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1일
시오노 나나미의 『남자들에게』(한길사, 1995)를 읽다. - 지금껏 내가 읽은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이라곤 『나의 인생은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가 유일하다. 두 번째로 읽게 된 『남자들에게』에 대한 독후감 쓰면서 지난 『독서일기』 속에 그녀가 어떻게 읽혔는지 무척 궁금했지만, 그게 『독서일기』의 어느 권에 실려 있는지, 찾기가 귀찮다. 요즘 이런 일이 너무 흔해지면서, 뒤늦게야 ‘색인’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출판사의 편집자가 ‘색인’을 만들자고 거의 ‘사정 반, 강요 반’ 했는데, ‘색인 있는 일기가 어디 있어요?’하고 완강히 거절했다. 바보라고 해야겠지).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시오노 나나미가 남성 독자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남성론’을 펼친 글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색하고 쓴 묵직한 이론서는 아니다. 남자들이 여자 얘기를 즐겨 하듯, 여자들이 남성을 화제로 떠올릴 때 나올 듯한 얘기들이 시오노 나나미의 ‘남성론’을 구성한다. 이를테면 남자의 옷 입기, 남자의 매력, 마더 콤플렉스 같은 화제들인데, 남성론이든 여성론이든 이런 세부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신뢰하려 들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읽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50개의 꼭지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에세이는 「남자의 낭만이란」 제하로 쓴 글이었다. 저자에 따르면 남자의 낭만이란 “현실세계에서 추구하는 것 이외의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남자가 현실세계에서 추구하는 것이 출세·돈·여자라는 것은 상식이나, 남자의 낭만이란 출세·돈·여자로부터 등을 돌린 삶일 것이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소설·영화·텔레비전 드라마에 나오는 여자들은 언제나 ‘남자의 낭만’에 열중하는 남자들에게 헌신적일 뿐 아니라 그 ‘남자의 낭만’에 파멸 당하는 것마저 서슴지 않는다. 반면 여성의 경우 ‘남성의 낭만’과 똑같은 것을 완벽히 추구하면 할수록 남자들에게는 물론이고 여자들에게도 공감 받지 못하는 종류가 되어 버린다. 그런 증거로 “이런 종류의 여자들의 낭만은 남자들의 낭만에 비해서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 하다못해 삼류소설에서조차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자들에겐 남자들이 추구하는 낭만이 불가능하다거나, 여자들에게 낭만이 있다면 남자들이 추구하는 그것보다 저열할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여자들의 낭만은 남자들의 낭만처럼 간단히 정의할 수 없을 뿐이다. 그러면서 시오노 나나미가 드는 것은 ‘자식’이다. 남자들은 자신의 낭만을 위해 자식마저 버릴 수 있지만, 여자는 “자식이 없으면 죽게 되든지 자식이 있으면 있는 대로 생가지가 잘려나가는 아픔”을 항상 겪게 된다. “남자든 자식이든 인간에 대한 애정”을 도저히 끊을 수 없는 게 여자의 본질이라서, 도저히 여자는 ‘남자의 낭만’을 누릴 수 없다. 그래서 시오노 나나미의 결론은?: “이런 불평등은 절대로 용서될 수 없다. 남자의 낭만이란 단호하게 추방되어야 한다. 남자의 낭만을 그린 소설도 읽을 필요가 없고, 그런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도 볼 필요가 없다. 이런 것에 돈을 쓰는 여자가 많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화가 치민다.”
다음은 「젊은이에게 고함」. 어른들 중에는 세대의 단절을 메우기 위해 젊은이와의 대화의 장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저자는 달리 생각한다: “젊은이들은 그런 나약한 충고를 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당당히 어른 세대와의 단절을 충분히 음미해야만 한다. 그것을 감수한 젊은이들이야말로 평범한 어른과는 달리 자신을 가질 수 있는 그 어떤 것을 획득한 진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젊은이들 편인 척하는 어른들은 첫째 “젊은이들의 향연, 젊은이들의 축제”와 같은 광고를 내는 어른들이다. 다시 말해 이들은 장삿속으로 젊은이들의 편인 척 아첨을 떠는 것이다. 맥주나 화장품 등속을 대놓고 팔지는 않지만, 신문이나 텔레비전에 나와서 젊은이들의 편인 척하는 지식인 나부랭이들도 장삿속이긴 마찬가지다. 이들이 젊은이들에게 매번 동조하는 것은 그런 태도가 ‘젊고, 열린 태도’의 소유자인 양 꾸며주기 때문이다. 위의 두 부류보다 더 곤란한 존재들이 진심으로 젊은이들의 편이길 원하고 그들을 이해하고 있다고 정말로 생각하는 어른들이다. “자기야말로 젊은이들의 성장에 필요불가결한 존재”라고 믿는 이런 확신범들이야말로 단단히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시오노 나나미는 “젊은이들은 세대 간의 단절이야말로 쌍방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하고 이런 별 볼일 없는 어른들도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필요한 것은 ‘대화의 장’이 아니라 ‘대결의 장’이라고 말한다: “세대의 단절이야말로 서로 간에 많은 결실을 맺을 수 있다고 해서 어른들과의 대화를 완전히 끊어도 좋은가 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으나 방법에 따라서는 하는 편이 좋을 때도 있다. 그 방법이란 대화가 아니라 대결이라면 더 좋겠다는 말이다 (…) 그런데 그대의 ‘무기’란 감성적인 것이 아니라 이성적인 것이다. 감성적인 것은 개개인마다 다른 것으로, 어른은 어른의 감성이 있고 젊은이들은 젊은이들의 있기 때문이다. 감성적인 것이 공통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세대 간의 공통이라기보다는 개개 인간들의 공통점이라고 하는 편이 자연스럽고 유익할 것이다. 남은 것은 이성적인 것밖에 없다. 세대간의 대결은 당당히 논리의 대결로 행해져야 할 것이다.”
다음은 「인텔리 남자는 왜 매력이 없나」. 인텔리는 우선 머리를 쓰는 지적 직업을 가졌고, 요즘엔 체위도 향상되어 육체적으로도 어느 선까지는 갈 뿐 아니라 옷 잘 입는 멋쟁이들도 많다. 그리고 경제력도 그렇게 궁벽하진 않다. 이게 현대 인텔리들의 세 가지 특징이다. 그런데 이들에게 당최 매력이 없는 것은 왜일까? 시오노 나나미가 꼽는 인텔리의 나머지 특징에 답이 있다.
현대 인텔리들의 넷째 특징은 “얼마나 써대고 지껄여대든, 자기 자신의 생각”보다는 “해설”이 주업이다. 그러나 그것도 “비학문적인 것을 언뜻 학문적으로 정리”한 ‘썰’에 불과하다. 이들은 심하게 말해 “자신의 소견이 없는 것이야말로 학문적”이라고 믿는 해설쟁이들일 뿐이다. 인텔리의 다섯째 특징은 “수라장을 거쳐오지 않은 약함”이다. 수라장은 “인간이 사는 곳”인데 늘 머릿속에서만 생각을 처리하는 것에 익숙한 인텔리들은 “상대방의 체험에 근거한 생각에 부딪히면” 곧바로 허점을 보인다. 그래서 글이나 말에 박력과 힘이 없다. 이들의 여섯째 특징은 “사람을 죽인 경험이 없는 것”이다. 이 말은 실제의 살인 행위를 뜻하는 게 아니라 “정신적으로 죽이는 것”을 말한다. “신은 고약하게도 무엇인가를 해보려는 자에게 그것을 표현하려는 단계에서 이런 종류의 ‘살인 행위’를 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인간세상을 만드신 모양이다. 이 세계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살생 행위에서는 가장 먼 곳에 살고 있다. 인텔리 남자가 섹시하지 않은 것은 독도 약도 되지 못하는 그들 특유의 사고방식에 그 이유가 있음이 틀림없다.” 인텔리 남자의 마지막 특성은 “조그만 야심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러니 “정치가가 뭐라 부추기면 창피할 정도로 홀랑 넘어간다. 실업계의 어느 위인이 접대해 준다면 기생보다 먼저 뛰어가는 판이다. 기생은 화대라도 받으나 인텔리는 하루 저녁을 얻어먹을 뿐인 것을 이보다 궁상스런 행위가 있을까. 무언가 자기 맘의 것을 표현하고 싶은 것이 있어 그것을 하기에 권력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상관없다. 회색이든 검정이든 권력을 이용한다면 그것은 개의치 않겠다. 그러나 이용되는 것에 만족하고 있다면 그건 그저 봐주기 힘든 꼴불견이란 말이다.”
인텔리 남자가 왜 매력이 없는지에 대한 결론은 이렇다. 남자나 여자나 이성이 서로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은 상대를 안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이다. 이럴 때, “머릿속에 든 것이나 용모도 이런 종류의 건전한 욕망을 보강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요컨대 인간 본성에 가장 충실한 욕망을 자극하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진 “매력”이다. “인텔리 남자가 섹시하지 않은 것은 보강하는 정도밖에 안 되는 것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자의 매력은 어떤 것일까? 궁금한 사람들은 「남자의 매력에 대하여」란 제하로 씌어진 세 꼭지의 글과, 바로 뒤에 붙은 「매력 없는 남자에 대한 고찰」에서 약간의 자극을 받을 수 있겠다.
혼자 힘으로 성공한 여자가 다 그렇듯이 시오노 나나미가 페미니스트가 아닌 건 분명하고, 그녀에게 좌파는 희화화의 대상이다. 그녀가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 가운데 하나는 ‘머리가 좋고, 나쁘고’이다. 그녀에겐 입버릇처럼 된 이 말이, 나 같은 보통 사람에겐 꽤나 신경이 쓰인다. 아둔한 독자의 자격지심을 헤아려 주려는 듯, 그녀는 아예 「머리 좋은 남자에게 건배!」라는 꼭지까지 써 놓았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머리 좋은 남자’란 무엇이든 제 스스로 생각하고, 그것에 의해 판단하고, 그 때문에 편견을 갖지 않고, 무슨 무슨 주의 주장에 파묻힌 사람에 비해 유연성이 있고, 더욱이 예리하고 통찰력을 가진 남자다.” 머리 좋은 게 IQ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그나마 위안이 되지만, 글쎄, 제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매, 특정한 주의 주장에 파묻히지 않은 채 유연하고 예리한 통찰력을 발휘할 수 있는 범주에 들기란 또 얼마나 쉽지 않은 노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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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