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1일
영국사의 특징은 프랑스나 러시아에 비견될 계급/유혈 혁명이 없었다는 것이다. 마그나카르타(1215년)부터 영국의 왕권/교권은 귀족/영주(지주)들에 의해 점진적으로 축소되어 왔고, 명예혁명에 이르러 권력은 ‘의회’로 완전히 넘어갔다. 하지만 왕권을 대신한 ‘의회주권’은 오늘날의 의회와는 다른 귀족들을 위한 ‘그들만의 리그’였다.
명예혁명을 통해 ‘의회주권’을 거머쥔 자들은 귀족/영주(지주)였고, 그런 점에서 명예혁명 직후부터 맹렬한 활동을 했으며, 오늘날 영국 정치의 양당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보수당과 노동당의 원조격인 토리당과 휘그당은 아무런 계급적 차이가 없었다. 흔히 토리당을 보수주의자들의 결사체로, 또 휘그당을 진보주의자들의 결사체로 이해하고 있지만, 그들을 나눈 보수/진보의 기준은 오늘날의 그것들이 아닌 종교 문제였다. 바로 이 때문에 『진보와 보수의 영국사』를 쓴 W. A. 스펙은 “1689년에 뿌리를 내린 것은 일반 국민의 주권이 아니라 의회주권”이었다고 말한다(77쪽). 귀족들이 다 해먹었다는 말이다.
사실 1689년의 명예혁명 이후, 장구한 세월이 걸려 노동당이 창당되고(1906년), 총선 판도에서 ‘계급’이 모든 쟁점을 대신하게 된 1910년이 되기 이전에, 그래서 진보와 보수를 계급이라는 관점에서 볼 수 있게 된 20세기에 당도하기 이전의 영국에서 보수와 진보를 나누는 일은 미적분만큼 어려운 일이다. 앞서 강조한 종교 문제도 컸지만, 선거 때마다 아일랜드 문제, 제국주의(식민지 정책), 보호주의 대 관세, 전쟁(참전), 교육 등등의 난마 같은 문제는 상황에 따라 토리당과 휘그당원을 이합집산하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근대사를 보수와 진보의 대결이란 관점에서 파악하게 해주는 확실한 쟁점이 있으니, 바로 ‘선거 개혁’을 둘러싼 투쟁이다.
앞서 인용된 “1989년에 뿌리를 내린 것은 일반 국민의 주권이 아니라 의회주권”이었다는 W. A. 스펙의 명예혁명에 대한 평가는, 원래 그의 표현이 아니라, 프랑스 혁명에 놀라 보수주의 이론을 다듬고 그것을 설파하기 시작했던 에드먼드 버크의 논적 토머스 페인의 말이다. 페인은 프랑스 혁명을 부정하고 영국의 의회 제도를 찬양하는 버크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영국의 의회제도는 국민의 대표권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까닭은 영국의 선거제도가 합리적이지 못하고 우연적이고 기형적으로 정착됐기 때문이다.
선거개혁이 이루어지기 이전 18세기의 영국 선거는 불합리하고 기형적이었다. 투표할 수 있는 사람은 남자 가장으로 1년에 일정한 수입을 올리거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어야 했다. 뿐 아니라, 의회주권을 독식한 귀족/영주(지주)들은 산업화된 도시 노동자들의 영향력을 막기 위해 농촌과 도시의 인구 비례를 무시한 채 의석을 배분하거나, 토리/휘그의 아성에 도전할 수 있는 다른 정당의 진입을 막기 위해 소선거구제를 고수하는 등의 ‘의회 진입장벽’을 만들었다.
여기에 덧붙여, 가톨릭 신자는 입후보 할 수 없는 등 후보자에 대한 숱한 제약이 있었다. 때문에 영국의 보수와 진보는 노동당이 생겨나고 복지라는 또 다른 쟁점이 생겨나는 20세기 초가 도래하기까지는 보통 선거권, 비밀 선거, 선거구 조정 등의 선거 개혁을 둘러싸고 대립하거나, 나누어진다. 다시 말해 선거 개혁이 곧 진보를 의미했다는 것인데, 그것은 박정희의 10월 유신 이후와 전두환 시절, ‘대통령 직선제’ 탈취가 곧 민주주의를 의미했던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면 더 잘 납득이 된다.
무척 흥미롭게도 김상수의 『보수와 진보 ― 이념을 넘어선 영국의 현실 정치』를 보면 토리와 휘그는 선거 개혁을 능동적으로 주도하기보다, 선거권 확대가 자신들에게 돌아올 득실에 따라 상대방보다 높은 패(급진적)로 선수를 치는 결정을 되풀이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래가 바로 그런 사례다. 표를 얻고 정권을 얻기 위해서는 누구와도 협력했음은 물론이고, 상대편의 정강마저 훔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디즈레일리(토리)가 글래드스턴(휘그)의 비판에 밀려서 어쩔 수 없이 양보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계산에 의해 법안의 내용을 스스로 더욱 급진적인 성격의 것으로 수정해나갔다는 점이다. (…) 결국 디즈레일리가 상정한 법안이 의회를 통과할 때쯤 되면 그 내용이 원안보다는 물론이고 보수당의 반대로 부결되었던 1866년의 선거법 개혁 법안보다도 더 급진적인 성격의 것이 되어버리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했다(30쪽).”
영국적 미덕을 앞세운 영국의 역사가와 보수주의 인사들은, 보수당의 온정주의와 유연함이 선거 개혁을 주도한 과격주의자(이들이 휘그당원의 일부와 합쳐져서 자유당을 만들며, 잔존한 휘그당은 토리당에 통합된다)들의 의견을 수용함으로써, 혁명과 같은 불상사를 막고, 자연스럽게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온 것처럼 말한다. 이 책도 그런 입장인데, 과연 영국의 보수와 진보는 그들의 합의만으로 선거 개혁을 서둘렀던 것일까? 3차에 이른 선거개혁이 어떤 시대적 상황과 현실적인 압력에 의해 논의되었는지를 보면,
제1차 개정(1832년) : 프랑스 혁명이 촉진(27쪽)
제2차 개정(1866년) : 이탈리아 통일 운동과 미국 남북 전쟁과 깊은 관련(27쪽), 선거법 개혁 시위(29쪽)
제3차 개정(1884년) : 불황(27쪽), 급진주의자들의 성장(37쪽), 상원 폐지 운동(39쪽)
설명이 부족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간명한 위의 사실로 보건대, 영국의 보수와 진보를 나누는 선거 개혁이 보수와 진보의 정략적 야합이나, 보수당의 온정주의와 유연성에 의해 완수되었다는 말은 영국사를 수식하는 여러 신화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지속적인 영국의 선거개혁은 보수 인사들의 온정주의나 유연성이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당면해야 했던 선거 개혁 운동과 시대적 압력을 마지못해 수용한 것이다. 토리와 휘그는 1846년에 있었던 곡물법 폐지 조치를 기점으로 지주층의 이해를 대변하는 당(토리)과 상공업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당(휘그)으로 성격이 변해갔지만, 여전히 지주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여기에 선거개혁을 내건 과격주의자(자유당)가 끼어들어 영국사에 진보라는 불쏘시개를 던져 넣었다. 그렇다면 외견상으로 선거 개혁이 마무리된 1886년 이후에는 어떤 쟁점이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기준이 되었을까?
선거개혁 이후, 영국의 보수와 진보는 ‘복지(인민예산)’와 같은 사회 개혁 정책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로 나누어진다. 이 쟁점 또한 선거개혁에서처럼 일반 대중과 과격주의자(이번에는 자유당을 대신한 노동당)들이 먼저 의제화하고 구체적으로 실현한 다음, 위기를 느낀 보수당이 “사회주의적”(94쪽)인 “사회 개혁”(92쪽)을 뒷북치듯 받아들이는 모양새로 끝났다.
보수주의 헌장에 ‘변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없다. 그들은 과격하고 빠른 변화를 싫어할 뿐, 온건하고 느린 변화, 점차적인 변화를 받아들인다. 우리들의 오해와 달리 원래 보수주의는 개혁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 뜻에서 영국의 보수주의 또한 현실과 대중이 요구하는 정치적 변화에 맞서지 않았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다음과 같은 사실도 있다. 즉 영국의 보수주의자(보수당)들에게 유연성과 흡수력이란 능력을 선사한 것은, 그 시대의 과격주의자들과 일반 대중의 운동과 강제력이었다. 바로 그런 관점에서 『보수와 진보 ― 이념을 넘어선 영국의 현실 정치』가 가진 순진함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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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