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0일
미셸 깽의 『처절한 정원』(문학세계사, 2002)을 읽다. - 워낙 짧은 이 소설에 대해 길게 얘기하는 것은 미리니름(Spoiler)이다. 그러나 다음의 사항에 대해서는 일러두기를 해도 누설꾼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ⅰ) 아버지와 가스똥 삼촌이 그들의 비밀을 아들에게 얘기하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는, <다리>라는 영화를 보고 나서이다. 그 영화는 두 사람이 변압기를 폭파시킨 용의자로 독일군에게 체포되었을 때, 그들을 안심시키고 또 인간의 존엄성을 강하게 설파했던 독일군 감시병 베르나르 비키가 감독했던 영화다. 영화 <다리>에 대한 작중 설명은 이렇다: “영화는 아이들과 길을 잃은 독일 군대에 관한 이야기였다. 동정심 많은 하사관은 아이들에게 전술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다리를 지키는 일을 시킨다. 아이들은 너무도 어리석고 순수하여 자신들도 어른들처럼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결국엔 모두 죽고 만다.” 아주 소략한 설명이지만, 독일 소설 가운데 M. 그레고르의 동명의 소설이 저 내용과 같다. 그리고 나는 보지 못했지만, 이 소설을 원작으로 동명의 영화도 만들어졌다.
ⅱ) 이 소설의 본문 서두는, 페탱의 비시 정부가 유대인을 박해하기 위해 연속해서 쏟아냈던 법령 가운데 “그중에서도 유대인들에게 희극배우 직업을 금지한 1942년 6월 6일 법령이 가장 충격적이었다”는 말로 시작한다. 이 본문 서두는 세월을 훌쩍 뛰어넘은 1997년 “어릿광대 삐에로가 모리스 파퐁의 재판이 열리고 있는 보르도 법정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경찰이 그를 막았다고 많은 사람들이 증언했다”는 이 소설의 에필로그 첫 문장과 중첩해서 읽어야 하며, 위 두 문장 사이에 앞서 인용했던 본문의 서두에 이어지는 “물론 나는 유대인도 아니고 희극배우도 아니다”는 말을 끼워 읽어야 한다. 그래야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가 어릿광대 삐에로 노릇을 하며 평생을 살았던 까닭이 드러나며, 삐에로 노릇을 하는 아버지를 저주했던 아들이 비시 시절의 반인륜적 범죄와 연관되었던 모리스 파퐁의 재판정에 삐에로 복장을 하고 입장하려고 했던 이유를 선명하게 알게 된다. 두 부자의 삐에로 노릇은, 나치와 비시 정권이 탄압했던 유대인 박해에 대한 속죄다: “아버지는 훈장을 받아야 할 만큼 훌륭한 분이다. 아버지는 평생 동안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품위 있는 방법으로 인류가 진 빚을 갚으며 살았기 때문이다.”
미리니름을 하지 않겠다면서 ⅱ)를 자세히 말했으니, 약속을 어긴 것 같지만, 줄거리에 대해서는 아무런 미리니름을 하지 않았다. 그건 독자가 읽어 보면 안다. ⅰ), ⅱ)를 굳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미셸 깽이 교묘하게 엮어 놓은 사실과 허구의 직조가 재미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찾기도 힘든 M. 그레고르의 『다리』(정음사, 1976, 정음문고116)를 다시 읽고 싶게 만든 것도, 또 모리스 파퐁 재판에 피에로 복장을 한 방청객이 진짜로 입장하려고 했는지를 확인하고픈 욕구도, 모두 사실과 허구를 교묘히 박음질한 작가의 재능이 독자에게 불어넣어 준 것들이다.
7월 2일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두 부류의 사람들도 무조건하고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게 아니라, 동물에 따라 선호를 달리할 뿐이라는 사실은, ‘人間世’에 횡행하는 이분법이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가를 여실히 한다. 파충류를 혐오하는 동물 애호가도 있을 수 있고, 동물이라면 난색을 짓는 사람 중에도 특정 동물에는 관대할 수 있다. 나 또한 개라면 미칠 듯이 좋아하지만 진돗개는 싫어하며, 개를 사랑하면서도 개를 먹는 우리나라 관습은 지지한다.
일간지에 쓰는 독후감은 결단코 두 가지 사항을 피해야 한다. 먼저 케케묵은 구간(舊刊)은 자칫 필자나 독자를 게으름으로 인도하기에 제외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필자의 사적 취향을 드러내기 위해 귀한 공적 지면을 허비해서도 안 된다. 얼마 전에 헌 책방에서 발견하고 곧바로 집어든 현금호·여동완의『개와 사람 사이』(가각본, 2005)는 그런 원칙을 거스르는 듯하다. 하므로 온 힘으로 분발할밖에.
비교생태학과 행동생태학의 창시자 콘라드 로렌츠는 『개가 인간으로 보인다』(자작나무, 1994)를 통해 “인간혐오와 동물 사랑이 결합”된 일부 애견가들을 비난하고, 나처럼 아이는 낳지 않으면서 개를 끼고 살겠다는 사람을 향해 “사회적 수간(獸姦)이며, 육체적 수간과 마찬가지로 타기”할 만한 일이라고 썼다. 하지만 변명컨대, 애완동물을 기르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대인관계가 훨씬 낫다는 연구도 있다.
두 명의 사진가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부지런히 사진을 찍고 글을 덧보탠 이 책은, 아름답고, 깊은 공감을 자아낸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던 알쏭달쏭한 시구도 있지만, 이 책을 쓴 공저자들은 ‘개와 사람 사이에 소통이 있다’고 말한다. 동물들은 이국어를 사용하는 외국인처럼 인간의 언어를 모를 뿐, 인간이 언어 능력을 발달시키면서 마모시킨 느낌과 직관으로 영적 소통이 가능하다. 그러면서 저자들은 대부분의 애견가들마저 그저 개를 기르기만 하지 소통하려는 마음가짐은 없다고 꼬집는다.
두 사람의 반려동물론은 인간론에 귀착된다. “우리가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하는 모든 행위들은 궁극적으로 소통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인간을 ‘소통하고 나누는 자(communicator)'라고 정의한다. 그런 뜻에서 동물 사랑은 인간이 동물에게 베푸는 것보다, 동물이 인간에게 선사하는 것이 더 크다. 동물 사랑을 통해 자연과 소통하는 방법을 배우고, 거기에 따라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삶도 더욱 풍성해지기 때문이다.
오바마 대통령과 그 가족이 애완견과 뛰노는 모습이 몇 차례 공개됐다.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미국인들은 백악관의 개를 퍼스트 도그(first dog)이라고 부른다. 최고 권력자의 인간적인 면모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채택된 퍼스트 도그은 그야말로 무해한 정치적 과시에 불과하지만, 우리나라 대통령이 번번이 재래시장의 상인들을 ‘퍼스트 도그’ 삼아 쇼를 하는 것은 소통도 뭣도 아닌, 인간 모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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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