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5일
약관 스무 살에 ‘기타의 신’이 되어버린 에릭 클랩튼에 대해 궁금할 게 뭐 있나? 원래 신이란 믿든 믿지 않든 양단간의 문제지, 궁금하고 자시고 할 게 없다. 그러므로 그가 쓴 자서전 『에릭 클랩튼』(마음산책, 2008)을 읽는 사람들은 믿음이 부족한 자들이라고 해야겠다.
에릭 클랩튼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던 1945년, 영국의 남부 도시 리플리에서 태어났다. 에릭 클랩튼의 아버지로 알려진 에드워드 프라이어는 독일군과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리플리에 주둔 중인 캐나다 군인이었다. 에릭 클랩튼의 어머니 패트리샤 클랩튼이 댄스파티장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그와 불장난을 벌인 끝에 임신을 했을 때, 그녀의 나이 고작 열다섯 살. 그런데다가 뒤늦게 밝혀진 남자의 정체는 유부남이었다.
패트리샤의 부모는 딸을 보호하기 위해 사람들의 눈을 피해 에릭 클랩튼을 낳았고, 손자를 자신들의 아이로 입적시켰다. 사생아였던 에릭 클랩튼은 일곱 살이 되기까지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자신의 친부모로 여겼고, 삼촌과 이모들을 형제로 알고 지냈다. 그러는 사이에 생모인 패트리샤는 또 다른 캐나다 군인과 결혼을 했고, 에릭 클랩튼이 아홉 살이던 때, 한국전쟁에 참전 중인 남편이 보낸 선물을 가득 안고 고국이자 친정인 리플리를 방문했다.
그 무렵엔 에릭 클랩튼도 출생의 비밀을 알았다. 그래서 모든 가족들이 거실에 모였을 때, 캐나다에서 온 ‘누나’ 패트리샤에게 불쑥 “이제 엄마라고 불러도 되나요?”라고 물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 순간에 진실이 드러나고 화해가 준비되어야 했다. 그런데 생모는 그걸 회피했다. “내 생각에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이제껏 너를 잘 키워주셨으니 그분들을 엄마 아빠라고 부르는 게 좋을 것 같구나.” 비록 친절한 말투이긴 했으나,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지 못한다'는 사실에 에릭 클랩튼은 상실감과 분노를 느꼈다.
자서전에 따르면 이 일로 인해 그는 평생 “버림받은 느낌”을 간직하게 되는데, 책장을 넘김에 따라 독자들은 그것이 끼친 영향을 차츰 알게 된다. 하여튼 집안에서 일어난 이 일의 충격으로 에릭 클랩튼은 학업에 대한 열정을 잃는다. 대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온갖 음악에 심취하게 됐고, 버디 홀리·제리 리 루이스·리틀 리처드와 같은 미국의 초기 로큰롤을 접하면서 “저건 미래야. 내가 원하는 게 저런 거라고”라는 결심을 하게 만든다.
어린 에릭 클랩튼이 좋아하던 음악은 대부분 기타 음악이었다. 그래서 기타를 배우기 위해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얼마만큼 졸라댔을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 적어도 열세 살 무렵, 에릭 클랩튼은 최초의 기타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미술 전문학교에 입학한 열여섯 살 때부터 싸구려 술집을 다니며 연주를 했고, 훗날 브리티시 인베이젼(British Invasion)의 일원이 될 영국의 음악 ‘꿈나무’들과 교류하게 된다.
“그처럼 음악적으로 다양하고 풍성한 시기에 태어나서 얼마나 축복인지 모른다”고 1950년대의 음악 상황을 예찬하는 에릭 클랩튼은, 라디오를 통해 오페라·클래식·로큰롤·재즈·팝을 동시에 들었다. 하지만 곧 비비 킹·머디 워터스·존 리 후커·프레디 킹을 들으며 블루스에 깊숙이 빠져들게 된다. 20대 이전에 형성된 에릭 클랩튼의 블루스 취향은 일생동안 변하지 않아서, 그가 뮤지션이나 그룹의 음악성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에릭 클랩튼이 밥 딜런을 탐탁지 않게 보거나 레드 제플린을 혹평할 때, 그것은 그들에게 ‘블루스’가 모자라기 때문이다. 보라, 자신이 블루스 음악의 적자라는 것을 얼마나 당당히 내세우는지! “제프 벡과 지미 페이지도 훌륭했지만, 그들의 음악적 뿌리는 로커빌리였고 나의 뿌리는 블루스였다.”
에릭 클랩튼이 야드버즈에서 그의 전업 뮤지션 경력을 막 시작하려던 1963년, 앞서 유명세를 얻은 것은 비틀스였다. 그러나 그들은 다 같은 ‘음악동네’ 사람들이었고, 에릭 클랩튼은 비틀스 멤버 가운데서도 조지 해리슨과 절친했다. 그런데 이 무슨 엽기발광(?)이란 말인가. 에릭 클랩튼은 조지 해리슨의 부인인 패티 보이드를 첫눈에 사랑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라일라Layla>는 에릭 클랩튼이 패티 보이드에게 바친 공공연한 구애송이다. 그는 그 노래를 만든 1970년부터 패티가 조지와 이혼하고 자신의 품에 안겼던 1979년까지 무대에서 주구장창 <라일라>를 불렀다. 참 교묘한 가정파괴 공작이랄 수도 있겠으나, 울타리가 튼튼하면 도둑이 넘나들지 못하는 법. 가정파괴의 진정한 주범은 허구한 날 바람을 피워댄 조지 해리슨이었다.
이 책 213쪽에는 아주 인상적인 사진 한 장이 실려 있다. 에릭 클랩튼이 자신의 차지가 된 패티 보이드를 두 팔로 번쩍 든 채 가슴 앞에 안고 있는 사진이다. 이 사진 속에서 에릭 클랩튼의 목에 두 팔을 두른 채 매달려 있는 패티는, 마치 에릭 클랩튼의 취미 가운데 하나인 사냥의 포획물처럼 보인다. 시쳇말로, 록 스타에겐 ‘널리고 널린 게’ 여자. 하필이면 평생 우정을 나누게 될 친구의 부인을 탐낸 그의 심리는 대체 ‘뭥미’?
예순두 살의 자서전은 그것을 다각도로 분석한다. “내가 패티에게 연정을 품은 이유 중 하나는 그녀가 멋진 차, 화려한 경력, 아름다운 부인 등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진 것만 같은 유능한 남자의 여자라는 사실이었다.”(145~146쪽), “내 나이는 이제 50대 중반에 이르렀지만 아직도 나는 그녀[어머니]를 대신해줄 누군가를 찾고 있는 듯했다 (…) 나는 여전히 어머니와의 관계를 재연해줄 여자를 무의식적으로 찾고 있었던 모양이다.”(362~363쪽)
에릭 클랩튼은 패티에게 헌정하기 위해 많은 곡을 썼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단 10분 만에 완성했다는 <원더풀 투나잇Wonderful tonight>. 이 노래는 레너드 코헨의 <아임 유어 맨I'm Your Man>과 함께 사랑에 빠진 무대책남의 애모가 물씬한 발라드이지만, 실제로 에릭 클랩튼이 이 곡을 쓰게 된 까닭은 패티에 대해 “화가 나고 짜증이 치”밀었을 때, 그걸 진정하는 데 있었다. 그 후로 에릭 클랩튼은 공연 때마다 패티를 무대로 불러놓고 이 노래를 부르곤 했지만, 두 사람은 그 노래처럼 달콤하게 살지 못했다. 궁금하신 분들은, 바로 이 책 『에릭 클랩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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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