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4일
임레 케르테스의 『운명』(다른우리, 2002)을 읽다. - 이 소설의 주인공 죄르지는 열다섯 살 난 유대계 헝가리인이다. 『운명』의 시간적 무대는, 이 소년이 아우슈비츠로 끌려갔던 1944년에서부터 나치의 패망으로 고향으로 돌아오기까지의 1년 동안이다. 나치의 유대인 박해와 강제수용소 이야기는 하나같이 고난받는 유대인들의 처참한 상태를 묘사하면서, 나치의 비인간성을 고발하는 데 바쳐진다. 아우슈비츠라는 암흑지점은 그만큼 다른 선택이 힘든 소재다.
그런데 이 소설은 다른 선택을 한다. 실제로 수용소 생활을 했던 작가는, 살아남은 자의 의무로 문학을 선택했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수용소 안에서 행복을 느끼고 경험했다고 말한다: “아우슈비츠의 굴뚝에서조차도 고통들 사이로 잠시 쉬는 시간에 행복과 비슷한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모두 내게 악과 ‘끔찍한 일’에 대해서만 묻는다. 내게는 이런 체험이 가장 기억에 남는데도 말이다. 그래, 난 사람들이 내게 묻는다면 다음엔 강제 수용소의 행복에 대해서 말할 것이다.” 자신이 경험한 아우슈비츠는 ‘참상이면서 행복’이라고 말하는 작가란, 그 자체로 스캔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레 케르테스는 왜 그렇게 말하는가?
논의를 더하기 전에 분명히 밝혀야 할 사항이 있다. 임레 케르테스는 유대인이 나치로부터 박해를 받아야 할 그럴듯한 이유가 있으며, 아우슈비츠와 같은 고통을 당하는 게 당연하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작가는 마크 트웨인의 번안으로 더 유명해진 북유럽 전래의 동화 『왕자와 거지』를 예로 들면서, 왕자와 거지를 나누는 건, 우연한 장난이었을 뿐, 그들의 ‘외면’은 같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유대인이 박해를 당해야 하는 ‘본질’이나, 유대인이 달리 취급받아도 괜찮은 ‘차이’ 같은 게 유대인 내부에 있었다는 뜻인가? 작가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유대인이 박해를 받는 것은 그들의 본질(내면) 때문이 아니다. 그저 “내가 아는 한, 그 차이를 말해주는 것으로 결국 노란 별”이 있었을 뿐이다. 왕자와 거지의 외면이 같았듯이 어느 인종이든 그 ‘내면’마저 똑같지만, 나치가 유대인의 가슴에 달아준 ‘노란 별’이 유대인을 박해당해도 좋은 희생양으로 낙인찍었다. 박해를 받아도 좋은 어떤 본질적인 이유가 유대인 내부에 내재해 있지 않다는 것을 작가는 “내 생각으로는, 그것은 밖에 달고 있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작중의 말로 대신한다.
임레 케르테스는 아우슈비츠를 체험하고도, 그 체험을 보편적인 휴머니즘의 입장에서 규탄하지 않고, 오히려 그 상황을 삶으로 전환시키는 인간 존재의 존엄성을 더 높이 긍정한다. 주인공 죄르지는 아우슈비츠에 대한 일종의 도덕적 판단을 중지하는 대신 아우슈비츠라는 환경을 고스란히 받아들임으로써, 인간은 어떤 환경에서도 살고자 하는 희망을 가지기 때문에 운명이나 악보다 위대한 것이라고 말한다. 때문에 역자 해설에도 잠시 언급되었던 것처럼 “소년은 수용소의 현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수용소에서의 삶이 또 다른 인생과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느낀다. 즉 수용소 역시 일상적인 질서가 지배하는 공간으로 받아들”이며, 아우슈비츠에서 해방되어서도 “그래, 어떤 의미에서는 그곳의 삶이 좀 더 순수하고 단순했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이 작품의 한국어 제목은 『운명』이지만, 원제는 번역된 제목과는 달리 ‘운명 없음’이라고 한다. 원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만일 운명이 존재한다면 자유란 불가능하다 (…) 만일 자유가 존재한다면 운명은 없다. 이 말은 ‘자신이 곧 운명’이라는 뜻이다”는 작중의 한 구절을 떠올리는 것으로 족하다. 그러고서 시간이 남는다면, 실존주의의 몇몇 원리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인간은 아무런 목적 없이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며, 때문에 그에게 무한히 주어진 것은 자유다. 거기에 어디 운명 따위가 개입하랴?
2월 26일
윤영애의 『지상의 낯선 자 - 보들레르』(민음사, 2001)를 읽다. -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자주 접한 단어 가운데 하나가 ‘댄디dandy’다. 이 개념은 ‘보들레르와 댄디’라는 주제로 아예 책 한 권을 따로 썼으면 할 만큼, 보들레르의 삶과 미학을 분석하는 데 중요한 단어로 이 책에 등장한다. 보들레르의 댄디즘은 우선 ⅰ) 사치스러운 의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의 댄디즘은 단순히 외부로 나타나는 차림새의 완벽함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영웅주의의 표현방식이었다. ‘금욕주의의 세련됨’, ‘정중함’, ‘예의 바름’, ‘자아 집중’ … 그리하여 ‘단장toilette'도 그의 눈에는 정신적인 우월함의 상징이며, 의상은 인간을 만든다는 것이다. 보들레르의 댄디즘은 타인에 대한 과시나 도발이라기보다는 도달하기 힘든 완벽한 ‘미’에 가까워지려는 끊임없는 관심의 결정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늘 거울 앞에 자신을 비추며 자신을 갈고 닦는 엄격함을 늦추지 않았고 자신의 독특한 댄디 철학을 세웠다.”(87쪽)
그러면 ⅱ) 그의 댄디 철학은 어떤 것일까? 보들레르는 『현대 생활의 화가』라는 미술론집의 한 장에서 댄디란 반부르주아적이고 반속물적인 ‘귀족 정신’이라고 말한다(‘귀족’이 아니라 ‘귀족 정신’에 유의할 것): “그는 댄디즘의 역사적 발생 기원을 밝히면서, 이는 ‘반부르주아, 반속물의 귀족적 반항 정신의 소산’임을 지적한다 (…) 여기서 그가 내세우는 댄디즘의 기본은 먼저 ‘부유, 한가하고 호사 속에서 자란’ ‘우아함’의 추구이며, ‘직업이 없는 사람’의 자유로움인데, 그것은 몰락 이전의 영국 귀족들의 취향이다. 댄디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물질적인 우아함과 단장에 대한 무절제한 취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우아함’의 정신도 ‘무엇보다 뛰어남에 사로잡혀’ 있는 엄격함에 있기 때문에, 그가 추구하는 외관의 멋은 속물들이 생각하듯이, 그저 사치스럽고 화려한 것의 추구와는 다르다.”(88쪽)
이런 댄디 철학은 의식적으로 ⅲ) 나를 대중과 구분하는 ‘다름에 대한 의식’과 ‘대중(취향)에 대한 경멸 의식’을 배양하고, 드러낸다: “‘자신을 뛰어나게 하는’ 이런 취향은 그의 실제 삶에서 ‘기발한 언행’으로 나타나고, ‘남을 놀라게 하는 기쁨과 결코 자신은 놀라지 않는 오만한 만족감’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그 당시 댄디의 왕으로 군림하던 브뤼멜이나 대부분의 아류들과 달리 그가 추구했던 것은 단순히 남을 놀라게 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남과 구별’되는 것이었다. 또 ‘댄디는 결코 속된 인간일 수는 없다’고 반속물성을 거듭 강조한다. 그는 글에서뿐 아니라 행동에서도 부르주아 속물들에 대한 경멸감을 시니컬하게 드러냈다. 이 같은 멸시는 그 도를 지나칠 때 대중을 경멸하는 고고한 자세와 무지하고 속된 대중에 대한 공격으로까지 나타난다.”(88쪽)
사치스러운 의상에서 시작했으되, 보들레르가 추구했던 진정한 댄디즘은 외향적인 과시와 전혀 상관없는 “내적인 도덕률”(89쪽)이자, “의지를 강하게 하고 영혼을 단련시키기 위한 정신건강학”(260쪽)이다. 그러면 삶의 원칙이자 동시에 미학과 작품 전체에 광범위하게 연결되어 있었던 보들레르의 댄디즘은 ⅳ) 어떤 미학적 입장을 가졌을까?: “보들레르는 자연에 대해 독특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연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내린다. 자연은 그 자체로는 전혀 아름다울 게 없고 의미도 없다. 자연은 의식도 없고 단순히 거기에 있을 뿐이다. 그래서 ‘미’는 자연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인공적인 것에 있다. 보들레르가 인공적인 것을 사랑하는 것은 본능과 자연스런 욕구에서 대한 증오로부터 시작한다. 먹고 마시고 자는 행위로 만족하는 것은 동물과 다를 것이 없는 단순 욕구이며, 자연은 인간에게 이 자연적 욕구와 범죄만을 부추길 뿐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인간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범죄의 취미를 타고났기 때문에 무엇보다 ‘범죄는 근본적으로 자연스런 것’이며. ‘덕은 반대로 인공적이고 초자연적인 것’이다. 본능적인 충동이나 자연스런 욕구에 자신을 맡기는 것은 영혼과 정신이 결여된 동물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고, 이런 이유에서 그는 자연을 거부한다.”(258쪽) 보들레르는 ‘자연’을 벗어나서야 인간은 비로소 고귀해진다고 믿었고(그런 뜻에서 ‘고귀한 야만인’ 따위의 루소적 교설은 그의 안중에 없었고), 물질에 대한 ‘자연적 욕구’ 역시 ‘고귀한 인간’이나 ‘댄디’라면 두루 멀리해야 할 비천한 것이었다.
‘자연미’보다 ‘인공미’를 내세웠던 ‘현대성의 창시자’인 보들레르가 ‘현대’와 ‘도시’를 자신의 기본 주제로 삼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새로운 인공미”(262쪽)를 찾기 위해서는 “독창성”(262쪽)이란 능력이 따라 중요해 졌는데, 인공미를 나타내기 위해 요구되는 독창성 역시 ‘남을 놀라게 하고, 남과 구별’되려는 댄디의 노력과 하등 다를 게 없다.
이 책은 보들레르의 전기적 사실을 충실히 따라가면서, 그의 대표작과 미학적 성장을 해설한 책이다. 보들레르에겐 선생이나 스승이 없었다. 그래서 보들레르가 되었다(보들레르가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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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