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8일
아멜리 노통의 『황산黃酸』(문학세계사, 2006)을 읽다. - 인간이 짐승에 불과하다는 인식으로부터 계몽기의 인간은 중세의 신학적 교설로부터 해방되기 시작했다. 어제 읽은 『내 방 여행』만해도, 42일간의 가택 연금을 마친 자비에르 드 메스트르는 “나의 육신이여, 가엾은 동물이여”라는 문장으로 책을 마쳤다. 아쉽게도 자비에르는 인간의 동물성을 조절하거나 제어하는 정체政體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물론 어느 대목에서인가 깊은 탐색 없이 존 로크의 이름을 언급한 바도 있지만, 짐승들이 모여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못했다.
자비에르가 아멜리 노통의 『황산』을 읽었다면 분명 흐뭇해했을 것이다. 원래 아멜리 노통은 쓰는 작품마다 인간의 수성獸性을 꼬집고 끄집어내는 데 특기를 보였는데, 이번 작품은 그 어느 작품보다 더 완벽하게 인간을 짐승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황산』이 발표된 뒤에 벌어진 논란은 예견된 수순처럼 보인다.
고생물학을 전공하던 스무 살 난 여대생 파노니크는 식물원으로 산책을 나갔다가, 식물원 일대를 급습한 방송국 직원들에게 체포된다. 그런 직후 가축용 화물칸에 실려 ‘리얼리티 쇼’를 위해 만들어진 집단수용소에 수감된다. 어떻게 보면 『황산』은 조지 오웰의 『1984년』처럼 미래의 가상 국가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 경쟁적으로 ‘리얼리티 쇼’를 기획하는 방송국과 관음증에 중독된 오늘날의 텔레비전 시청자들의 이야기다.
작가에 의해 “나치 수용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수용소”로 묘사된 집단수용소는, 시청률을 올리기 위한 방송국과 방송국의 이익을 보전하기 위해 협조한 국가 권력에 의해 건설되고 운영된다. 시청률과 관음증을 위해 무작위로 체포된 무죄한 죄수(?)들은, 생생한 폭행과 기아의 고통을 실제로 겪어야 하고, 그 현장은 24시간 동안 전국의 텔레비전 시청자들에게 전달된다. 전무후무한 ‘리얼리티 쇼’를 보면서 사람들은 “볼만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라며 흥분한다. 그 방송은 연일 기록적인 시청률을 나타냈다.
파노니크는 집단수용소에 수용되면서 자신의 이름을 박탈당하고 CKZ114라는 기호로 불리게 된다. 한편 방송국은 시청률을 극대화하기 위해 서른 살 미만의 젊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포로감시원(capo)을 모집하고, 스무 살 난 즈데나는 난생처음 일자리를 구하게 된다. 그녀는 포로를 학대하기 위해 고용된 자신의 임무를 철저히 완수하는데, 마치 그 모습은 한나 아렌트가 나치 관료로부터 추출해 낸 ‘악의 평범성’을 구현하는 듯하다. 하루 종일 죄수들을 괴롭히면서, 즈데나는 그저 그 일로부터 자신의 ‘봉급’이 나온다는 것만을 귀중하게 생각할 뿐이다. 시청자들은 카포에게 고통을 당하는 죄수들을 보며 즐기는 동시에, 뻔뻔스럽고 어리석으며 인간성이 고갈된 카포들의 잔악 행위를 보면서 자신들의 알량한 양심을 위무한다.
『황산』은 ‘리얼리티 쇼’를 즐기는 현대인의 가학적이고 관음증적인 심리를 고발한다. 아멜리 노통은 텔레비전 시청자들이 즐기는 ‘리얼리티 쇼’의 본질이 ‘아우슈비츠에 들이댄 카메라’와 다를 게 무엇이냐고 묻는 듯하다. 실제로 본인의 동의 없이 ‘리얼리티 쇼’의 카메라에 잡힌 피사체들은, 영문 없이 잡혀 온 아우슈비츠의 죄수들이나 같다. 이런 사정은 우리를 진짜 끔찍한 질문 앞에 내세운다. 아우슈비츠의 상황이 ‘리얼리티 쇼’처럼 실제로 중계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외면하겠는가? 아멜리 노통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작가의 짓궂은 악의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CKZ114를 향해 동성애적 욕망을 불태우는 즈데나는, 수용소에서는 금지된 죄수의 본명을 캐묻는다. 인간의 “이름은 그 개인의 내부로 들어가는 열쇠”며 “소통”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노니크(CKZ114)는 즈데나에게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 주길 거절한다. 그것이 자신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과 자유를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즈데나는 온갖 방법으로 CKZ114를 회유하고, 죄수들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작은 편의 예를 들어 초콜릿과 같은 식량을 얻고자 CKZ114에게 즈데나의 유혹을 받아들이라고 압력을 가한다. 이 지점에서부터 『황산』은 두 갈래 주제로 분화한다. 하나는 앞서 말했던 것 같이 현대인이 중독된 가학적인 관음증에 대한 풍자고, 다른 하나는 생존 논리를 앞세운 집단이 개인에게 강요하는 희생이다. 『황산』은 전자의 주제로 시작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뒤따르는 두 번째 주제에 이야기 전체를 넘겨준다. ‘아우슈비츠/리얼리티 쇼’가 권력과 상혼의 전유물이라면 독자들이 참을 수 있겠지만, 그것을 방치하고 욕망하는 주체가 개개인의 영혼에 깃든 이기적 수성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참을 수 있겠는가? 이런 불편한 진실이 『황산』 출간 직후에 벌어진 논쟁의 본말이라고 생각된다.
이 소설은 거론된 두 개의 주제 말고, 또 다른 주제를 가지고 있다. 바로 ‘신의 존재’다. 작가는 수차례에 걸쳐 “신의 존재가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건 바로 그의 부재가 너무나 명백할 때”라고 말하면서 “신의 부재는 기정사실”이라고 말한다. 이런 전언이 절실했던 곳은 나치가 세운 절멸 수용소에서였으며, 나치의 절멸 수용소 체험 이후 20세기는 늘 위의 전언을 품고 살아왔다.
문고판으로 나온 미셸 라크르와의 『악』(영림카디널, 2000)은 전통적인 악과 현대의 악에 대한 상반된 설명을 내놓는다. 서구 기독교 전통 속에서 악은 항상 신의 섭리를 완성시켜 주는 보족물이었다. 다시 말해 성경에 끊이지 않고 출현하는 악은, 신의 선의와 정의를 드러내 주며 소멸한다. 악은 절대 승리하는 법이 없었고, 악이 독립적으로 스스로의 정당성을 내세우는 경우도 없었다. 때문에 서구 기독교 전통은 악에 대해 늘 상대적인 낙관론을 유지했다.
악에 대한 기독교 신학의 우위는 라이프니츠의 변신론辯神論에서도 그 기조가 유지되었으며, 많은 세속적 사상가들에게마저 낙관론을 심어 주었다. 즉 ‘보이지 않는 손이 사회를 이롭게 한다’(애덤 스미스)거나, ‘역사의 간계가 결국은 인류를 진보시킨다’(헤겔)고 했을 때, ‘보이지 않는 손’과 ‘역사의 간계’는 악에 대해 늘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었던 신의 섭리가 세속화된 형태이다. 확실히 이때까지만 해도, 악은 선이 출현하기 위한 돌발 사건이나 과도기로 취급되었고, 악은 선의 중개자였기 때문에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이런 사정은 근대를 지나 현대에 돌입하면서 역전되었다. 변신론이 악에 패하고, ‘보이지 않는 손’과 ‘역사의 간계’가 작동되지 않는 시대에, 악은 신의 섭리도 선의 보족물도 더 이상 아니었다. 뿐 아니라, 프랑스대혁명 이후의 온갖 혁명은 ‘선의지’가 오히려 ‘악’을 만들어내는 형국이었으니, 스탈린의 강제수용소에서부터 크메르 루즈에 의한 ‘킬링 필드The Killing Fields’에 이르는 학살의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아우슈비츠/리얼리티 쇼’를 교묘하게 겹쳐 놓은 『황산』은 전자오락과 영화를 비롯한 대중·오락문화에서 언제나 악이 승리하는 현대의 문화 상황을 잘 포착했다. 미셸 라크르와는 마치 『황산』을 논평하기 위해 『악』을 쓴 것처럼 이렇게 적었다: “만화, 영화, 텔레비전 시리즈는 이젠 더 이상 만들어낼 환상이 없는지 이유 없는 잔인한 행동과 불필요한 공포 장면을 경쟁적으로 내보낸다. 우리는 그렇다, 신의 섭리나 역사로부터 온 것이 아닌 악이 존재한다, 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악은 선의 출현을 준비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자신에게로만 되돌아간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되묻게 된다. 만약 악이 그 자체 이외에 다른 동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악이 신성한 표시이기 때문이 아닐까?”
미셸 라크르와는 악을 물리치기 위해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무기는 “인간 사이의 관계” 즉 “연대감”이라고 말한다. 악마의 어원인 그리스어 동사 디아발레인diaballein은 ‘분열시키다’를 의미하는데, “왜냐하면 악마는 관계를 끊으면서 악의 본질을 구현하기 때문이다.”(『악』, 115~116쪽) 하므로 아멜리 노통의 여주인공 파노니크가 매번 실패하면서도 수용소 동료들에게 연대를 강조하는 것은, 그녀 역시 “악마란 본래 분열시키는 존재”(『황산』, 76쪽)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혼자 힘으로 수용소를 폐쇄시키고 죄수들을 해방시킨 파노니크는 “이제 고생물학 공부는 그만둘”거냐는 EPJ 327의 질문에, “첼로를 배울 거”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왜 첼로죠?”라고 그녀를 연모하는 EPJ 327이 다시 묻자, “인간의 목소리와 가장 흡사한 악기니까요”라고 대답한다. 파노니크의 저 대답이 『황산』의 마지막 문장인데, 이것은 “나의 육신이여, 가엾은 동물이여”로 끝맺어지는 자비에르의 『내 방 여행』과 출발선은 같았지만, 상당히 다른 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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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