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6일
김려령의 『완득이』(창비, 2008)를 읽다. - 마음을 울리는 책이다. 착한 인물들만 떼거리로 나오는 게 어쩐지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느냐고 흠 잡힐 수도 있지만, 바로 그 부분에 작가의 염원이 깃들어 있다.
완득이가 자신의 담임 선생님인 똥주를 어서 죽게 해달라고 교회에서 기도하는 첫 장면부터, ‘얘가 왜 교회를 나가지?’라는 의문이 들었는데, “싫어하는 사람을 하나님한테 고자질하러 교회를 찾았고 (…) 누구와 대화해본 적이 없어 혼자 떠들 수 있는 교회를 찾았다”는 대목에 가서야 작가의 재능이 만져졌다.
곱추를 아버지로 둔 지지리도 가난한 집안의 내성적인 고등학생이 킥복싱 도장을 찾고, 다 망해가는 도장의 관장이 학생의 아버지에게 “이 녀석을 받으면 안 됐습니다. 근데 체격 조건도 좋고, 근성도 남다르더라고요. 제 안에 핵을 품고 있는데, 그거 잘못 뿜으면 여럿 다치겠다 싶어서 받은 겁니다”라며 술을 대작對酌하는 풍경은 어디서 많이 본 익숙한 것들이다. 그러면 곱추 아버지와 아들을 버리고 사라진 어머니가, 한국인 결혼 브로커에게 걸려든 베트남 여자였다는 사실도 그처럼 만화적인 풍경일까?
나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베트남 어머니의 일화야말로, 다문화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오늘의 한국 현실을, 한국 문학 속에 그려 넣은 최초의, 가장 감동적인 풍경이라고 생각한다. 읽어 볼 일이다.
5월 10일
『듣고싶은 음악 듣고싶은 연주』(현암사, 2007)를 쉽게 생각하자면 이미 많은 종류가 나와 있는 명곡·명반소개서 정도겠지만, 이 책을 일독하고 나면 온갖 의문이 꼬리를 물며 솟아난다. 비평이란 무엇일까? 음반이나 음악을 감상하고 평가하는 것은 어떤 행위여야만 할까? 비평가란 어떤 각오로 예술 작품을 감상하고 평해야 할까? 이를테면 인용하는 아래의 글은 비평일까?
“기교적인 측면에서만 놀랍도록 발달한 음악의 사생아 하이페츠”, “가끔 들어보고는 역시 시원치 않은 바이올리니스트라고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는 것이 안네 조피 무터이다. 남편 프레빈과 탱고라든가 <포기와 베스>나 연주하면서 희희덕거리는 것이 제격”, “광대와 병아리떼, 콩쥐, 팥쥐, 들쥐, 두더지 가릴 것 없이 아무나 ‘거장’으로 둔갑해서 설치고 있는 무대에서 젠카르와 켐페 같은 소중한 지휘자가 묻혀버릴 수밖에 없다”, “‘번스타인은 사람보다는 원숭이에 더욱 가깝다’고 쓴 적이 있지만, 번스타인 신도들을 위해 내 생각을 바꾸려 해도 쉽지가 않다. 그는 지휘할 때마다 사람으로서는 차마 흉내 내기도 어려운 원숭이 춤을 적어도 한 번씩은 추어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놀랍고 기가 막힌 원숭이인가?” 등등.
프랑스의 문학평론가 조르주 뿔레는 그의 주저 『비평과 의식』(탐구당, 1990)에서 좋은 비평가는 텍스트(작품) 혹은 작가의 의식과 동화되는 비평을 한다고 주장한다. 사랑하면 곧 이해하게 된다는 뜻에서 그가 꼽는 “최초의 비평 행위는 찬사”다. 반면 나쁜 비평가는 텍스트 내부로 들어가기는 하되 텍스트나 작가의 의식과 합일하지 못하고 남의 둥지(텍스트)를 차지한 뻐꾸기처럼 자신만을 내세운다. “다른 사람의 소유물에 대한 탐욕”에서 출발한 이런 비평가는 결코 타자(텍스트)와 소통하지 못할뿐더러 결국은 자신조차도 알지 못하게 된다. 뿔레는 작가와 비평가가 하나 된다는 뜻에서 전자를 동화비평이라고 부르며, 침입자가 거주자를 몰아내는 후자의 비평은 아예 강간비평이라고 칭한다(한국판에서는 ‘간통비평’이라고 번역됐으나, 맥락상으로는 ‘강간비평’이 옳다).
강간비평과 함께 뿔레가 나쁜 비평의 하나로 정의하고 있는 것이 인상주의 비평이다. 인상비평은 텍스트에 도취된 듯이 과장되게 말하지만, 실제로는 텍스트나 작가의 의식 내부로 한 발자국도 들어서지 않는다. 인상비평은 텍스트 바깥에서, 비평가의 평소 생활습관이나 사고방식을 텍스트나 작가의 외적 인상으로부터 확인하고 마치 텍스트에 공감한 양 떠벌리는 태도다. 『듣고싶은 음악 듣고싶은 연주』에서 발췌한 아래의 인용을 보자.
“구레츠키와 같은 해에 태어나 훨씬 유명해진 펜데레츠키는 창녀로 전락해 휘황한 홍등가에서 그 이름을 팔았으나 구레츠키는 잠깐 모습을 드러냈다가 다시 사라졌다. 펜데레츠키는 그의 유곽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호텔로, 그리고 구레츠키는 음악을 찾아 산으로 갔다. 어딘지 모르게 구린내를 풍겼을 때만 유명해지고, 고귀한 넋들이 아니라 저속한 떨거지들이 손뼉을 쳐대고 기성을 지르면서 몰려들었을 때만 유명해질 수 있다는 것 - 그것이 바로 ‘유명’의 정체이다.”
저자가 구레츠키를 잔뜩 칭찬하고 펜데레츠키를 비난하는 까닭은 그들의 작품이나 작곡가의 음악관과는 일말도 연관이 없다. 위의 인용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두 작곡가의 본질이 아니라, 저자가 화려한 도심보다는 은둔과 산을 좋아한다는 것과 유명세에 대한 거부감뿐이다. 또한 저자가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를 경멸하고 피아니스트 리후떼르를 경애하게 된 사연 역시 별것 아니다. 다시 인용한다.
“나는 로스트로포비치를 한 번도 좋아해 본 적이 없었고 그래서 항상 미안함을 지니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경배하는 첼리스트를 나 혼자 싫어한다는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던 탓이다. 그러나 그가 무대에 등장했을 때 그 미안함은 씻은 듯이 가셔져 홀가분해졌다. 장애물 단거리 경주라도 하듯이 첼로를 든 채 뛰다시피 자리로 달려간 그는 미처 엉덩이가 자리에 고정되기도 전에 활을 그었다. 그것은 서커스 묘기의 극치였다. 그 떨떠름한 기억의 뒷맛을 말끔히 씻어준 것이 리후떼르였는데, 같은 무대를 걸어 나온 그의 모습은 모든 면에서 로스트로포비치와는 달랐다. 노쇠함이 역력한 모습으로 머리와 어깨가 한쪽으로 약간 기운 채 비틀거리듯 걸어 나온 그는, 무대의 조명이 모두 꺼진 채 촛불처럼 가냘픈 불빛 하나가 밝혀진 피아노 앞에 조용히 앉았다. 그리고 피아노와의 고독한 대화가 시작되었다. 아, 얼마나 대조적인 두 연주자의 모습인가?”
글쎄, 이건 무대 예절이나 연주가의 체질을 바라보는 관객의 기호일 뿐이지, 결코 음악가의 음악세계나 그가 연주한 음악에 대한 비평일 수 없다. 위의 글과 또 다른 어떤 글에서 “피아노를 향해 비실비실 무대 위를 걸어 나오던 두 사람의 피아니스트를 나는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한 사람은 포고렐리치 그리고 또 한 사람은 리후떼르”라고 거듭 쓴 것처럼, 저자가 아무리 특정 타입의 음악가를 좋아한다 하더라도, 그건 이순열이 예술가를 바라보는 개인적인 사고방식일 뿐, 그것이 비평이라는 이름으로 공표되기는 어렵다.
저자가 최상급으로 사용하는 형용사는 종종 냄새나 부패와 상관된다. 그 가운데서도 “무대 위에서 설사처럼 쏟아내는 소화불량성 배설물의 지랄잔치orgy가 언제까지 예술의 이름으로 자행되어갈 것인가”에서 그것은 악평을 할 때 사용됐지만, 흥미롭게도 고평을 할 때도 “얀손스가 지휘한 음악은 언제나 잘 삭아 있다. 그의 마음속에 굉장한 음악적 효소를 지니고 있음이 분명하다 (…) 그의 오케스트라에서는 깊숙한 땅속에서 오랫동안 묵어 곰삭은 동치미에서 우러난 것과도 같은 오묘한 맛이 풍긴다”는 식이다.
정신분석학을 정치사회학에 적용하려고 했던 에리히 프롬은 『파괴란 무엇인가』(홍성사, 1978)의 후반부를 시체에 성욕을 품거나 시체를 훼손하고 싶어 하는 네크로필리아necrophilia 증상에 바치고 있는데, 냄새에 민감한 것은 네크로파일의 한 특징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연주자를 살아있는 시체로 만들어 희롱한다는 뜻에서, 또 대부분의 찬사를 요절하거나 불치병에 시달렸던 음악가에게 바친다는 의미에서 특히 그러하지만, 잘 쓰이지 않는 한자와 외래어가 섞인 고풍스러운 표현을 즐겨 쓴다는 점에서도 오늘 읽은 책의 저자는 시체애호증적 비평가다.
사족. 내가 클래식 음반을 수집하기 위해 참조한 ‘명반 안내서’는 무려 10종이 넘는다. 오늘 다시 뒤적인 『듣고싶은 음악 듣고싶은 연주』도 그 가운데 하나이긴 하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자주 참조했던 것은 차례대로 안동림·허제·김정환의 책이었다. 어떤 기독교도가 성경을 그토록 자주 펼쳐 읽었을까? 근 10여 년 가까이, 나는 세 사람의 책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펼쳐 읽었다.
이 책, 『듣고싶은 음악 듣고싶은 연주』에 관한 독후감은 오래전에 썼던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을 뒤적이면 뒤적일수록, 위에 쓴 독후감과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냄새가 나는 비평이 그립지 않은가?’하고 말이다. 비평대상을 시체로 만들어 놓고, 그 냄새를 흠향(?)하는 이순열식의 시체애호증적 비평이 아니라, 비평가의 체취가 풍기는 비평, 그 사람의 개성과 열정이 피우는 냄새 속에 독자가 푹 잠겨 드는 그런 비평을 보고 싶다.
정해진 매수 때문에 인용하지 못했지만, 이순열이 애용해 마지않는 케케묵은 사자성어와 어원을 알 수 없는 무수한 외래어도 그의 사고를 분석하는 좋은 수단이다. 그가 남용하는 사자성어와 외래어는 일상생활은 물론이고 비평문에서마저 보기 힘든 단어들이다. 그것 역시 그가 가진 의고擬古 취미의 한 형태겠지만, 거의 모든 음악 애호가들이 ‘리히터’라고 부르는 러시아 태생의 피아니스트를 독야청청(?) ‘리후떼르’라고 쓰는 것은 무슨 취향일까? 그게 일본 문화에 대한 향수라면, 그것 역시 청산되지 못한 시체애호증적 문화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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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