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1일
S. E. 힌턴 『아웃사이더』(문예출판사, 2004)를 읽다. - 이 소설의 시작과 끝은 같은 문장이다: “어두운 영화관을 나와 밝은 햇빛 속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나는 오직 두 가지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폴 뉴먼, 그리고 어떻게 집에 가야 할지를.” 이렇듯 똑같은 문장으로 수미일관하는 소설들은, 대부분 ‘작가의 탄생기’이다. 『아웃사이더』는 거기에 딱 들어맞는 소설로, 이 소설은 열네 살 난 주인공 포니보이가 글쓰기를 통해 혼란스러웠던 자신의 성장 경험을 들여다보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 작품은 1967년에 발표되어 단숨에 미국 청소년 문학의 고전이 되었는데, 이 작품의 어느 대목은 미국 십대들을 위한 또 다른 고전인 J. 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떠올리게 한다. 자니 케이드와 포니보이가 윈드릭스빌의 오래된 교회로 피신했을 때, 두 십대 소년이 화재를 만난 어린 초등학생들을 구해주는 장면은 ‘낭떠러지에 떨어질지도 모르는 아이들을 구하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겠다’던 홀든 콜필드를 생각나게 한다. 자니와 포니보이가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불더미가 된 교회로 달려 들어갔을 때, 자기 학생들을 구할 의무가 있었던 학교 선생은 큰 소리만 치고 뒤로 빠졌다.
『아웃사이더』는 이스트사이드에 거주하는 노동계층의 자식들인 그리저greaser와 웨스트사이드에 거주하는 부잣집 자제들인 소셜social들 간의 반목과 집단 난투를 플롯의 중심에 놓고 있어서, 미국 소설에서는 찾기 힘든 계급 갈등을 도드라지게 하려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작중 화자인 포니보이가 자신이 속한 그리저 무리들 가운데 한 사람인 댈러스 윈스턴-댈리를 소개하는 대목을 자세히 보면, 미국 사회에서 ‘계급 갈등’은 부차적인 것으로 물러나 있다: “뉴욕에 있을 때 댈리는 패싸움에 열을 올렸지만, 이곳에는 조직된 패거리 자체가 드물었다. 함께 어울려 다니는 친구들 무리가 있을 뿐이었으며, 싸움은 사회적 계급 간에 존재했다. 이른바 ‘난투’라는 것은 대체로 복수전에서 비롯되었고, [뉴욕에서] 양편은 그저 자기 친구들을 데리고 왔던 것이다. ‘리버 킹스’나 ‘타이버 스트리트 타이거즈’처럼, 정식으로 이름을 가진 조직이 근방에 몇 있기는 했다. 하지만 이곳 남서부 구역에는 조직끼리의 경합 같은 건 없었다. 때문에 댈리는 가끔 그럴싸한 싸움판에 끼어드는 게 고작이었고, 딱히 증오할 상대를 찾을 수 없었다. 조직은 없고, 오직 소셜뿐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무슨 수를 쓰든 소셜에게는 이길 수가 없었다. 기회와 행운은 모두 그들의 것이었고, 그들을 두들겨 패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 때문에 댈러스가 그리도 냉소적이 된 것이리라.”
작중에 지명이 나오지는 않지만, 이 소설의 무대는 작가의 고향인 오클라호마의 털사다. 위의 인용을 잘 읽어보면, 뉴욕과 같은 대도시와 오클라호마와 같은 중소도시는 존재방식이 다르다. 뉴욕 같은 대도시는 이익이나 인종을 중심에 둔 ‘조직’이 지배한다면, 털사 같은 지방 도시엔 그런 효율적인 원칙이 없기 때문에 비미국적인 갈등인 ‘계급’이 부각된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 주제를 더 천착하지 않았고, 나 또한 이 주제를 더 깊이 다룰 지식이 없지만, 또 위 인용의 마지막 부분이 계급 사회의 철옹성을 환기시키고 있지만, 뭐니뭐니해도 저 인용은, 그리저와 소셜의 반목 현상이란 한낱 자본주의화가 덜 진척된 지방 소도시의 고루성(신분)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실제로 작가가 이 작품에서 되풀이 강조하는 것은, 그리저나 소셜이나, 청춘을 통과하면서 겪는 동일한 고민이다. 자니 케이드와 밥 쉘든은 사는 곳과 태생이 다를 뿐, 두 사람의 죽음은 부모들의 무관심과 연결되어 있다. 포니보이가 죽음을 면할 수 있었던 까닭은, 부모를 여덟 달 전에 여의었지만 아직도 부모로부터 사랑받았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으며, 걱정 많은 그의 두 형이 그의 부모 노릇을 맡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저에 속해 있으면서도 그리저와 거리를 두고 싶어 했던 포니보이는 친구였던 자니와 댈리 그리고 증오하던 소셜이었던 밥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그리저와 소셜은 단지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다를 뿐 “어쩌면 우리가 사는 두 개의 세계는 그리 다르지 않은지도 모른다. 우리는 같은 저녁놀을 보았으니까”라는 자기 성장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너무 늦기 전에 누군가가 그들에게 말해줘야 했다”는 결심이 글쓰기로 그를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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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