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2일
최영의 『박정희의 사상과 행동』(현음사, 1995)을 읽다. - 박정희의 사상과 행동을 분석하고 평가하기 위해 저자가 동원한 방법론은 세 개다. ① 심리분석 ② 한·일간의 비교 문화론 ③ 박정희의 정책 사례 연구.
①에 관해서는 본서보다 뒤늦지만, 신용구의 『박정희 정신분석, 신화는 없다』(뜨인돌, 2000)를 일찌감치 읽은 적이 있다. 신용구는 프로이트의 개인 심리학을 바탕으로 ‘영아살해의 위협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늦둥이 박정희의 생존욕’을 중심에 놓고 박정희의 생애와 행동을 분석했다. 반면 최영은 정치 심리학을 개척한 H. D. 라스웰의 이론을 많이 참고한 듯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은, 내가 라스웰의 이름과 이론을 신용구의 책에서밖에 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최영 또한 본문에서 한 번도 그를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라스웰의 영문판 저서 세 권이, 이 책의 말미에 붙은 참고문헌에 적혀 있다). 라스웰의 이론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이런 구절들이 ①의 방법론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 퍼스낼리티가 강박형强拍型, 냉철형冷徹型일 경우 대체로 참모參謀 스타일이지 지휘관指揮官으로는 맞지 않는다. 이러한 측면에서 포용력이 컸던 이용문李龍文 장군이 장도영 장군 대신 군을 대표해서 명실상부하게 훈타(junta: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과 같은 군장교 정치권력 엘리트 지배 그룹)의 수장 노릇을 했었더라면 박정희 18년 독재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박정희를 매료시켰던 당시 37세 이용문의 요절(비행기 사고)은 한국의 현대사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고까지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 일선 지휘관보다는 참모로서 더 적격이었으리라는 평도 들었던 박정희는 그 성격이 뒤에서 일을 꾸미기에 적합했다. 이용문이 사라짐으로써 박정희는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쿠데타 지휘관이 되어 전면에 나섰고, 그 뒤의 한국의 정치문화를 자신의 성격에 맞추어 변모시켰던 것이다”, “다음으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박정희의 교육에 관한 것인데, 하도 가난해서 관비로 공부할 수 있는 대구사범학교에 진학, 그 후 만주군관학교,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수석과 3등으로 졸업했다. 우등생 멘탤리티(心性)는 대체로 규격주의, 완전주의, 경건주의에 빠진다. 말하자면 창조적 두뇌 회전이 느리고 약삭빠른 이기적 사고방식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자기의 약점을 커버하려는 보상심리報償心理가 대단히 강하다”, “그런데 말이다. 같은 개발독재 증후군에 속해 있었던 이광요 싱가포르 수상처럼 왜 평화로운 정권 교체 노력을 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가난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어려움을 쓰다듬어 주면서도 일단 라이벌의 우려가 있거나 그의 청렴한 유아독존의 비위를 건드리면 가차없이 내리치는 ‘굴절된 사무라이 정신’의 발로 때문일 것이다.”
박정희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준 인물로 저자는 대구사범 시절 배속 장교였던 아리카와 대좌를 들고 있다. 아리카와는 소년 박정희에게 사무라이 정신을 심어 주었는데, 최영에 따르면 아리카와가 “소년 박정희에게 감화를 준 사무라이 정신은, 소화유신昭和維新 시기의 것”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소화유신이란 2·26사건(1936)을 계기로 일본이 군국주의로 나가게 되는 시기로, 저자는 그것을 일본 근대화론을 기치로 내세웠던 명치유신(明治維新=메이지유신)의 굴절된 형태로 본다. 태평양전쟁 중의 가미가제 특공대로부터 전후 미시마 유키오의 할복자살로 연결되는 소화유신의 초국가주의 사상은 “찢어지게 가난하고 감수성이 예민하여 우울증에 시달렸던 소년 박정희”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②다. 저자는 정치를 비롯한 모든 문화현상에는 개인이나 집단이 거스를 수 없는 공통된 가치기준이나 지배원리가 있다면서 그것을 ‘범 패러다임汎 paradigm’이라고 부른다. 조선조 5백 년과 도쿠가와 바쿠후(=幕府) 260년은 쇄국鎖國 체제란 점에서는 같았지만 붓의 문화를 중시하는 조선이 ‘가로사회(평등)’인데 반해, 칼의 힘이 절대적이었던 일본은 ‘세로사회(수직)’였던 만큼, 범 패러다임이 달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똑같은 주자학이라도 가로사회인 조선에서는 충(세로)보다 효(가로)가 앞섰고, 세로사회인 일본에서는 효보다 충이 앞섰다.
문(붓)의 문화가 지배했던 조선에서는 학문이 과거를 통해 정치에 복속되어 있으면서, 학문을 출세의 수단으로 삼았다. 이와 달리 무(칼)의 문화가 지배했던 일본에서 학문하는 사람들은 그저 무사의 고문역을 하는 정도였고, 사회적 지위도 사무라이(武士)와 죠징(町人조=商人)의 중간 정도였다. 이런 영향 아래 박정희는 출세 영달의 코스로 보통학교 교사보다는 ‘긴 칼을 차는’ 만주군관학교를 택한 것이다(저자는 박정희에게만 아니라, 출세하기 위해 ‘긴 칼’을 찼던 일제 시기의 조선인 일본군 장교들과 5·16 후 최고위원이었던 모두에게 이 ‘멘탤리티’를 적용한다).
똑같은 쇄국 체제를 운영했지만, 일본은 무의 사회였기 때문에 페리 제독의 ‘흑선黑線’이 함포 위협을 하자 곧바로 개항을 받아들였다. “칼의 힘을 절대화하고 법도法度에는 무조건 복종해 온 일본인들은, ‘뜻대로 되지 않는 이 세상에 대한 일종의 체념이 몸에 배어”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문의 사회였던 조선에서는 서양 군함을 보자, 거의 무방비였음에도 불구하고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양이의 침범에 직면하여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함은 매국행위가 된다)’이라고 돌에 새긴 척화비斥和碑를 전국 각지에 세워, 기염을 토했다. “이것은 사변적思辨的인 문인체제의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문인 우선의 온상에 안주하면서도 ‘무武’에 관해서는 누군가가 어떻게 해 주겠지 하는 분위기도 있었을 것이다. 이때 문인체제가 내세운 것은 그 알량한 정통성正統性이었다니 어안이 벙벙해질 수밖에.”
근대화란 기술 혁신이 주영역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일본이 각 분야에서 서양 문물을 빠른 속도로 흡수할 수 있었던 것은, 칼의 사회가 만들어 놓은 ‘천하제일’의 모럴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수직적으로 질서화 된 사회에서 일본 대중이 자신을 투여할 수 있는 영역은 “각 분야마다 서민들도 분수를 알아 각기 ‘천하제일’”이 되는 것이었고, 관청은 관청대로 그런 풍조를 권장하면서 “대장간, 갑옷 만들기, 도자기 등 여러 분야에서 천하제일의 칭호를 부여했다.” 이 말 끝에 저자는 임진왜란 때 포로가 되어 일본에 주자학을 전수해 준 강항姜沆의 『간양록看羊錄』 가운데 한 대목을 인용한다(저자의 인용이 소략한데다가 편집되어 있어, 직접 원전을 찾아 인용함):
왜놈 풍습에 놈들은 어떠한 재주, 어떠한 물건이라도 반드시 천하제일을 내세웁니다. 천하제일이란 명수名手의 손을 거쳐 나온 것이면 제아무리 추악하고 하찮은 물건이라도 천금을 아끼지 않고 덤벼듭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교묘한 물건이라도 명수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면 물건 수에 넣지도 않습니다.
정원수를 묶는다, 벽을 칠한다, 지붕을 인다는 따위도 그렇거니와 심지어는 패를 찬다, 도장을 찍는다는 따위에 이르기까지 천하제일을 자랑하려는 풍습이 있습니다. 천하제일의 명패가 붙은 것이면 이리 기웃 저리 기웃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좋긴 좋은데!” 알은체, 별것인 체하면서 금이나 은을 30~40정쯤 내던지는 것은 보통입니다. 굴전직부堀田織部란 자가 있는데 이 자는 무슨 일에나 천하제일이니, 꽃나무를 심는다, 다실茶室을 짓는 따위 일에는 으레 황금 100정이 정가입니다. 숯 담는 깨진 표주박에다 물 긷는 나무통 부스러기까지도 직부가 한번 좋은 것이라 칭찬하면 값을 묻는 법이 없습니다. 달라는 것이 그대로 값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을호 옮김, 『간양록』, 서해문집, 2005, 171~172쪽)
다시 말해 명치유신 하의 서구 문물 흡수현상은 갑자기 된 것이 아니라, 범 패러다임으로 일본 사회 안에 형성되어 있던 전문 직업의식이 바탕 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일본의 대기업들도 청일전쟁·노일전쟁·태평양전쟁 수행에 대단한 공적을 올리기는 했지만, 이것은 ‘상인은 어디까지나 이익추구로서 천하제일이 돼야 한다’는 사상의 실천이었을 뿐, 우리나라에서와 같은 정경유착政經癒着은 아니라고 본다. 우리나라의 정경유착은 일본의 것과 달리, ‘강력한 권력지향’의 산물이라고 한다(이와 비슷한 말을 마광수도 어디에선가 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는 정치권력만 최고로 치기 때문에, 기업가들이 기업을 하다 말고 모두 정치를 하게 된다는…).
저자는 한국형韓國型 정경유착의 원흉으로 박정희를 꼽는다. 박정희와 그의 훈타들은 정통성이 없었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떡고물 주듯 시여할 ‘엿’이 필요하게 되었고, 거기에 필요한 ‘검은돈’을 재벌이 조달했다. 그리하여 “상인과 기업인의 권력지향성이 한국인의 범 패러다임의 커다란 속성”이었므로 정경유착은 걷잡을 수 없게 됐다(여기서 ‘모든 잘못은 박정희 탓이냐?’는 박정희 숭배자들의 반발을 예상할 수 있다. 2006년 푸른역사에서 출간된 김진송의 『장미와 씨날코-1959년 이기붕家의 선물 꾸러미』는 정경유착이 박정희 시대의 산물이라는 것을 증명해 준다).
이 책은 자주 가는 헌 책방에서 구입했다. 저자가 증정용으로 서명해놓았던 듯한 표지 속지가 찢겨 나간데다가 워낙 낙서가 많이 되어 있었지만, 한 번 읽어보고 말 양으로 괘념치 않았다. 그런데 필히 두고두고 참조해야 할 것 같아서, 인터넷 서점에 새 책을 주문했다. 흔히 박정희를 평가하는 축에서는 박정희의 ‘산업화’를 공으로 치지만, 저자는 그런 평가에 냉정하다. 소위 6개의 혁명공약 “절망과 기아선상에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 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던 제4항을 그런대로 이룬 것 같지만, “이승만이 미국식 민주주의를 모방하는 데 바쁘고 민주주의 정신을 함양하는 데 실패한 것처럼 박정희도 산업화의 성과만 치중하고 그 바탕인 자본주의 정신을 함양하는 데는 실패한 비슷한 실수를 범했다”는 것이다. 박정희 사후, 박정희가 죽기 직전에 완성되었던 성수대교의 붕괴가 그것의 좋은 일례며, 실패의 종합적이고 최종적인 확인은 1997년에 12월에 찾아왔다.
한 번 읽은 헌 책을 새로 사게 된 까닭은 스치듯 요약해 본 ①과 ②가 흥미로워서가 아니다. 이 독후감에서는 생략하게 될 ③에서는 월남 파병의 역사적 평가, 유신체제의 정치적 의미, 새마을운동과 박정희의 근대화 이념 등이 다루어지고 있지만, 그 때문도 아니다. 『박정희의 사상과 행동』을 곁에 놓고 오래 보려는 것은 50~58쪽에 나오는 귀중한 혜안 때문이다. 한반도는 5천여 년간 대륙과 호흡해 왔다. 그런데 분단구조에 포박된 채, 한·미·일 3국 동맹의 덫에서 헤어 나올 출구전략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경제적(地經濟的·geo-economics) 차원의 운신 폭은 더욱 좁아졌다. 조선의 청년들이 민족의 진로를 놓고 일대 토론을 해야 할 시점에 박정희는 ‘사무라이 숭배’로 달아났고, 친일파 청산마저도 되지 않은 나라를 찬탈했다. 냉전사고 방식에 깊이 젖어 있는 그에게 “남북한을 망라한 단일시장, 즉 ‘한민족 경제생활권’의 형성 논리”는 보이지 않았다: “요컨대, 박정희의 비극은, 작은 섬나라(?) 한국의 정치 지도자가 되다 보니까, 그것도 미·소 양강대국이 남북을 갈라놓은 분단구조의 사고방식에 익숙하다 보니까, 결국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를 리얼하게 수용할 수 있는 주·객관적 판단력을 미처 갖추지 못했을 것이므로, 분단구조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 이리하여 남북 분단의 구조논리는 한국으로 하여금 5천여 년의 문화적 유대를 맺어 왔던 대륙 중원大陸 中原과 만주·연해주 북방과의 단절을 초래했던 것이다. 따라서 박정희 서거 이후 정책으로 클로즈업된 한국의 북방정책(北方政策·Nordpolitik)은 단지 국제정치적 접근과 교역의 이익 증진이라는 일과성에 바탕을 둔 성격의 것이 아니다. 보다 역사·문화적인 ‘뿌리’로의 회귀를 뜻한다는 문제의식이 설정되어야만 북방정책의 개념 설정이 명료해진다”, “생존에서 도약하여 한민족의 최종 염원인 평화의 욕구와 통일의 의지를 구현키 위해서는 5천여 년간 전통적으로 관계를 맺어왔던 대륙과의 재호흡을 시도해야 한다. 그래야만 반반도半半島 지대에 웅크리고 있는 북한을 후배지後背地 국가인 중국, 러시아를 통해서 더욱 관계를 호전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한국의 대륙에 대한 회귀운동에 입각한 북방정책과 분단구조의 극복은 표리일체의 관계에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박정희의 국가건설은 수출입국에서 표출되는 부국강병책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단순화시켜 얘기한다면 반반도지대 북한과 거기에 거주하는 우리 동포에 대한 ‘애틋한’ 정감이 희박했다고 할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한국의 장군이며 대통령이었던 박정희는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가 국가건설이념으로 표방했던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의 신봉자였던 것이다.”
사족 1. 이광요는 자신의 후계자로 자신의 아들을 수상으로 세웠다.
사족 2. 저자의 고향은 함경북도 명천군으로, 북방정책에 대한 열성은 그의 월남 체험과 상관있어 보이며, 박정희에 대한 다음과 같은 불만도 그렇게 이해해야 한다: “북에서 내려온 1천만 실향민 중에서 각 부문에 걸쳐 엘리트로 클 수 있도록 배려한 적이 그 얼마나 되었냐고 반문하고 싶다 (…) 5·16 직후 ‘반혁명사건’이라는 명칭하에 군사 쿠데타의 동료들, 즉 한강을 같이 건너온 소위 ‘혁명동지’ 중 북한 출신은 대거 영어의 신세가 되지 않았는가 말이다.” 이 독후감의 첫머리에 소개된 이용문 장군은 평양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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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