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6일
토머스 에디슨이 축음기를 발명한 것은 1877년이다. 대다수의 음악광들이나 오디오 마니아들에게 축음기는 단연코 ‘음악을 재생’하는 기구겠지만, 에디슨은 자신이 만든 축음기가 ‘음악을 재생’하는 목적에 한정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요시미 슌야가 쓴 『소리의 자본주의』(이매진, 2005)에 따르면, 에디슨은 자신의 발명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이 장치로 가능한 10가지 이용법을 열거했다. ①편지 쓰기와 모든 종류의 속기를 대체하는 수단 ②시각장애인을 위한 소리 책 ③말하기 교수敎授 장치 ④음악 재생 기구(이하 생략)
옛날 축음기가 전기로 작동되는 게 아니라 태엽으로 작동된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그게 얼마나 원시적인 장치인지 짐작할 수 있다. 에디슨이 발명한 것은 엄밀하게 말해 전기 장치가 아니라, 금속 원통에 두 쌍의 진동막과 레코드 바늘을 결합한 기계적인 음의 기록·재생 장치였다. 그는 기본적으로 사람의 목소리를 기록하고 재생하는 사무용 기기를 만들고자 했으며,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축음기는 레코드를 재생하기보다는 구리로 된 원통에 공기의 떨림(목소리)을 직접 아로새기는 녹음기에 불과했다. 다시 말해 이 단계로는 레코드의 대량 생산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에디슨은 가족의 추억이나 유언을 기록하고 다양한 언어를 보존하는 일에 자신의 발명품을 쓰고자 했다.
원통형 실린더에 ‘공기 떨림’을 이용해 목소리를 녹음하던 방식은, 1887년 원반 프레스식 복제법을 개발한 에밀 베를리너와 1920년대 중반에 실용화된 전기녹음으로 극복된다. 베를리너에 의해 원반 레코드로 동일한 음성을 기계적으로 수없이 복제하는 게 가능해 지면서, 레코드는 1백여 년 가까이 현대인의 음악 생활을 지배해 왔다. 에디슨의 의도와 달리, 축음기의 발달은 사무용 기기가 아닌 음악 재생 기구로 낙착됐던 것이다.
그렇다면 음악가들이 음악을 취입하게 되고 또 대중들이 레코드를 통해 음악을 듣게 되면서, 음악 문화와 음악 미학엔 어떤 변화가 생겨났을까? 『소리를 잡아라』(마티, 2006)를 쓴 미국의 음악학자 마크 카츠는 축음기와 레코드의 대량 보급이 대중들의 음악 생활은 물론이고 음악의 미적 기준마저 크게 바꾸어 놓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소리를 유형물 속에 보존하는 녹음 기술이 개발되면서 음악 전반은 ‘녹음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면서 그것을 ‘포노그래프 효과’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포노그래프 효과가 음악 문화나 생활에 끼친 영향을 먼저 살펴보자. 소리를 보존하는 레코드의 유형성과 간편한 이동성 그리고 손쉬운 반복성은 음악 선생은 물론이고 아이들에게 ‘좋은 음악’ 교양을 습득시켜주려는 대다수 부모와 교육자들에게 ‘복음’이나 같았다. 레코드와 축음기는 계급과 재력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유럽의 고전음악을 들려줄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게 연주회 입장권보다 훨씬 저렴한 레코드의 유형성과 이동성의 장점이라면, 레코드의 반복성에는 두 가지 미덕이 있었다. 그 시절의 문화적 엘리티즘에 따르면, 레코드의 반복성은 좋은 음악과 나쁜 음악을 쉽게 구분해주는 것이었다. 즉 대중음악은 금방 질리는 반면 유럽 고전음악을 뜻하는 ‘좋은 음악’은 많이 들을수록 더 흥미를 느끼게 해주므로 레코드의 반복성은 청소년의 귀로부터 쓰레기 같은 음악을 걸러줄 수 있다고 믿었다. 또 그것은 감상자가 어려운 고전을 제대로 감상하도록 도와준다.
이 책에 묘사된 1920~1930년대의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문화적으로 유럽에 훨씬 뒤처져 있다고 생각했고, 유럽의 고전음악은 ‘고급 음악’으로 표현됐다. 따라서 “사람들은 축음기로 고전음악을 가정에서 들을 수 있게 됨에 따라 세련미와 고상한 취미를 기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대목에서 저자는 “오늘날 음악, 특히 서구 예술음악을 좋아하는 취향이 남성적이지 않다고 비웃음을 사지 않는다면 바로 축음기라는 기계가 끼어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본래 고전음악은 오랫동안 여성의 영역으로 치부되어 남성이 음악을 들으면 ‘계집애’ 같거나 ‘연약하다’는 평가를 들었다. 그런데 축음기가 그런 생각을 한 방에 날려 보냈다. “축음기 역시 기계이므로 전통적으로 남성의 영역이라 여겨지던 전문성이나 기계 조작과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그래, 우리나라의 많은 ‘아저씨’들이 기계를 좋아하는 오디오 마니아가 아니었다면, 클래식 음반 시장도 얼마나 위축되었을 것인가! 음악이 아니라, 오디오를 만지작거리다가 음악에 귀의하는 중년들은 의외로 많다.
다음으로 포노그래프 효과가 음악 미학에 끼친 영향. 음악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익히 알고 있듯이, 거개의 대중음악이 3분分대인 까닭은 긴 음악을 회피했던 라디오 탓도 있지만, 레코드가 처음 나왔을 때 최장 녹음 기술이 그것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레코드가 처음 만들어졌던 1877년부터 71년간 한 장의 레코드가 음을 재생할 수 있었던 시간은 4분 30초밖에 되지 않았다. 그것이 30여 분대로 늘어난 것은 1948년 LP 음반이 도입되면서부터다(LP 이전의 4분짜리 음반을 SP라고 한다).
녹음 기술의 미비로 빚어진 이런 현상은 대중음악뿐 아니라, 고전음악과 재즈에도 동일하게 적용됐다. 고전 음악의 경우 20세기 초반의 레코드 카탈로그는 특정 분위기나 외적인 사상을 표현하는 짧은 ‘성격 소품’, 아리아, 행진곡이 지배적이다. 그런데 녹음 기술상의 시간 제약이 연주회장의 프로그램마저 지배하게 됐다. 1917년 카네기홀에서 있었던 한 바이올린 연주회는 짤막한 소품 위주였는데, 이런 연주회 풍조는 LP가 등장하고 난 50년대부터서야 긴 작품(소나타)으로 바뀌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실황 연주에 나선 연주자들이 레코드 음악에 익숙한 대중들의 습관에 부응했다는 점이다.
이 책의 가장 논쟁적인 대목은 바이올리니스트의 비브라토 문제다. 20세기 이전의 바이올리니스트는 비브라토를 ‘역병’처럼 여겼다. 그런데 1910년경부터 비브라토가 널리 사용되었다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바로 그게 포노그래프 효과인바, 첫째, 초창기의 녹음 기술이 미세한 소리를 잡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연주자들이 과장된 비브라토를 쓰게 됐다. 둘째, 레코드의 반복 감상은 연주자의 불완전한 조음을 쉽게 알아차리게 하는데, 비브라토는 그걸 무마해 준다. 셋째, 레코드 감상 이전의 음악 감상은 항상 연주자를 대면하면서 그의 몸짓과 표정으로부터 감정을 전달받았으나, 레코드는 그런 시각적 차원을 제거한다. 비브라토는 눈에 보이지 않는 연주자의 개성과 감정을 시각화하는 기법이다.
재즈는 포노그래프 효과를 단단히 본 음악 장르로 “고전음악에서와 반대로 재즈에서는 연주가 일차적인 텍스트이며 악보는 단순한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재즈에서는 레코드를 들으며 연구하는 것이 필수”다. 많은 재즈 뮤지션들은 “당사자들이 실제로 만난 적”은 없지만 레코드를 통한 “사제관계”를 맺었다.
사족이다. 이 책은 겉보기와 달리 ‘녹음이 음악 문화나 미학을 좌지우지했다’는 식式의, 기술 결정론을 배격한다. 음악은 녹음 기술에 지배되지 않았고, 그것을 이용하는 이용자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변용과 수용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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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