이의 술항아리에서 바람 따라 떠도는 일곱 개의 국자를 낱낱이 떠올리지 못하고, 하나의 국자 밖에 떠올리지 못한 사람은 과속한 것이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이 책을 읽었을까? 그의 표정이 궁금하다.
눈이 글자를 좇아가다 보면 그에 따라 정경이 나타난다. 눈의 활동이나 이해력의 활동이 다 갖추어진다. 그때는 아마 호흡도 심장 박동도 아주 좋을 것이다. 그것이 읽는다는 것이다. 기분 좋게 읽는 리듬을 타고 있을 때, 그 읽기는 읽는 사람 심신의 리듬이나 행복감과 호응한다. 독서란 책과 심신의 조화이다.
무슨 책인가를 읽고 있으면서 읽는 리듬을 잃어버렸다고 느낄 때, 나는 앞에서 든 “남풍 불면 북쪽으로 너울거리고, 북풍 불면 남쪽으로 너울거리고, 서풍 불면 동쪽으로 너울거리고, 동풍 불면 서쪽으로 너울거리고…”라는, 이 한 구절을 생각한다.
그 구절은 읽는 리듬을 회복시켜 줄 뿐만 아니라 희미하긴 하지만 놀랍게도 심신의 리듬까지 조절해 준다. 적어도 그런 기분이 든다. 물론 속독 같은 것에는 그런 효능이 없다.
사족이다. 본문에도 나오지만, 다치바나 다카시는 문학 작품이나 에세이마저 속독하라고 권하지 않는다. 그래서 야마무라 오사무의 이의제기가 원천 무효일수도 있다. 대신 다치바나 다카시는 속독을 할 수 없는 책, 읽는 데 시간이 걸리는 책, 천천히 읽어야 하는 문학 작품 같은 것은 아예 읽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논의는 새로 시작되어야 한다. ‘독서’란 어떤 책을 읽는 일에 해당하는가? 혹은 더 근본적으로 독서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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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