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8일
라루스 편집부가 집필한 『라루스 청소년 미술사』(아트북스, 2007), 정숙경의 『미술, 만화로 읽다』(한길아트, 2008), 최태만 『다섯 빛깔 룽다와 흰색 까닥』(다흘미디어, 2007)을 읽다. - 170쪽 분량 가운데 반 이상이 서양미술에 할애된 『라루스 청소년 미술사』는, 그리스·로마 이후의 서양 미술을 소개하기 이전에 10개 권역으로 나뉜 고대 혹은 비서구 문명권의 미술을 소개하고 있다. 그 가운데 반갑게도 ‘한국’이 끼어 있었다. 그것들은 차례대로 고대 이집트·스키타이·인도·동남아시아(캄보디아와 인도네시아)·한국·중국·일본·이슬람·고대 아메리카·아프리카 순으로 펼쳐졌다.
반가운 마음에서 차례대로 읽어 나갔다. 그런데 한국 편에 이르러 갑자기 다른 편에서는 볼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가능하지도 않았던, “우리 국토의 7할이 산이다”나 “새로운 미술 흐름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우리 실정에 맞는 양식을 찾기 위해 주체적인 노력을 잊지 않았다”는 기술이 나왔다. 그래서 판권란을 찾아 살피니, 다음과 같은 편집자 주가 달려 있다: “이 책에 수록된 ‘한국’편은 한국 미술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저작권자의 동의를 얻어 덧붙인 것이다.” 운운. 프랑스에서 출간된 이 책의 원서 발행연도는 2005년. 한국은, 여전히, 별 볼일 없는 나라다.
근대 이후의 미술에 주목한다면, 이 책은, 에두아르 마네(“인상주의의 아버지”이자 근대 미술의 시조), 바실리 칸딘스키(“추상미술의 가장 위대한 거장”), 요제프 보이스(그를 제외하고는 “전후 미술계는 20년 가까이 아무런 변화를 보이지 못했다.”)에 바쳐진 책이다.
『미술, 만화로 읽다』의 일절:
해프닝이나 퍼포먼스, 설치와 같은 현대미술은 전통적인 미술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그러나 미술에서 장르의 경계가 허물어진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 아니다.
앞 장에서는 회화·조각·건축을 중심으로 조형예술의 개별 장르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원래 춤과 음악은 제전의 일부였고, 성화나 성상은 신을 경배하기 위한 건물에 구속되었으며, 왕의 초상이 걸리던 곳은 바로 궁전이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미술이라 부르는 것들은 18세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별개로 떨어져 있지 않고, 우리의 일상생활에 자리 잡고 있었다(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밀라노 산타 마리아 델라 그라치에 수도원의 식당 벽에 그려져 있다).
위의 인용은, 우리가 박물관 액자나 좌대 속에 들어 있는 소위 ‘예술 작품’들을 원래의 맥락과 환경에 놓고 이해하거나 감상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을 자주, 잊는다. 위의 인용과 함께 읽어 볼 대목은 아래와 같다:
우리는 작품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그림의 외양뿐만 아니라 작가의 일생과 그 시대의 문화적 징후, 그림에 그려진 도상의 의미와 역사 등 작품을 둘러싼 다양한 사실들을 확인하려 한다. 그것은 작품의 형식(외양) 이면에 더 중요한 내용이 따로 있을 것이라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해석은 작품 전체에서 일련의 요소를 뽑아내어 작품을 번역하는 일이 된다. (57쪽)
저자는 이 책의 모두에 “ART: 미술이 근대 200년간의 발명품이라면 당신은 믿을 수 있는가?”(23쪽)라는 주장을, 질문의 형식으로 제기해 놓았다. 그 주장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 샤를 바퇴(1713~1780)가 1747년에 쓴 『동일한 한 가지 원리로 귀결되는 순수예술』이다. 샤를 바퇴는 그 책에서 ‘순수 예술’이란 개념을 쓰기 이전에는 오늘과 같은 뜻에서의 ‘순수 예술’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순수예술의 개념과 그 체계가 현재 우리에겐 너무나 단순하고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오랜 시간에 걸친 노력의 결과로, 그것이 확립된 시기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58쪽)
우리가 현재 박물관에 모셔두고 미술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한때 보물을 가득 싣고 떠났던 보물선의 앙상한 잔해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 보물선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우리가 지금처럼 미술의 영역을 인위적으로 경계 지워, 액자틀 안의 것은 회화로, 좌대 위의 것은 조각으로 보는 것은 ‘미술’이라는 발명품과 그것을 둘러싼 여러 제도들(화랑·미술관·박물관·미술 시장·미술사·미술출판 등)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경계란 항상 ‘~(미술)인 것’과 ‘~(미술)이 아닌 것’을 만들어내고 만다. (220~221쪽)
『다섯 빛깔 룽다와 흰색 까닥』을 읽고서야, 티베트의 크기가 한반도의 약 여섯 배에 이른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넓은 땅에 사는 인구가 고작 265만이라니!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경상도 정도의 크기인 줄 알았다. 티베트는 7세기 이후 통일 국가를 형성하고, 8세기에는 중원을 장악하기도 한 토번(吐藩=투뵈)으로부터 파생한 이름이다. 이설로는 ‘눈 위의 땅’을 지칭하는 몽골어 ‘투베르Thubet'에서 유래했다고도 하는데, 티베트의 어원이 몽골어에서 유래한다는 설이 아주 설득력이 없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몽골이 중원과 티베트를 점령했던 시절, 몽골의 칸은 ‘티베트 불교’를 받아들이기도 하는 등, 티베트와 몽골의 관계가 밀접했었다. 티베트 불교를 ‘라마교’라고 부르는 것은 조선朝鮮을 이조李朝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잘못이다.
티베트라는 명칭이 아리송한 것처럼, 이 나라의 역사는 복잡하고, 티베트 불교 역시 복잡하다. 이 여행기는 티베트 약사라고 해도 좋을 만큼, 그 복잡함들을 잘 정리해 놓았다. 먼저 티베트 불교: 굽타왕조 이후 힌두교와 이슬람이 득세하면서 인도에서는 불교가 자취를 감췄다. 대신 7세기경에 통일국가가 된 티베트가 인도의 후기 불교를 받아들여 그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티베트 불교는 소승·대승·밀불교가 혼재해 있는 것이 특징인데, 그 가운데 가장 독특한 것은 활불전세活佛轉世라고 불리는 활불 제도다. 활불이란 말 그대로 ‘살아있는 부처’를 뜻하며, 활불은 죽지 않고 계속해서 환생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달라이 라마’가 바로 활불인데, 티베트에는 달라이 라마뿐 아니라, ‘빤첸 라마’라는 활불이 더 있다.
두 활불은 어떻게 보면 티베트가 만들어 낸 게 아니라, 몽골 점령의 산물이다. 1578년 몽골의 알탄 칸이 티베트의 고승 쇄남갸초에게 달라이 라마라는 봉호(달라이는 티베트어로 ‘큰 바다’란 뜻을 가진 ‘갸초’의 몽골어)를 내린 게 ‘달라이 라마 제도’의 시초다. 달라이 라마는 몽골 제국의 원조 아래 왕권이 붕괴된 티베트의 실권자가 되었고, 종교와 정치 지도자로서의 달라이 라마 제도는 이때 확립됐다.
그런데 1646년 몽골의 꾸시 칸이 티베트의 짱 지역을 쉽게 통치하기 위해 따시룬뽀의 주지 롭상 최기걀쩬에게 빤첸 라마(‘위대한 스승’)라는 봉호를 내림으로서 티베트에는 두 명의 라마가 존재하게 됐다. 포탈라 궁을 주석처로 삼고 있는 달라이 라마와, 따시룬뽀를 주석처로 삼고 있는 빤첸 라마는, 티베트 불교를 대표하는 종교 지도자다. 티베트 사람들은 두 라마를 형과 아우 사이로 여기지만, 중국 정부는 두 라마를 이간질하는 정책을 써왔다.
티베트의 역사: 앞서 잠시 언급했던 것처럼, 티베트는 한때 중원을 제패했던 강국이었다. 670년경에 이르러는 실크로드의 패권을 장악했었고, 안녹산의 난(755~763)으로 중원이 어지러웠을 때는 당의 수도인 장안까지 점령한 적이 있다. 돈황은 842년 장의조張議潮가 티베트 권력층의 내분을 이용해 봉기하여 마침내 티베트를 당나라에 바치기 전까지 티베트의 영역이었다. 차츰 쇠락을 거듭한 티베트는, 티베트와 러시아의 접촉을 러시아의 동진 정책으로 오해했던 영국에 의해 1300년 동안 티베트의 수도였던 라싸(‘부처님의 땅’)가 점령되기도 했다. 1951년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인민해방군이 무력으로 라싸에 진입했고, 1959년 신년에 일어난 티베트 민중 봉기를 진압한 이후인 1965년부터 티베트는 중국 자치구의 하나인 시짱(西藏: 서쪽의 숨겨진 땅)이 됐다. 1959년, 티베트인들의 무장저항이 일어나자 제14대 달라이 라마는 인도의 다람살라에 망명정부를 세웠고, 중국 정부는 달라이 라마 대신 제10대 빤쩬 라마를 티베트의 지도자로 내세웠다.
티베트 불교 미술: 티베트 불교미술에서 특이한 도상은 분노존(忿怒尊)이다. 58존에 달하는 다양한 “분노존은 인간의 사악한 면을 제도”하고 “악마를 항복시키기 위해”기 위해 “불보살들이 강력한 의미를 담은 성난 표정”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티베트 불교미술로 분노존보다 더 널리 알려진 것은, 만다라曼陀羅/曼茶羅다. 원圓·본질· 전체성· 우주적 지성· 완전함 등의 뜻을 가진 만다라는 불교로 수용되면서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상징적 도형’을 가리키게 됐다. 하지만 알고 보면 만다라 역시 티베트 고유의 불교미술이 아니라, 인도의 힌두교에서 건너온 것이다. “일반적으로 만다라는 고대인도 왕궁의 구조나 형태를 빌려와 불보살이 거주하는 우주를 이차원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알려진다. 따라서 이 만다라는 비밀불교에서 원과 사각으로 짜인 틀 안에 불타들이 정연하게 늘어선 우주도를 의미한다.” 가로세로 8개(8×8=64)의 정방형을 기본으로 하는 만다라는 사경寫經처럼 수행의 한 방법이며, 불교 행사를 위해 만들어졌다가, 행사가 끝나면 파괴된다. 지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며, 여기에서의 삶은 환영幻影이다.
티베트 불교와 한국 불교 교섭사: 700년을 전후하여 당을 거쳐 인도를 방문했던 혜초는, 아직 불교를 국교로 정하지 않은 시기의 티베트를 보고 “국왕이나 백성 모두가 불법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으며, 정사精舍나 寺院사원도 없다”고 기록한 바 있다. 하지만 티베트 불교의 특성이 되기도 한 밀불교는 통일신라시대에 일찌감치 소개되었다. 신라 국사 의림義林은 740년경부터 밀불교의 주요 경전인『대비로자나성불신변가지경大毘蘆蔗那成佛神身變加持經』과 『대일경大日經』을 설했고, 8세기에 한역되었다. 밀불교의 주요 경전인 『금강정경金剛頂經』도 이 시기에 알려졌다.
밀레라빠(‘무영옷을 입은 사람’)에 대해: 티베트에 탄트라 밀교를 도입한 빠드마삼바바, 중국의 선불교와의 대결하여 선종의 돈오사상을 물리친 까마라쉴라와 함께 티베트 불교의 세 수호자 가운데 한 사람이면서 『십만송十萬頌』이란 음유시의 저자. 알렉산드로 조도롭스키(글)와 주르주 베스(그림)가 공동 작업한 『라마 블랑 Le Lama Blanc』(북하우스, 2001)은 그의 삶을 극화한 것이다.
마침 올해 출간된 한국판 『뉴레프트리뷰 2009/1』(길)에는 티베트 전문 저술가 체링 샤카의 대담 「티베트인의 정체성과 중국」이 실려 있다. ‘시짱 자치구’는 중국식 행정 표시 단위로, 중국에서는 ‘티베트’라는 단어를 금기시하고, 반대로 티베트인들은 ‘시짱’이라는 명칭을 금기시한다. 1995년 중국 정부가 빤쩬 라마를 직접 간택하면서, 티베트 사원과 중국 정부는 어긋나기 시작했다. 원래 티베트 사원은 온건파로 당의 중재자 역할을 해왔으며, 1980년대의 티베트인 투쟁이 독립 항쟁이었다면, 1959년 봉기 49주년에 맞추어 일어난 2008년 3월 10일 항쟁은 티베트인의 ‘정체성’과 전통을 보장해 달라는 싸움으로 한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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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