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0일
단번에 책 제목이 입에 붙지 않는 헤르만 핑케의 『카토 본트여스 판 베이크』(바이북스, 2007)는 마치 심오한 뜻을 가진 문장처럼 보인다. 나치가 동부전선에서 패퇴하기 시작하던 1943년 8월, 스물두 살 난 카토 본트여스 판 베이크는 반역죄라는 죄상으로 단두형을 당했다. 화가와 무용가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려서부터 자유의 공기를 흠뻑 마시며 자랐다.
그녀가 몸담았던 조직은 베를린 시내에 반나치 전단과 벽보를 몇 번 만들어 뿌리는 것만으로 일망타진됐다. 상부 조직원들은 체포 직후 사형됐고, 그녀가 형을 받기까지는 약 9개월의 구금 기간이 있었다. 죽음 직전의 예수님도 ‘될수록 이 잔을 피하게 해달라’고 아버지 하느님께 간구했건만, 그녀는 자신을 위해 한 번도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다.
먼저 이 책은, 죽음 앞에 초연했던 사람들의 기록을 모으고, 그 현상에 대해 한 권의 책을 써 보도록 충동한다. 그게 첫 번째 감상이라면, 나머지 둘은 우리나라의 현대사나 현실을 떠올려준다. 그 하나는 독일에서의 나치 청산이 한국에서의 친일 부역자나 일본 국내의 전범 처리와 똑같이 냉전의 영향으로 크게 왜곡되었다는 점이다.
그녀의 조직에 공산주의자도 있긴 했으나, 그녀를 비롯한 다양한 가담자들이 모두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들에겐 히틀러에 대한 찬반이라는 오직 두 가지 선택밖에 주어지지 않았고, 독일 군대가 전쟁에서 패하는 것만이 그를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런 상황은 우리나라의 공산주의 계열 항일 독립 운동가들의 선택과 다르지 않다. 그들은 일본에 대한 지지와 반대 가운데 후자를 선택한 사람들로 우선 구분되어야 옳다.
하지만 패전 후 많은 나치들이 생존을 위해 미국에 빌붙으면서, 반나치 운동을 공산주의 운동으로 착색했다. 그들은 카토 본트여스 판 베이크같은 반나치 희생자들을 소련 스파이로 몰면서 미국 정보국의 자문이 되었고, 희생자들의 피는 동독과 대치하고 있는 서독 역사에서 말끔히 씻겨졌다. 이 또한 하루아침에 반공 투사로 변신했던 이 땅의 숱한 친일 부역자들의 전력과, 공산 계열 항일 운동가들을 독립운동가에서 제외해온 우리나라 정부를 닮았다.
전후 카토 본트여스 판 베이크의 가족들이 그녀의 명예를 회복하고 보상을 받기 위해 국가에 청원했을 때, 그것을 저지했던 사람은 그 사건을 담당했던 주임 검사였다. 그는 패전 직후 미국의 보호를 받았고, 새로 생긴 극우 정당의 연설가로 승승장구했다.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나면 입법부와 행정부 인사들이 자격 제한이나 심판을 받곤 하지만, 사법부는 늘 안전지대에 있다. 만프레트 레더와 같은 나치 시대의 판검사들은 “나는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나는 독일 판사로 내 의무를 다했을 뿐이다”고 말한다. 이들로 하여금 법전이 아닌 상식을 따르게 하고, 사회적 책임을 물리기 위해서는 갖은 수단이 필요하다. 카토 본트여스 판 베이크에 대한 유죄 선고는, 냉전이 해체된 1994년에 와서야 비로소 무효가 됐다.
1월 13일
시오노 나나미의 『르네상스의 여인들』(한길사, 2002, 2판 2쇄)을 읽다. - 이 책이 시오노 나나미의 첫 책이란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지난달에 읽었던 『남자들에게』를 통해서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장르 불문하고 어떤 사람의 책이든 그 사람의 ‘첫 번째 저작’이 가장 읽을 만하다고 여기는 사람이다. 나는 작가나 저자가 시간을 통해서나 각고의 노력을 통해 그의 첫 책보다 더 원숙해진다거나 일취월장한다고는 절대 믿지 않는다. 물론 ‘두 번째 저작’이 첫 번째 저작보다 더 나은 사람이 없을 수는 없는데, 그건 그 사람의 첫 번째 저작이 얼마만큼 엉터리였는지를 말해줄 뿐이다.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초 사이에 살았던 네 명의 이탈리아 여자를 평전체로 기술한 이 책은 분명 역사책이지만, 장르가 불명확한 데가 있어서, 어느 곳에서는 소설로 명기 되어 있기도 하다. 시오노 나나미는 책이 출간되고 나서 한참이나 세월이 흐른 뒤에 행해진 한 대담에서, 이런 곤란한 사정을 피력하고 있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 신인 딱지는 벌써 오래전에 떨어졌는데, ‘문학과 역사라는 두 영역에서 의붓자식 취급을 받고 있는’ 것만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으니까요.”
역사란 우리 앞에 원자료만 제시되어 있는, 굉장히 무미건조하고 불완전한 자료 더미에 불과하다. 그래서 감정이 소거되어 있고 흑막이 누락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원자료를 메우기 위해 문학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때문에 시오노 나나미는 역사와 문학 사이의 불명확한 지점을 자신의 장르로 삼았다. 그녀는 매 행위와 사건을 분석하면서 그 배면에 있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인들의 사고구조를 포착하고자 했는데, 그런 노력이 원자료만으로는 과부족인 핍진성을 더하고 있다. 핍진성이란, 문학 작품에서 텍스트에 대해 신뢰할 만하고 개연성이 있다고 독자에게 납득시키는 정도를 말한다.
시오노 나나미는 르네상스기의 이탈리아인들을 움직인 원리를 ‘대담한 영혼’과 현실주의에 바탕을 둔 ‘합리적 정신’으로 요약하는데, 이것은 진정한 르네상스인이었던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과도 불가분의 관련을 맺는다. 마키아벨리가 이상적인 군주에게서 찾고자 했던 ‘여우(냉철한 현실주의자)’와 ‘사자(대담한 영혼)’의 은유가 바로 그것이다. 작가에 따르면, 이탈리아 르네상스식 조화는 “정신과 육체, 선과 악이 명쾌하면서도 감각적이고 관능적으로 공존”하는 것을 말한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에서는 프로테스탄트적인 견해, 즉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의 ‘갈등’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신과 육체 사이에 ‘갈등’이라는 혼탁하고 달콤한 관계는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신과 육체를 나누어 생각하고 싶어 하는, 인문주의적 전통을 갖고 있지 않은 북방의 프로테스탄트적인 견해였고, 사보나롤라(이탈리아의 종교개혁가)가 지나치게 높은 평가를 받거나 당시 교황들이 타락했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정신과 육체가 인간 속에 조화를 이루며 공존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요체는 비좁은 정신주의의 껍데기 속에 틀어박히지 않는 대담한 영혼과 냉철한 합리적 정신에 있다. 여기에 입각한 정신과 육체의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조화. 이것을 감지하지 못하는 한, 이탈리아 르네상스 정신을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르네상스는 그런 시대였다”고 자주 말하는 시오노 나나미는 이 책에서 “남자의 마음을 가진 여자”라는 평을 받았던 또 한 명의 카테리나 스포르차와 같이, 냉정한 눈으로 ‘역사의 현실’을 설명한다. 강대국 베네치아가 약소국 키프로스를 농락했던 사실을 기술하며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역사상 지칠 줄 모르고 되풀이되는 예술, 강대국이 무력을 이용하여 약소국의 내정에 간섭하는 예술의 실례가 여기에 있다. 여기서 법적인 정당성도, 인간성에 대한 배려도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 오직 신속하고 과감한 군사행동과 정치의 노련한 조화가 있을 뿐이다. 모든 시대를 통하여 사람들이 ‘지혜’라고 불러온 것, 모든 시대를 통하여 역사의 현실을 움직여온 것은 바로 그것이다.”
『남자들에게』의 한 꼭지에서 시오노 나나미는 『르네상스의 여인들』을 만들었던 편집자가 그녀의 원고를 읽고 나서 했던 말을 회상한다. 이 책을 계기로 15년 동안이나 그녀의 책을 만들었던 편집자는 “자네는 남자들을 경탄하게 할 작품을 쓸 줄 아는 몇 안 되는 작가가 될걸세”라고 말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사족. 『남자들에게』와 같이 이 책도 헌책방에서 구입했다. 판권란 뒤엔 ‘2008. 10. 30 책나라’라고 적혀 있다. 이어서 읽을 작정인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역시 같은 헌책방에서 산 것으로 거기엔 ‘2008. 8. 10’이라고 씌어져 있다. 헌책방에서 시오노 나나미의 책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만큼 많이 팔렸다는 뜻이다. 나는 거의 매일 헌책방을 순례하고 다니지만, 아직 내 책을 ‘흔전만전’ 구경한 일이 없다(참, 속상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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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