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3일
『애서광 이야기』(범우사, 2004)를 읽다. - 범우문고 192번으로 나온 이 책 표지에는 ‘구스타브 플로베르 지음’이라고 씌어져 있으나, 실제로는 플로베르보다 30년 후대인 프랑스 작가 옥타브 유잔느와, 그보다 또 30년 후대인 오스트리아 작가 스테판 츠바이크의 단편 소설 세 편을 모은 것이다. 세 단편 가운데 책의 표제가 된 단편이 플로베르의 것이긴 하지만, 플로베르란 이름만 보고 덥석 책을 구입한 독자의 실망을 상상할 수 있다면 당연히 ‘구스타브 플로베르 外’라고 명기되었어야 한다.
이 책을 기획한 편집자의 나태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세 사람의 작품은 옥타브 유잔느·구스타브 플로베르·스테판 츠바이크 순으로 게재되어 있는데, 유잔느와 플로베르의 단편 사이에 책의 표제와 같은 제목의 에세이가 한 편 끼어 있다. 다른 작품에는 제목 아래 필자의 이름을 밝혀 놓았는데, 이 에세이에는 필자의 이름이 없다. 그래서 독자는 “『애서광 이야기』의 작가인 구스타브 플로베르는 1821년 12월 12일에 잔다르크가 분살 당한 곳으로 유명한 프랑스 노르망디 루앙에서 한 외과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평생 동안 예술을 위해 독신으로 생활하다 1880년 뇌졸중으로 사망했다”고 시작하는 난데없는 글을 읽으며, ‘아, 이게 앞으로 읽게 될 플로베르의 작품에 대한 범우사 편집부의 사전 해설이구나’라고 여기게 된다. 그런데 이 글은 플로베르의 작품에 대한 개별적 해설이 아니라, 비블리오마니아(bibliomania, 애서광)에 관해 어느 일본인이 쓴 한 편의 독립적인 에세이다. 엉뚱한 편집도 편집이지만, 저자의 이름을 누락한 이유는 헤아릴 길이 없다.
여기 실린 세 편의 단편은 세상에서 단 한 권밖에 없는 유일본이나 희귀본을 모으는데 혈안이 된 고서 수집가들의 엽기·괴벽을 파헤치고 있다. 워낙 단순한 얘기들이라 여기 자세히 줄거리를 쓰는 것은 미리니름이라, 고서 수집광의 소유를 향한 욕망의 잔치(유잔느), 경쟁자에 대한 선망이 일상화된 수집가의 비극(플로베르), 자신의 수집물을 인정받고자 하는 수집가의 노출욕(츠바이크) 정도로 요약하자. 대신 책벌레書蟲·서치書癡·서광書狂·서음가書淫家·서선書仙등의 숱한 별칭을 갖고 있는 애서광에 대해 얘기하자.
앞서 본서의 구성을 잠시 말했는데, 이 책의 맨 앞엔 문학박사이자 모 대학의 명예교수라는 모 씨의 작품해설 「책에 미친 사람들의 길라잡이」가 붙어 있다. 그러나 내가 ‘애서광증愛書狂症’을 들여다보기 위해 참조한 문서는 모 씨의 무료無聊한 해설도, 또 범우사 편집부로부터 무지막지하게 이름을 박탈당한 어느 일본 필자의 글도 아닌, 발터 벤야민의 에세이 두 편이다. 그의 선집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민음사, 1983)에는 수집에 대한 두 편의 글이 실려 있다.
앞서 츠바이크의 단편을 한마디로 요약하면서, 애서광의 심리는 반드시 자신의 수집물을 인정받고자 하는 노출욕으로 드러난다고 썼다. 이런 귀중한 해석을 준 글이 바로 벤야민의 「수집가와 역사가로서의 푹스」다. 『풍속의 역사』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에두아르트 푹스에 대해 쓰면서 벤야민은 수집가의 특성에 관한 깊은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ⅰ) 수집가는 원래 학자는 아니었지만, 수집활동을 통한 박식함과 전문성으로 학자가 될 수 있다. ⅱ) 수집가는 고급한 학술적 연구자들에게 “백안시당하는 경전외적經典外的 사물들에 시선”을 주고 “이름 없는 자들과 그 이름 없는 자들의 솜씨의 흔적을 보존”함으로써 대중예술(문화)에 관한 관심을 끌어내고, 예술이나 문화가 개별 천재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 준다. ⅲ) 수집가는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정열적인 사람들로, 공공 박물관은 독창성이라는 점에서 절대 개인적인 수집가를 넘어설 수 없다. ⅳ) 수집가는 가난한 사람이다(부자였던 사람도, 결국은 가난하게 된다). 호주머니는 텅 비어 있지만 “꿈속에서처럼 앞만 보고” 달려가는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백만장자이다. ⅴ) 수집가는 광적인 낭만주의자이기보다 냉철한 자본가일 수 있으며, 위대한 수집가는 보물을 보존하는 사람이면서 자신의 수집물을 공개적으로 과시하고 싶은 노출증을 동시에 가진다.
「수집가와 역사가로서의 푹스」가 수집 일반을 다루었다면, 「나의 서재 공개 - 수집에 관한 한 강연」은 이 독후감에 딱 들어맞는 순수한 ‘책 수집’을 얘기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여러 가지 수집벽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책에 관한 열정은 벤야민의 일생을 결정했다. 자신의 유년 시절을 회고하고 있는 『베를린의 유년 시절』(솔, 1992) 82쪽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어쨌든 사람들은 제각기―다른 것보다도 더욱 지속적으로―옛날의 버릇들을 떠올리게 하는 사물들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물건들을 대하게 됨으로써 그들은 자신의 현존재를 규정하게 하는 능력을 형성시킬 수 있다. 이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독서와 책이었다.”
「나의 서재 공개 - 수집에 관한 한 강연」은 『애서광 이야기』에 나오는 가련한 주인공들에 대한 최상의 변호다. 주인공들의 천진스러운 탐욕과 국어사전에 “속을 태우며 조급하게 구는 일”로 설명되는 그들의 ‘안달’이, 벤야민에겐 “수집가를 관통하고 있는 어린애 같은 면”으로 포용된다. 그들이 신간서적보다 고서적에 관심을 갖는 것은, 어린애들이 어른보다 더 잘하는 어떤 능력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진정한 수집가에게 있어서 고본古本을 얻는 것은 그 고본의 재탄생에 맞먹는다고 말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늙은이 같은 면을 가지고 있는 수집가를 관통하고 있는 어린애 같은 면은 바로 이러한 데에 있다. 잘 알다시피 어린애들은 존재의 재생을 수백 가지 방식으로 척척 해낼 수 있다. 어린애들에게 있어서 수집한다는 것은 재생의 단 한 가지 방법에 불과하다. 대상을 그리는 일, 자르는 일, 종이에 그린 그림을 다른 물건에 붙이는 일, 그리고 물건을 손으로 잡는 일에서 시작해서 이름을 붙이는 일에까지 이르는 일련의 어린이들의 사물파악 방식은 그들에겐 재생의 또 다른 방식인 것이다. 해묵은 세계를 새롭게 하는 일, 바로 이것이 수집가의 소망 속에 깃들어 있는 가장 깊은 충동이다. 고서적을 모으는 수집가가 화려한 장정의 신간서적을 사 모으는 데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보다 수집의 원천에 더 가까이 서 있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벤야민은 이 글에서 무릇 여러 종류의 수집가들이 그러하듯 책 수집가들 역시 “그가 맺는 사물과의 관계는 그 사물들이 지닌 기능가치, 즉 그것들의 실용성 내지 쓰임새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당신은 이 책을 모두 읽었습니까?”라는 방문객에게 “아닙니다. 십 분의 일도 읽지 못했습니다. 혹시 당신은 매일같이 세브르 도자기로 식사를 합니까?”라고 반문했다던 아나톨 프랑스의 일화를 인용하고 있다.
역설적이지만 책 수집가가 책을 읽게 되면, 책을 모을 수가 없다. 읽은 책만 서가에 꽂아 두기로 한다면, 서가의 선반은 매년 겨우 한두 칸 밖에 자라나지(?) 못할 것이다. 책 수집가는 책 본래의 기능인 ‘읽기(독서)’와 다른 방법으로 책을 소유한다. 어떻게 보면, 읽기를 통한 책의 소유란 그야말로 거죽만의 것(실용적)일 수 있다. 벤야민에 따르면 진정한 소유란, 어떤 사물의 실용적인 소유를 넘어, “마력적인 범주”에 그 사물을 가두는 일이다. 수집가가 특별하게 만들어 내는 “마력적 범주”란, 내가 어떤 사물과 ‘운명의 무대’에서 만난다는 뜻이다. 그 사물이 만들어진 시대·지역·솜씨·전 소유주 등등의 숱한 요소와 그 사물을 발견하고 구입한 상황과 같은 변수가 수집가의 의식에 아로새겨지면서 하나의 사물은 “마력적 범주” 속에 들게 되고, 그 순간 수집가는 새로운 수집물의 운명을 해석하는 해석가가 된다(다시 말해 똑같은 사물이 내게서는 당신과 달리 존재한다. 우리는 나에게만 유의미하고 별나게 취급되는 책이나 영화, 미술, 음악 작품과 같은 것을 따로 갖고 있다. 벤야민의 “마력적 범주”란 그런 뜻이다).
자, 그러면 당신은 애서광 혹은 책 수집가인가? ( ) 안에 당신의 경험과 의견을 ○, × 로 표하시오.
1. 책을 빌리고 돌려주지 않은 적이 있다. ( )
2. 책을 한 번이라도 훔쳐 본 적이 있다(교과서나 성경 제외). ( )
3. 서점 주인에게 외상을 달라고 떼를 써 본 적이 있다. ( )
4. 다 읽지 못할 것을 예감하면서도 사는 책이 많다. ( )
5. 매일 서점을 들러야 직성이 풀린다(인터넷 서점도 포함). ( )
6. 단골 헌책방이 있다. ( )
7. 여행을 가면 일부러 그곳에서 가장 큰 서점을 둘러본다. ( )
8. 여행을 가면 현지 사람에게 헌책방이 어디 있는지 반드시 물어본다. ( )
9. 초판본을 보면 마음이 설렌다. ( )
10. 자신의 책에 소유주를 밝히는 나만의 표식을 한다. ( )
11. 내용은 별로지만, 책 자체가 아름다우면 마음이 동한다. ( )
12. 도서관을 좋아하지만, 내가 직접 소유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 )
13. 새로운 판본이 나오면 반드시 집의 것과 비교해 본다. ( )
14. 새책방 보다 헌책방에 더 관심이 많다. ( )
15. 정가보다 더 비싸게 주고 산 책이 있다. ( )
16. 어떤 형태로든 책이 변형될 짓을 하지 않는다. ( )
17. 책에 낙서하지 못한다(예를 들어 친구의 전화번호도 적지 못한다). ( )
18. 쌀이 떨어져도 사야 할 책은 꼭 산다. ( )
19. 어떤 용도(목욕, 이발 등등)로 써야 할 돈을 책 사는 데 쓴 적이 있다. ( )
20. 서평을 꼼꼼히 훑어보며, 매주 구입 목록을 쓴다. ( )
21. 어떤 책을 달라고 소유주에게 떼를 쓴 적이 있다. ( )
22. 좋은 책을 사면, 저절로 술 생각이 난다. ( )
23. 우울할 때 책을 쓰다듬거나 책등의 제목만 읽어도 즐거워진다. ( )
24. 책을 절대 빌려 읽지 못한다(도서관 제외). ( )
25. 아주 정기적으로 꿈속에서 책을 찾아다닌다. ( )
26. 술을 마시고 필름이 끊어져도, 그날 들고 있던 책은 고스란히 껴안고 온다. ( )
27. 생수 2리터짜리 한 병은 무겁지만, 책은 아무리 많아도 무겁지 않다. ( )
28. 전철이든 어디서든 다른 사람이 읽고 있는 책은 반드시 제목을 봐야 한다. ( )
29. 잡지의 기획물들을 찢거나 편집해서 나만의 책을 만든다. ( )
30. 책에는 내용과 다른 추억의 가치가 따로 있다고 인정하는 편이다. ( )
31. 다른 데서는 모르겠는데, 유독 서점에서 예쁜 여자를 보면 거의 심장이 멎는다(이 설문에 응하는 사람이 여자든 남자든, ‘멋진 남자’로 대체하고 싶은 사람은 그리하시오). ( )
○가 많으면 많을수록 당신은 애서광에 가깝다. 나는 1. 10, 11, 21에서만 ×를 했다. 30번 문항은 ○, × 를 하지 못하겠다. 그런 편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나이 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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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