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5일
시오노 나나미의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한길사, 1996)를 읽다. -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집필했던 피렌체 근교의 산탄드레아 산장의 마당에 서서 시오노 나나미가 본 것은, 피렌체 시가에 솟아난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꽃의 성모 대성당)의 둥근 지붕이었다. 피렌체를 대표하는 그 성당의 둥근 지붕 아래 펼쳐져 있는 거리에는 마키아벨리가 15년이나 근속했던 직장이 있다. 시오노 나나미는 관직에서 내쫓긴 마키아벨리가 자의적으로 택한 추방지에서 『군주론』을 써내려가는 그를 떠올리면서 “가슴이 칼날 같은 것으로 콱 찔리는 듯한 육체적 아픔”을 느꼈고, 그 순간 “나는 언젠가 마키아벨리를 써야지 하고 마음먹었다.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라는 제목도 그때 정해”진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1469년, 외양으로는 공화국이지만 실제로는 메디치가가 섭정을 하고 있는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단테가 태어나고 활동하기도 했던 피렌체는 군사적으로는 베네치아나 나폴리 같은 도시 국가에 비해 약소국이었지만, 보티첼리·레오나르도 다빈치·미켈란젤로가 그들의 공방을 만들 만큼 활기 띤 문화·예술 도시였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들이 한꺼번에 피렌체에서 활동한 것은, “학예 진흥이 종국적으로 실리를 가져온다”는 것을 메디치가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 남자로 태어난 야망가가 출세를 할 수 있는 조건과 방법은 세 가지다. 먼저 명문가에서 태어날 것. 개인의 재능이나 야망 유무와 상관없이 그 사람은 출세영달하게 된다. 둘째, 그렇게 태어나지 못했다면, 성직계聖職界에 들어가 성직자가 되는 것이다. 성직의 세계는 예술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실력의 세계였기 때문에 태생은 크게 상관이 없다. 그 시대는 종교심의 유무가 성직 선택과 거의 무관했던 시대로, 성직은 돈을 들이지 않고도 학문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고 또 출세와 이어질 수도 있는 유쾌한 직업이었다(평생 정식 결혼을 할 수 없다는 게 걸리긴 하지만, ‘정식’이란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의 성직자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정부와 자식을 두었으니…). 셋째, 앞서 열거했던 거장들처럼 예술계의 장인이 되는 것이다. 그때는 지금과 달리 화가가 되겠다는 아들의 포부가 부모를 깜짝 놀라게 하는 시대가 아니었다. 공방工房의 도제가 되겠다는 것은 아버지에게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갖게 하는 선택으로, 재능만 있으면 예술가가 되어 왕후와 대등하게 사귀는 것도 흔했다. 예술은 훌륭한 ‘성장산업’이었다.
그런데 마키아벨리는 첫째 조건과 거리가 멀었다. 그의 아버지는 고만고만한 법률고문으로 주위에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아도 되는 정도의 경제력만 가졌다. 자신의 처지를 약간 한탄했던지, 마키아벨리는 훗날 “나는 가난하게 태어났다. 그래서 즐기기 전에 먼저 고생하는 것을 익혔다”고 쓰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과장한 것처럼 그토록 집안이 남루하진 않았다. 일례가 마키아벨리의 아버지가 모았던 서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한 권의 가격은 그 당시 중류 계급이 벌 수 있는 1년 소득의 100분의 3이나 됐다. 사치품이었다는 말이다.
서적 수집이 취미였던 마키아벨리의 아버지는 평생 40권의 책을 수집했다. 법률고문답게 법률관계 책이 많았고, 나머지는 키케로의 『변론학』,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 플리니우스의 『박물지』, 티투스 리비우스의 『로마사』와 단테의 책이었다(나는 이 페이지가 있는 여백에 연필로 이렇게 썼다: “우리는 참 많이 가지고 있다!” 그래, 요즘 책을 좀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쉽게 수천 권을 넘기지 않는가?). 이 조촐한 장서가 흥미로운 것은, “종교서는 한 권도 없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장서 중에서 한 권을 꺼내와 책장을 넘기는 것이 어린아이가 독서를 시작하는 첫걸음”이라는 시오노 나나미는 이렇게 쓴다: “독서가였던 아버지의 장서에 종교서가 하나도 없다는 것도, 후일 그의[아들] 사상 형성에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후일까지 갈 필요도 없이, 마키아벨리는 비명문가 자제가 흔히 택하는 진로 가운데 하나인 성직에 기웃거린 적이 없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당시는 대학 진학에 돈이 많이 들었기에 진심으로 학문하고 싶은 가난한 청년은 성직계에 들어가서 대학 진학 혜택을 받는 게 일반적이었으나 그는 중등교육 수준으로 학력을 마쳤다. 당연히 그는 당시 지식인의 상표와도 같은 희랍어를 읽을 줄 몰랐다. 추측건대, 마키아벨리는 오늘날과는 달리 겨우 한 줌의 엘리트가 다니는 당시의 대학에 다닐 만큼의 수재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마지막으로 남은 공방의 도제를 택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는 공직자를 선택했다.
마키아벨리는 스물아홉 살 때까지 무직으로 지냈다. 아버지에게 그냥 얹혀살면서 독학을 했는지, 아버지의 사무를 도우면서 사회 경험을 쌓았는지, 이상하게도 이 대목에 대해서는 시오노 나나미가 우리에게 속 시원하게 말해주는 게 없다. 하지만 피렌체공화국의 정청政廳이 서기관을 공개 모집했을 때 명문가 자제도 대학 출신자도 아니면서 쟁쟁한 후보를 제치고 선정된 것을 보면, 나름 공직에 나갈 준비를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후 마키아벨리는 15년 동안이나, 피렌체 정청의 서기관으로 일하게 된다.
근대 정치학의 문을 연 『군주론』의 저자는 요즘 말로 하면 중앙 관청의 과장쯤 되는 직위에 불과했던 데다가, 그 신분으로는 더 이상 출세하려야 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런데도 그는 전력을 다해 피렌체공화국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공복公僕이었다. 그가 공직에 나섰던 때 피렌체는 이탈리아 내의 여러 대국으로부터 견제를 받거나 위협을 받는 상황이었고, 크고 작은 ‘도시형 국가’로 분열된 이탈리아 반도 자체는 중앙집권체제의 ‘영토형 국가’로 전환한 프랑스·스페인·신성로마제국(독일)·영국· 터키로부터 침략을 받는 때였다. 마키아벨리는 이런 위태한 상황에서 강한 군주와 국민군의 존재를 갈구했다.
자국인으로 구성된 상비군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염원은 『군주론』(1514)이 나오기 훨씬 이전 피렌체의 종신 대통령에게 제출한 『제언』(1503)이란 짤막한 논문에 이미 충분히 전개되어 있다. 거기서 마키아벨리는 “지금까지 어느 나라가 방위를 남에게 맡겨 놓고 자국의 안전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가?”라고 물으면서, 되풀이하여 “도시(국가)는 군사력 없이 존속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모든 도시 모든 국가에게 있어서, 그 영토를 침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적인 동시에 그것을 방위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도 적”이라고 단정하는 그는 “개인들 사이에서는, 법률이나 계약서나 협정이 신의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권력자들 사이에서 신의가 지켜지는 것은 오로지 무력에 의해서 뿐이다”라고 다시 강조한다.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주장을 실천하는 데 전혀 게으르지 않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연줄과 의사 결정권자에 접근할 수 있는 자기 직분을 이용하여 끊임없이 “자국민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방위력의 보유가 이 정세 아래서 필요 불가결하다”는 자신의 확신을 알렸다. 피렌체 정부는 마키아벨리의 생각을 이례적이고 새로운 것으로 여겼으나, 정규군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서른일곱 살의 서기관에게 기회를 주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게 그가 이상적인 군주로 여겼다던 체사레 보르자의 농민군단을 본뜬 400여 명의 국민군이었다. 이 군대가 피렌체 시민들에게 선보인 것은 우연히도 사육제 기간 중으로, 반쯤은 귀빈들의 구경거리에 불과했다.
마키아벨리와 피렌체의 명문가인 메디치 집안은 악연이었다. 마키아벨리의 공직 발탁이 메디치 집안의 섭정 상실과 추방 직후에 이루어진 것이라면, 15년 동안 봉직했던 서기관직에서 파면되었을 뿐 아니라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살이하게 된 것 역시 메디치가의 복귀와 연관되어 있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쓰게 된 까닭은, 자신의 저작을 메디치가에 바쳐 복직의 기회를 얻으려는 희망에서였다. 하지만 이 책을 증정받은 메디치가의 젊은 공작 로렌초는 이 책을 읽어보지도 않았고, 마키아벨리가 염원했던 복직도 없었다. 마흔여섯 살이 된 마키아벨리에게 복직의 길이 막혔던 그 순간을 시오노 나나미는 “‘전’ 서기관은 사라지고, 대신 작가가 탄생”했다고 감격해서 쓰고 있다.
마키아벨리가 진정한 공화주의자였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설왕설래가 많다. 시오노 나나미는 마키아벨리가 “본래는 공화주의자”였고 “공화 정체의 공명자”였으나 피렌체의 “독립과 안전”, 나아가 “이탈리아의 통일”을 생각했던 때문에 “공화 정체를 버려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고 판단한다. 시오노 나나미의 주장은 다른 서적을 더 섭렵하게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마키아벨리의 공화주의 지지 여부 따위가 아니다.
그의 『군주론』은 서양 정치 이론에서 “정치와 윤리”를 명쾌하게 갈라놓았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 정치와 윤리는 같은 것이었지만, 아직은 지상의 것이었다. 하지만 정치와 윤리가 한몸인 현상은 신학이 가미된 토마스 아퀴나스 시대에 이르러 윤리적 성격이 더 뚜렷해지면서 정치는 지상적인 것에서 멀어졌다. 마키아벨리는 유럽의 정치 전통으로부터 윤리를 분리하면서, 오로지 “현실에서 정치권력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 있는가”를 논했다. 사람들은 그런 마키아벨리를 ‘악의 교사’로 부르지만, 『군주론』은 위정자나 시민들에게 공히, ‘현실 정치’를 냉정히 분석하고 실천하게 하는 교과서 역할을 한다. 대중 교육과 민주주의의 시대에, 이 책은 위정자들의 숨은 무기이기보다는 도리어 시민들의 무기다(이 주제는 이미, 또 다른 글감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군주론』을 공화국으로부터 버림받았을 뿐 아니라, 우국충정에 대한 자신의 포부가 좌절된 마키아벨리의 “분노의 산물”이라고 간주한다. 사마천을 생각하면, 쉽게 납득이 가는 설명이다. 저자는 책의 맨 마지막에 후기 삼아 이렇게 썼다: “독자 여러분. 이것을 다 읽고 나신 지금, 여러분에게도 이 사나이는 ‘나의 친구’가 되었습니까? 1987년 봄. 피렌체에서. 시오노 나나미.” 아, 되었고말고요. 공동체에 헌신하는 마키아벨리와 같은 공복을 우리는 얼마나 바라마지 않는지. 또 자신의 불운을 불요불굴의 의지로 헤쳐나가는 집념가는 얼마나 큰 의지가 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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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