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4일
셔먼 영의 『책은 죽었다』(눈과 마음, 2008)를 읽다. - ‘책의 죽음’을 놓고 벌이는 허다한 논쟁에 또 한 사람의 필자가 가담했다. 호주의 한 대학에서 미디어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셔먼 영이 바로 그 사람이다.
저자는 책을 ‘책 문화(Book Culture)’에 속한 책과 ‘인쇄 문화’에 속한 책으로 나누고, 언제부터인가 ‘책의 죽음’을 이야기할 때, 운위되는 것은 인쇄 문화에 속한 책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책 문화에 속한 책과 인쇄 문화에 속한 책은 어떻게 다른가? 먼저 ‘인쇄 문화’에 속한 책은, 말 그대로 종이에 잉크를 묻혀 제본한 구텐베르크 이후의 발명품으로서의 책이다. 셔먼 영은 이런 책은 인터넷이나 영상과 같은 새로운 미디어에 의해 점차 사라져 갈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건 하등 새로울 얘기가 없는 현대의 상식이다.
그렇다면 ‘책 문화’에 속한 책이란 어떤 것일까?: “‘책 문화’는 책을 특징짓는 그 무엇이다. 책은 인쇄 문화의 산물이지만 실질적으로 책은 인쇄 문화보다 한층 더 정교한 세계관을 이끌어 왔다. 책의 본질은 구텐베르크와 이동식 활자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대중들이 다양한 사상을 접하고 깊이 있는 사고를 하며 다른 이들의 생각이나 의견을 배우고 익히고 자기만의 고유한 생각을 창조하게 하는 것, 즉 공적인 대화와 담론의 대중화 같은 이상적인 목표에 책의 본질이 있다.”
저자의 논리를 요약하면, 종이에 잉크를 묻힌 결과물은 인쇄 문화이지만, 그것이 곧바로 책 문화 속에 편입되지는 않는다. “인쇄 기술은 책을 만드는 기술의 전부가 아니다. 책은 단순히 종이에 무언가를 인쇄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신문지 속에 끼어 나오는 ‘아파트 광고 전단’는 인쇄 문화의 결과물이긴 하지만, ‘사상’과는 상관없으며, 인간의 ‘내적 활동(마음의 대화)’을 촉발시키지도 않는다. 다시 강조하면 책이란 “‘깊은 사고’를 통해 ‘깊은 대화’에 이르게 하는 것”이며, “책 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책 속에 담긴 사상이 깊은 사고 과정을 거쳐 충분히 고찰되고 기술적으로 다듬어진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미디어에 의해 죽어 가는 것은, 인쇄 문화이지 책 문화에 속한 책은 아니라는 뜻일까? 사태가 그처럼 낙관적이라면 좋겠지만, 사정은 그렇지 않다. 새로운 미디어라고 말하는 인터넷은 인쇄 문화를 죽일 뿐 아니라, 생각이 숙성될 시간을 빼앗음으로써 궁극에는 사고와 내적 활동의 특징을 이루는 책 문화조차 파괴한다. 이런 결론조차도, ‘책의 죽음’에 귀 기울여온 경험이 흔했던 독자들에겐 낯선 게 아니다.
인터넷이 조성한 새로운 문화 환경이 종이책은 물론이고, 인간 고유의 사고 능력까지 부박하게 만들 것이란 진단은 어디서나 듣는 말이다. 그보다는 ‘책 문화’가 외부 환경이 아니라, 그 문화 안에서부터 썩어들어가고 있다는 게 문제다. 저자는 책을 ‘기능적인 책’과, ‘안티 책(anti book)’, ‘책’으로 나눈다. 먼저 기능적인 책이란 교과서나 여행안내서와 같은 책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안티 책’이란? 안티 책은 “저자가 누군지도 모르는 운동선수의 자서전”, “유명 인사의 요리책이나 영화 개봉에 맞추어 곁다리로 끼워 파는 책”과 같은 상업적인 책으로 사상이 담겨 있지도, 사고를 촉발하지도 못하는 책이다. 저자는 이런 안티 책을 ‘책 문화’가 아닌 ‘인쇄 문화’ 속에 끼워 넣는다: “패리스 힐튼이 쓴 『당신의 상속녀 이야기 Your Heiress Diaries』는 인쇄 기술의 산물이겠지만 좀 더 넓게 보자면 인쇄 문화의 단면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것은 책이 아니라 안티 책이라서 책 문화에 들어가지 못한다.”
요컨대, 안티 책은 인쇄 문화의 막장인 ‘찌라시’로, 그것은 책 문화에 들지 못한다. 여기까지 얘기하면 저자가 세 개로 분류한 ‘기능적인 책·안티 책·책’ 가운데 책이 무엇을 뜻하는 건지 두루 짐작이 갈 것이다. 저자에게 ‘책’이란, 동어반복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좋은 책’을 의미한다(‘좋은 책’에 대해서는 68~70쪽 등에).
‘책의 죽음’은 책 외부의 미디어 변화 때문에 벌어지기도 하지만, “책은 출판계가 사상이 아닌 물건을 파는 데 열을 올리기 때문에 죽은 것이다”고 말하는 애서가의 내부 고발에도 귀 기울일 필요가 있으며, 물건object으로서의 ‘책의 죽음’보다, 인간을 사고하게 이끌었던 ‘책 문화’의 기진氣盡이 더 심각한 것이란 경고에 깨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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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