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7일
토마스 아이크의 『잭 런던』을 읽다. - 잭 런던의 소설은 ⅰ)알래스카 소설 ⅱ)프롤레타리아 소설 ⅲ)자전 소설로 크게 분류할 수 있다. 오늘날의 평자들은 ‘알래스카 소설’을 잭 런던의 본령으로 친다. 하지만 이 포괄적인 평전은 그가 개척해 놓은 ‘프롤레타리아 소설’도 비중 있게 다룬다.
유명 작가였던 잭 런던은 인기 있는 연설가였다. 그는 1905년 말과 1906년 초에 미국과 영국의 여러 대학과 사회단체를 돌며 사회주의를 선전했다. 다음은 사업가들의 초청으로 뉴욕에서 했던 연설이다: “여러분들은 세상을 경영할 의무를 맡았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러나 이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세상은 무질서하고 엉망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지 무능력합니다. 수백만 년 전에 우리 조상들은 동굴에 살면서 별다른 지능도 없었지만, 어떤 도구도 없이 오로지 강건한 육체를 써서 처자식들을 먹여 살렸습니다. 여러분들은 갖은 현대적 생산수단을 갖추고 조상들보다 수백만 배의 생산능력을 갖추었는데도 수백만의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한 일용할 양식을 주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이 엉망이 된 것은 여러분들의 책임인데, 여러분들은 더 이상 이 의무를 수행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누가 이 의무를 떠맡을 수 있겠습니까? 바로 우리들입니다 (…) 우리들은 지금 여러분들이 점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빼앗으려 합니다. 우리들을 보십시오. 우리들은 강건합니다. 우리들 손을 보세요. 우리들은 힘센 손을 가졌습니다. 여러분들은 무능하니 강한 힘에 굴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들은 강합니다. 언젠가 우리들은 여러분들이 그 왜소한 머리로는 꿈도 꾸지 못할 강력한 힘을 보여 줄 것입니다.” 이 도전적인 연설은 잭 런던이 병치레로 연설 활동을 중단하고, 몇 년 뒤에 쓰게 될 『강철군화』의 주인공을 통해 고스란히 되풀이된다. 작중에 나오는 거부들의 모임인 필로머스 클럽에서의 연설이 그것이다.
잭 런던이 살았던 시기는 미국에서의 사회주의 혁명과 노동운동이 가장 고조됐을 때다. 그 당시 미국의 사회주의 운동가들은 선거에 의한 합법적인 권력 쟁취를 목표로 하는 한 파와, 총파업만이 유일한 수단이라는 다른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런던은 “오랫동안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고 “선거에 의해 자본가들을 굴복시킬 수 있다”고 여겼으나 여러 정황 “특히 언론을 보건대 이런 생각은 한낱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자본가와의 투쟁을 결단하는 『강철군화』를 쓰게 된다.
여러 작품에 묘사된 잭 런던의 여성관은 하나같다. 토마스 아이크의 말에 따르면 “그의 작품에 나오는 여인들은 자기 스스로의 삶이라곤 없는 그저 경탄할 만한 아름다운 존재들일 뿐이다. 이들은 남자들에게 복종하며 남자들을 위해 일하고 남자들의 힘을 존경한다.” 잭 런던의 여주인공들은 딱히 그만의 것이 아니라 “미국의 전형적”인 여성상이기도 하며, 잭 런던 자신의 알래스카 체험이 만들어 놓은 환영으로 노다지꾼과 모험가들에게 “여성들은 쉽게 감상적으로 그려”진다. 그는 남성을 ‘문명’의 전사로, 여성은 ‘문화’의 보호자로 생각했다.
잭 런던은 다윈의 진화론,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 니체의 초인 사상에다, 마르크시즘이란 이질적인 사상까지 자신의 작품 속에 용해하려고 했다. 앞의 세 사상과 마르크시즘은 잘 섞이지 않지만, 잭 런던은 대중이 프롤레타리아로 각성되기 전에는 초인적이고 희생적인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또 그것이 그가 알래스카에서 얻었던 가혹한 체험이다.
불가능한 사상의 연금술과 그의 엉뚱한 행로가 보여주듯이, 잭 런던은 결코 이론적으로 마르크시즘을 받아들였던 사람이 아니다. 그랬기 때문에 사회주의 이론가(운동가)들과의 논전을 피해갈 수 없었고, 그것이 프롤레타리아 작가 계열의 선봉에 섰던 그를 피로하게 만들고, 끝내는 고립의 길을 걷게 했다. 이 심정적인 사회주의자가 마지막으로 했던 것은, 로버트 오언과 같은 농촌공동체를 건설하는 거였다.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만든 글렌엘런 농장은 그런 용도로 만들어졌다.
3월 9일
잭 런던의 『잭 런던의 조선사람 엿보기』(한울, 1995), 가스통 르루의 『러일전쟁, 제물포의 영웅들』(작가들, 2006)을 읽다. - 『오페라의 유령』의 작가로 알려진 가스통 르루는 작가로 입신하기 전에 신문 기자로 유명했다. 『러일전쟁, 제물포의 영웅들』은 러일전쟁(1904~1905)의 시발이 된 제물포 해전을 사후 취재한 것이다. 일본 해군에 완패한 러시아 군함 바랴그 호와 카레예츠 호의 장교와 수병들은 제물포에 정박 중이던 프랑스 해군의 도움을 받아, 상하이와 사이공을 거쳐 고국으로 향하는 귀국길에 올랐다. 이 책은 러시아 수병들이 수에즈 운하를 통과한다는 소식을 들은 가스통 르루가 운하가 있는 포트사이드(부르사이드)로 가서, 수병이 탄 여객선을 함께 타고 기착항인 마르세유까지 오면서 행했던 인터뷰를 바탕으로 씌어진 논픽션이다.
러일전쟁은 1904년 2월 8일 오후, 제물포항에서 뤼순(旅順)항으로 향하던 러시아 군함 카레예츠 호를 미리 기다리고 있던 일본 함대가 어뢰를 발사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다음날인 2월 9일 아침, 중립항인 제물포에서 철수하라는 일본 측의 최후통첩을 받은 러시아 군함 두 척이 제물포항을 떠나 팔미도 해상으로 나왔을 때, 전날과 같이 해상에 진을 치고 있던 일본 함대와 러시아 군함 간에 포격전이 벌어졌고, 30분 만에 러시아 해군은 괴멸됐다. 같은 날 밤, 또 다른 일본 함대는 뤼순에 기항하고 있던 러시아 함대를 기습 공격했다. 이후에 벌어진 러일전쟁의 추이는, 같은 해 5월에 벌어진 압록강 전투와 8월에 바다와 육지에서 맞붙은 황해해전과 만주전투에서 일본이 전승하고, 마지막엔 8개월이란 긴 항해 끝에 당도한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동해에 수장(1905. 5)시키는 것으로 끝났다. 일본의 완승이었다.
일본은 1904년 2월 8일에 있었던 최초의 어뢰공격과, 9일 밤 뤼순 항에 머물고 있던 러시아 함대에 대한 공격을 아무런 선전포고 없이 행했다. 일본의 선전포고는 다음날인 10일에야 정식으로 전달됐다. 서양인들은 선전포고 없는 기습공격을 비열한 짓이라고 한 입으로 비난했고, 열세에도 굴하지 않고 싸웠던 러시아 수군을 한껏 추어올렸다. 해전에서 목숨을 건지고 돌아온 러시아 수병들에게 제물포항에 정박 중이던 영국·프랑스·이태리 수군들은 즉각, 이 책의 원제목이기도 한 ‘제물포의 영웅들’이란 칭호를 선사했다. 그리고 그들이 온다는 소식이 유럽에 전해지면서, ‘제물포의 영웅들’에 관한 신화는 점차 고조되었다.
이 책의 저자는 책의 첫 장에서 마지막 장까지, 패배한 러시아 수군들을 거의 경애의 눈길로 바라본다. 그리고 그들의 패배를 ‘숭고한 패배’로 치장한다. 이 점, 저자의 시각이 ‘황색 난쟁이들’에 대한 당대의 서방언론과 서구인들의 협착한 인식에 갇혀 있었던 거라고 감안하더라도 쉽게 이해하기 힘들다. 러일전쟁이 발발하던 즈음, 영국·미국·일본에 맞서 프랑스와 러시아가 중국 분할에 관한 동일한 이해관계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일까? 하지만 이 책은 당대의 국제 정치나 프랑스의 입장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 가스통 르루는 마치 한 편의 모험소설을 쓰듯 ‘황색 난쟁이들’의 기습에 꿋꿋이 맞서 싸웠던 ‘제물포의 영웅들’의 애국심과 용감성에만 주목한다.
더더욱 이해하기 힘든 것은 프랑스인 환영 인파로 가득했던 마르세유를 떠나, 러시아인들이 기다리는 오데사와 세바스토폴을 거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러시아 황제의 ‘겨울궁전’에 이르기까지, 이 ‘패잔병’들이 받았던 열렬한 환호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패잔병’이 아무런 책임을 추궁 없이, ‘개선병사’와 같은 환대를 받은 적은 이 경우뿐이다. 이 기괴한 도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한 나라가 망할 때는 국민들은 물론이고 위정자들이 먼저 ‘미치고’ 나서일까? 제물포 해전이 있었던 1904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이 책은 무려 102년 만에 한국에 번역됐다.
잭 런던의 『잭 런던의 조선사람 엿보기』는 가스통 르루의 책보다 먼저 발견해서 읽었지만, 러일전쟁의 시간적 경과로 따지자면 『러일전쟁, 제물포의 영웅들』보다 뒤에 읽었어야 할 책이다. 러시아가 제물포에서 일본 해군에게 일격을 당하자, 전 세계의 이목은 이어서 벌어질 육상전에 쏠렸다: “아더 항[뤼순 항의 영어 이름]에서 일본 해군의 압도적인 승리로 일본의 위세가 등등했었다. 그러나 전 세계는 머리를 흔들고 이렇게 말했다. ‘일본이 지상전에서는 어떠한지 두고 보자.’ 아마도 이런 의심을 없애고 바다에서와 마찬가지로 육지에서도 같은 위세를 유감없이 전 세계에 떨치려고 [일본군은] 적에게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압록강 강변을 건너는 전선의 공격을 택했는지도 모른다.”
가스통 르루가 제물포 해전이 벌어졌던 조선의 역사나 조선이 처한 지정학적 역학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었듯이 명색이 ‘조선사람 엿보기’라는 잭 런던의 책에서도 그런 관찰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한국 독자들은 울화통이 터지는 이런 문장을 거듭 대할 뿐이다: “한국인은 섬세한 용모를 갖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빠져 있는데 그것은 힘이다. 더 씩씩한 인종과 비교해보면 한국인은 매가리가 없고 여성스럽다. 예전에는 용맹을 떨쳤지만 수세기에 걸친 집권층의 부패로 인하여 점차적으로 용맹성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정말로 한국인은 지구상의 그 어떤 민족 중에서도 의지와 진취성이 절대로 부족한 비능률적인 민족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백인 여행자가 처음으로 한국에 체류할 경우 처음 몇 주 동안은 기분 좋은 것과는 영 거리가 멀다. 만약 그가 예민한 사람이라면 그는 강력한 두 가지 욕구 사이에서 씨름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낼 것이다. 하나는 한국인들을 죽이고 싶은 욕구고, 또 하나는 자살하고 싶은 욕구이다”, “돈을 빼돌리는 수완에 있어서 그들[한국 관리들]은 서양인들을 능가한다. 그것에 대한 특별한 용어가 있는데 ‘착취’한다는 것이다. 백여 년 동안 이것은 일종의 수완으로 자리 잡아 왔는데, 한국에는 착취하는 계급과 착취당하는 두 부류의 계급만 존재하고 있다. 일본군 당국이 병사들을 위한 식량이 필요하면 한국 관료들은 각각의 가정에 요구하여 이를테면 쌀 두 되 정도를 받는다. 한국 국민은 쌀을 제공하고, 일본군 병사는 먹고, 일본 정부는 지불하고, 한국 관료는 돈을 착복한다”, “한국인의 특성 가운데 비능률적인 점 다음으로 꼽을 수 있는 두드러진 특성은 호기심이다. 그들은 ‘기웃거리는 것’을 좋아한다. 한국말로는 ‘구경’이라고 한다. 한국 사람들에게 ‘구경거리’는 우리 서양 사람들에겐 일종의 연극 관람이며 회의 참석이며 강론 경청이며 경마 구경이며 동물원 나들이이며 일종의 산책과도 같은, 그러니까 그 외에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것의 아주 큰 이점은 값이 싸다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에게 ‘구경거리’는 최고의 즐거움이다. 아주 사소한 어떤 사건이라 할지라도 구경거리에 해당되므로 몇 시간이 걸려도 ‘기웃거리느라고’ 서 있거나 구부리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한국인에 대한 품평과 함께 이 책에는 예의 바르고 공손한 일본인에 대한 칭찬도 많다. 하지만 그것이 잭 런던의 동양인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 즉 “일본인이 아무리 동양의 영국인이라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그들 역시 결국은 아시아인인 것이다”는 편견을 깨지는 못한다. 잭 런던이 특히 상찬하는 일본인의 덕목은 애국심과 호전성이다. 이 책에는 “일본인들은 지구멸망론만이 그들을 멈출 수 있게끔 되어 있다. 애국은 그들의 신앙이어서 다른 민족이 신을 위하여 죽듯이 그들은 조국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라거나 “일본인들은 호전적인 민족이었으며 그들 보병은 보병의 장점은 모두 갖추고 있었다” 등등 구절들이 흔하디흔하다. 하지만 잭 런던에게는 그런 덕목마저 동양적 야만성의 증거들이다: “그러나 일본인은 아시아 인종이다. 그리고 아시아인은 우리만큼 생명에 커다란 비중을 두지 않는다. 일본 장교들은 승리를 위하여 치른 대가에 관하여 언론이나 국민으로부터 받을 질책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반면에 언론과 국민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승리를 아니 멋진 승리를 요구한다.” 바로 이것이 종군기자로 압록강 전투를 목격하고 취재했던 잭 런던의 결론이다. 다시 말해 일본군은 승리를 거두긴 했으나 “유럽이나 미국의 어떤 장교라도” 피했을, 무모하고 불필요한 정면공격으로 많은 전사자를 냈다. 만약 백인 장교가 그런 전략을 취했다면 “자기 민족 앞에서 그런 행동에 대하여 어떠한 방법으로도 정당화시킬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에 대한 잭 런던의 상찬 뒤에는 반드시 ‘그렇지만, 백인이 더 낫다’거나 ‘일본인은 백인을 따라올 수 없다’는 부언이 따라붙는다. 때문에 일본군에 잡힌 러시아 포로를 바라보는 그의 마음은 착잡하고 혼란스러웠다: “[러시아 포로를 보는 순간] 나는 숨이 막혔다. 목을 조이는 듯한 느낌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그들은 나와 같은 종족이었다. 나는 갑자기 내가 창문을 통해 나와 같이 들여다보고 있는 황인종들 사이에서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상하게 내가 창문 저편에 있는 사람들과 연대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의 자리는 나와 전혀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자유롭게 밖에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편에 저들과 함께 포로로 잡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1904년 러일전쟁 종군기’라는 부제를 가진 이 책은, 러일전쟁 당시 잭 런던이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Sanfrancisco Examiner>등에 실었던 종군기를 모아, 한 프랑스 출판사가 1982년에 펴낸 것을 저본으로 하고 있다. 때문에 이 책의 영어본은 없을 가능성이 많다. 본서엔 종군기에 해당하는 본문 말고, 종군기와 별도로 씌어진 중국과 일본에 대한 두 편의 부록이 실려 있다. 이 책을 K대학교 도서관에서 먼저 빌려 본 누군가가 「부록 1. 잠자는 호랑이 중국」이란 에세이의 제목 옆에, 큰 별표와 함께 ‘꼭 읽을 것’이라고 연필로 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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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