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9일
윤대녕의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중앙일보사, 1995)와 『눈의 여행자』(중앙M&B, 2003)를 읽다. - 앞의 작품은 책이 출간된 바로 그 해에 읽었다. 처음 대하는 뒤의 작품과 한 번 읽은 적이 있는 예전의 작품을 번갈아 읽으니, 별난 재미가 생긴다. 두 작품 다, ‘알 수 없는 자에 의한 느닷없는 호출과, 여행(방황)’이라는 모티브와, ‘자기대면’이라는 각성으로 맺어진다.
윤대녕의 모든 작품에는 ‘백그라운드 뮤직’이 있다. 그런 뜻에서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는 그야말로 온갖 장르의 ‘백그라운드 뮤직’이 가득한 소설이다. 예컨대 주인공 남형섭이 별거 중인 부인 신승미와 만나는 날을 보자. 먼저 그날 새벽 여섯 시,ⅰ) “나는 비틀즈의 <우주를 가로질러>란 노래를 듣고 있었다.” 같은 날, 이른 아침, ⅱ) “창문을 닫고, 스메타나의 <나의 생애에서>를 틀어놓고 커피를 끓인 다음 새벽에 배달된 조간신문을 훑어보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끊고 나서, 시간이 흐른 뒤, ⅲ) “냉장고를 뒤져 보았으나 남아있는 게 없어 나는 슈퍼마켓에 가서 며칠 버틸 수 있는 양의 식료품을 사가지고 와 밥을 짓고 찌개를 끓이고 식사를 한 다음 빌리 조엘의 노래를 들으며 세탁을 하고 집안 청소를 했다.” 열두 시가 좀 지나, ⅳ) “나는 광화문으로 나가 교보문고에서 니코스 카잔차스키의 『돌의 정원』과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비둘기』와, 오래 미뤄두고 있던 빌 에반스의 명반 <재즈의 초상>을 산 다음 세 시까지 스낵코너에 앉아 체리 주스를 마시며 카잔차스키를 읽다가 문득 어제 일이 생각나 공중전화 부스에서 에이전시의 홍이라는 사내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오후 네 시 넘어, 최선주의 음반가게에서 ⅴ) 영화 <엘비라 마디간>에 나오는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 2악장 안단테에 대해 잠시 얘기하고 난 뒤 ⅵ) “나는 부닌의 연주 음반 한 장”을 산다. 그날 저녁 일곱 시, 별거 중인 아내와 술을 마시며 신촌의 우드 스 탁이란 술집에서 ⅶ) “유라이어 힙의 <7월의 아침>”을 듣기도 한다.
비틀즈와 빌리 조엘이 스메타나와 섞이고, 몇 시간의 틈을 두고 빌 에반스와 부닌의 음반을 구입하는 이런 장면은, 최선주가 남형섭의 집을 방문한 저녁에도 반복된다. ⅰ) “밤 열 시. 나는 로이 부캐넌의 음악을 틀어놓고 그녀와 함께 소파에 앉아 현기증을 느끼며 맥주를 마셨다.” ⅱ) “로이 부캐넌의 기타 연주는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나는 루이 암스트롱의 트럼펫 연주로 판을 갈아 끼웠다.” ⅲ) “정색하며 그녀가 입을 연 것은 내가 루이 암스트롱을 아마데우스 사중주단이 연주하는 드보르작의 현악 사중주곡 <아메리칸>으로 판을 바꿀 때였다.”
흥미롭게도 작가는, 남형섭과 이정란이 SE라는 상호를 가진 카페에 갔을 때, 자기반영적으로 느껴지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쓴다: “그녀는 내 얼굴을 쳐다보며 잔에 맥주를 따랐다. 영화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의 주제곡인 로버타 플랙의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클래식, 가요, 팝, 영화음악 같은 것들이 갈피를 잡을 수 없이 반죽이 되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남형섭이 의식하고 있으며, 작가가 의도했던 작중의 ‘음악적 무질서’는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의 주제와 아무런 상관이 없지 않다. 주인공은 첫 사랑의 과거를 잊고 싶어 하는 사람이고, 때문에 어떤 기호에 고정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그게 남형섭의 음악적 기호를 ‘잡식성’으로 이끈다. 하지만, 윤대녕의 작품을 거의 읽은 경험으로 말하자면, 딱히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에서만 그랬던 게 아니다. 그건 윤대녕의 음악적 취향이기 십상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구절들은 거의, 그의 육성으로 들린다: “신에게 가장 가까이 접근해 있는 예술이 아마도 음악이지 싶어요”, “중고등학교 대학 때까진 주로 팝송, 그 후론 주로 클래식”, “하나 꼽으라면 역시 모차르트, 그다음엔 드보르작. 그 다음엔 슈베르트…” 그리고 “왜 CD는 없느냐”는 질문에 “소리골의 깊은 울림이 없어, 기계 소리가 나. 음에 신비감이 없다는 거지” 등등. 그렇다면 “그녀의 몸은 브람스의 <교향곡 제4번 e단조 작품 98>과도 같았다”는? 하여튼 음악 취미가 그에게 육화된 게 아니라면, 자신의 딸과 동급생인 남자 고등학생을 앉혀 놓고 다짜고짜 “음악 좋아해요? 가령 바흐나 드뷔시나”와 같은 생경한 장면도 연출하기 어렵지 않았을까?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의 서두는 주인공 남형섭이 최선주의 음반 가게 ‘쇼팽네 가게’에 들어서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고의적으로 잊으려고 했던 기억 찾기라는 고행을 거쳐, 최선주와의 만남으로 끝난다. 당연히 그때 울리는 음악은 쇼팽이다: “그녀와 나는 소파에 앉아 과일을 먹으며 쇼팽의 <야상곡>을 들었다. 그 순간에도 시간은 서두른 기색 없이 천천히 미래를 향해 옮겨가고 있었다. 이미 문 닫힌 아이스링크에서 혼자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처럼.”
『눈의 여행자』는 많은 부분,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와 비슷한 모티브를 운용한다. 그래서 두 작품의 모티브와 구조를 비교하는 것도 재미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결국 사람을 구원하자는 게 글 쓰는 일”이라는 작중 인물의 요구다. 거기에 대한 작가 응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작가는 곧 거기에 응할 예정이다. 그게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더라도, 결국은 그게 그거 아닌가? 실존적이든 사회적이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집’을 지어 주는 게 ‘소설’이다.
4월 22일
재미난 책을 읽었다. 제목부터 재미있지 않은가? 『악!법이라고?』(이매진, 2009)라니! 이 책은 박재동·최규석·김태권 등의 잘나가는 만화가 14명이, 이명박 정부로부터 굉장한 ‘삘’을 선사 받고 의기투합한, ‘진짜’ 만화책이다.
작년 12월, 한나라당이 통과시키고자 했던 85개의 중점 법안은 야당과 시민 사회의 저항으로 상정이 무산됐다. 그 가운데는 한나라당의 장기 집권을 위한 공공 악법과, 시장 중심이 아니라 아예 시장을 재벌에게 갖다 바치는 악법이 뒤섞여 있다. 예를 들어 시위장에서 얼굴을 가리는 것을 금지한 복면금지법, 친고가 아니더라도 고발이 가능한 사이버 모욕죄, 국민 누구나의 통신 기록을 영장 없이 감청·열람할 수 있는 통신비밀보호법 같은 게 전자에 속한다.
후자에 해당하는 악법으로는, 조·중·동과 같은 거대 독점 언론에게 방송 겸업을 허용하는 방송법, 재벌들의 은행 소유를 허용하는 금산분리 완화책, 의료와 수도 분야를 민영화하기 위한 개악을 꼽을 수 있다. 이 가운데, 특히 우리나라의 의료와 수도 정책은 전 세계 어느 곳보다 뛰어난 공공성을 유지하고 있는 경우여서, 아주 미미한 개악마저 국민 전체의 삶과 직결될 수밖에 없다.
다수 의석을 차지한 여당이 법안을 좌지우지 하는 것을, 다수결 원칙에 따른 당연한 권리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국민이 국회에 부여한 입법 권한이 ‘다수당에 의한 입법독점권’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법률이 일단 제정되면 국민은 법을 지켜야 하는 ‘강제’를 당하게 되므로, 그전에 충분한 여론 수렴과 토론을 거치는 것이 필수다. 그런 과정 없이 다수당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법을 제 마음대로 통과시킨다면, 우리는 민주주의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이전 정권이 다수당이었을 때에도 그런 횡포는 부리지 못했다.
이 책은 ‘10년을 거꾸로 돌리는 MB악법 바로보기’라는 부제가 가리키는 그대로, 14명의 만화가들이 대표적인 MB악법을 하나씩 맡아, 문제점을 파헤친 만화책이다. 서두에 ‘진짜’ 만화책이라고 쓴 까닭은 만화의 기원이 이와 같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뿐, ‘가짜’ 만화책이 따로 있다거나, 행여 그런 만화책을 낮추어 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혹자는 만화의 기원을 스페인의 화가 고야의 풍자화에서 찾고, 다른 이는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프랑스의 풍자화가 오노레 도미에로부터 찾는다. 누가 되었건, 만화의 기원에는 부조리한 사회 고발과 권력에 대한 저항이 밑저리로 깔려 있는 것이다.
후기: 2008년, 주경복 서울시교육감 후보의 선거법 위반 사건을 조사한답시고, 서울중앙지검 공안 1부는 주 후보를 비롯한 조사 대상자 100여 명의 전자우편 기록을 인터넷 포탈업체로부터 내려받았다. 그 가운데 주 후보와 김민석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서울 사무처장의 이메일은 2001년 10월부터 2008년 12월까지, 무려 7년치를 당사자의 허락 없이 훔쳐봤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이 검사들은 훗날 죽어서, 어떤 지옥에 갈 것인가? (이 내용은 <한겨레> 2009. 4. 24일 자에 자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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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