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3일
윌리엄 스타이런의 『소피의 선택』을 민음사(2008)본으로 다시 읽었다. 내가 처음 읽었던 판본은 성훈출판사(1992)의 것이었는데, 하권 145쪽엔 음악애호가들 사이에 회자되는 유명한 오역의 사례가 나온다. “그날 아침 그녀의 라디오에서 흐느껴 울 듯 흘러나온 <성마태의 열정> 중 미친 듯이 슬픈 한 소절이 내 귀에 쟁쟁했다”는 대목이다. 새로 나온 민음사본은 “이상하게도 오늘 아침 소피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마태 수난곡>의 애절한 절규가 귓가를 울렸고”라고, 바흐의 ‘Matthäus-Passion’을 제대로 명기했다.
이 소설의 시간적 무대가 되는 1947년은 뉘른베르크에서 속개된 나치 전범 재판으로 유럽이 떠들썩하던 때였고, 미국의 남부 버지니아주에서는 바비 위드라는 열여섯 살 난 흑인 소년이 백인 소녀에게 치근댔다는 이유로 산채로 음경과 불알이 잘렸다. 린치에 가담했던 백인들은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 활활 타오르는 용접용 버너로 소년의 가슴에 'L'자 낙인을 그렸다. 그 해는 대서양 양쪽에서 서구 문명 그 자체가 심문받고, 인간 속에 숨어 있던 악마성이 소환되던 해였다.
작가가 되기 위해 뉴욕에서 가장 집값이 싼 브루클린에 거처를 정한 스물두 살의 버지니아 청년 스팅고는 이사를 마친 이튿날 “천장에 달린 전등이 마치 줄에 매달린 꼭두각시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며, “회반죽을 칠한 천정에서 장밋빛 먼지가 날아 내”리고, “금방이라도 그 방의 침대가 내 얼굴 위로 떨어질 것”같은 위층 남녀의 섹스에 기겁을 한다. 끝도 없이 계속될 것 같던 엎치락뒤치락이 갑자기 끝나고 “마침내는 어울리지 않게 베토벤의 <4번 교향곡> 느린 악장의 매혹적이고 달콤한 주제가 전축을 타고 흘러나왔다. 미친 듯한 성교와 음악에 대한 끈질긴 관심사는 『소피의 선택』을 지배하는 주요 동기로, 그것들은 상처받은 주인공들이 세상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방법이면서, 그들을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다.
주인공이 살던 윗방에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30대 폴란드 여성 소피가 살고 있었고, 같은 임대 주택에는 그녀의 애인인 유대계 미국인 네이선이 살고 있다. 천주교인과 유대인으로 구성된 이 어울리지 않는 한 쌍과 친구가 된 스팅고는 두 사람을 ‘인생의 선배’ 삼아 뉴욕에서의 생존은 물론, 작가가 되기 위한 훈련을 쌓는다. 네이선과 소피는 스팅고의 성에 대한 갈망을 해소시켜주고자 배려하며, 남부 촌놈에게 음악을 배워 준다.
유대인이 워낙 많이 희생되었기 때문에 나치의 인종 말살이 유대인만을 목적으로 했던 것처럼 오해되고 있지만, 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게 이 소설의 특별한 해석이다. 나치는 애초부터 모든 인종의 우열을 등급화해 놓았고, 그들이 간주한 열등 민족을 유럽 내에서 몰살시키려고 했다. 그 계획에 따라 유대인 600만, 폴란드인 200만, 세르비아인 100만이 희생되었고 많은 집시들과 러시아인도 거기 포함됐다.
유럽 내에서 나치 독일 다음으로 유대인을 핍박했던 나라가 폴란드였지만, 아주 역설적이게도 나치가 유대인 다음으로 싫어한 인종이 폴란드인이었다. 그래서 폴란드인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유대인 말살 정책에 앞장서서 협력했다는 게 윌리엄 스타이런의 논리다. 다시 말해 폴란드인들은 나치 독일이 “폴란드 민족을 대단히 혐오하고 있어서 유대인이라는 더 큰 혐오의 대상이 처리되고 나면 그다음 목표는 폴란드인”이 되리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폴란드의 안전을 위해 나치의 유대인 말살 정책에 적극 협조했다는 것이다.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집단 수용소의 대부분이 폴란드에 세워진 데는 그런 까닭도 있었다.
이런 주장은 “폴란드와 미국 남부”사이의 불길한 유사성으로까지 확장된다. 미국 내의 다른 지역에서와 달리, 미국 남부 지역의 백인들이 유대인에게 유독 유화적이고 비차별적인 우정을 보이는 이유는, 흑인에 대한 적대감으로 뭉친 남부 백인들에게 유대인까지 미워할 여력이 없기 때문이란 것이다. 이런 사실은 크고 작은 집단 속에서 벌어지는 인종적, 지역적 차별의 원인이 모두 사회적 위계에 따른 ‘희생양 찾기’라는 비밀을 드러내 준다.
작품의 제목처럼 소피는 여러 번의 중요한 선택을 한다. 폴란드의 지하 운동가들이 그녀의 독일어 능력을 필요로 했을 때, 두 아이의 안전을 구실로 거부한 것이 아마 그녀가 행한 최초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두 번째 선택은 아우슈비츠에 당도한 첫날, 두 아이 가운데 한 아이만 가스실 직행을 피할 수 있으니 한 명만 골라보라는 친위대 소속 의사의 지시에 어린 아들 얀을 선택한 것이고, 세 번째는 얀을 구하기 위해 수용소 소장인 헤스에게 몸을 제공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아우슈비츠에서 구출된 그녀는 미국으로 건너와 네이선을 만난다. 그들이 사랑을 시작했던 1947년은 나치 전범 재판과 각종 미디어를 통해 집단 수용소의 존재가 대대적으로 폭로되던 시점이었고, 네이선은 유대인을 박해한 폴란드인이자 아우슈비츠에서 생존한 소피에게 의구심을 갖게 된다. 작가가 네이선을 몇 차례나 정신병원을 들락날락거린 편집성 정신 분열증 환자로 설정한 것은, 나치에게 희생된 600만 유대인과 그들의 고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며, 그것은 소피와 스팅고가 존스 비치로 소풍을 가는 버스 속에서 만난 한 떼의 이스라엘 농아학교 아이들의 존재로 거듭 환기된다. 스팅고의 고향에서 함께 살기로 약속했던 소피가 서둘러 네이선에게 되돌아간 것은 그녀의 마지막 선택으로, 두 사람의 동반 자살 가운데 소피의 죽음은 아우슈비츠 체험 이후에 더 이상 신을 믿을 수 없게 된 자신의 절망과, 폴란드에서 죽어간 유대인의 고난에 바친 폴란드인의 대속처럼 여겨진다.
이 작품은 음악을 주제로 하고 있지 않지만, 모든 문장과 페이지에 음악과 음표가 가득하다. 어려서부터 소피의 꿈은 피아니스트였고, 바흐의 무덤에 꽃을 바치는 거였다. 따라서 독자들은 수시로 출몰하는 클래식 음악가들의 이름과 작품에 대한 열띤 감상과 맞닥뜨리게 되며, 곳곳에서 “음악은 나한텐 피 같은 걸요. 삶을 유지시켜주는 피 말이에요” 같은 음악 예찬을 듣게 된다. 그 가운데 한 대목이다: “소피와 네이선을 만난 후 지난 며칠 동안 우리의 유대감이 더 커진 것은 셋이 모두 음악을 아주 좋아하기 때문이란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네이선은 재즈에도 심취해 있었지만, 여기서 내가 말하는 음악이란 위대한 전통을 가진 클래식을 가리키는 것이다… 소피와 네이선과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음악은 단순한 음식과 음료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아편과도 같은 성스러운 숨결과도 같은 그 무엇이었다. 당시의 내게 음악은 존재의 이유와도 같아서, 신비하게 짜여진 비단 같은 바로크 음악의 화려하고 때로는 애절한 멜로디를 오래도록 듣지 못했다면 서슴지 않고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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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