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0일
나는 한글 전용주의자는 아니라서 한자말은 쓰지만, 서양에서 온 외래어는 좀체 사용하지 않는다. 그 가운데 하나가 쿨cool이다. 우연히도 작년과 올해 사이에 읽은 책에서 이 말을 숱하게 발견했으니, 이제 쿨은 한국인 누구나가 애용하는 형용사가 되었다. 단원 김홍도의 그림을 해설한 최석조의 『단원의 그림책』(아트북스, 2008)에서 저 단어를 맞닥뜨렸을 때의 이물감이란!
이 단어의 용례가 흥미로워서 쿨이 들어간 문장들을 채록하기 시작했다가, 일순 없애버린 게 올해 초다. 그런데 최근에 이 단어의 폭넓은 쓰임새를 다시 한 번 경험하고, 그 일을 후회했다. 천정배 민주당 의원이 자신의 홈페이지에 검찰총장 후보로 인사청문회를 받고 있는 김준규 후보자를 “‘쿨한' 검사”라고 추어올린 것이다.
딕 파운틴과 데이비드 로빈스가 함께 쓴 『세대를 가로지르는 반역의 정신 Cool』(사람과 책, 2003)은 어원에서부터 이데올로기까지 쿨의 모든 것을 밝힌다. 쿨은 본디 아프리카에서 잡혀 온 노예들이 백인들의 착취·차별·불이익에 대처하기 위해 고안된 심리적 방어기제였다. 흑인 노예들이 우울과 분노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주인의 명령·학대·모욕을 견뎌내기 위해 발전시킨 역설적인 초연함과 침착한 태도가 쿨인 것이다.
양차 세계대전의 비참한 경험은 전통·질서·사회·권위 등에 냉소적이고 초연한 백인 청년층을 양산했는데, 이들이 발전시킨 문화 양식과 개인주의적인 세계관이 바로 쿨이다. 주류적인 가치와 기성 질서에 대한 반역 정신으로 요약되기도 하는 쿨의 정신은 1960년대의 반문화 운동으로 절정을 이뤘다. 그런데 공동체와 이데올로기를 냉소로 대했던 이 개인주의자들은 그로부터 20년 뒤인 1980년대의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를 방관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반겼다.
대처의 보수당과 레이건의 공화당은 똑같이 자유방임주의 경제논리를 경제정책으로 삼으면서, 2차 세계대전 이래 추진된 케인스주의 경제 구조를 붕괴시켰다. 하지만 “쿨은 경제적·사회적 자유방임주의 모두를 포용”하고 “정부의 간섭에 대한 극우파의 불신을 공유”했다. “쿨은 탈정치적인 것을 선호하지만, 굳이 정치적인 편을 든다면 아마도 자유주의적인 선택들을 더 지지할 것이다.” 반역의 정신이라는 허울 좋은 쿨은, 이렇게 자기모순에 빠졌다.
김준규 검찰총장 후보자의 인사청문회를 보면, 시인과 사죄만으로 부족한 결격사유도 있다. 바로 친누나의 남편이 연루된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후배 검사에게 전화질을 한 것이 후보자의 해명처럼 “인지상정”일 수도 있지만, 검사 윤리강령 위반이라는 비판도 있다. 이런 검사가 ‘쿨한 검사’라면, 그만큼 쿨의 용례도 넓어진 거다. 문제는 쿨이란 외래어가 우리나라에 건너와서 온갖 욕을 보고 있는 게 아니다. 이명박 정권 들어 우리 사회가 저처럼 쿨하게 가고 있다는 것, 그게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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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