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7일
어제 쓴 독후감을, 모 신문의 연재 분량에 맞게 다시 고치다: 1995년 3월 20일, 교주 아사하라 쇼코의 지령을 받은 일단의 옴진리교 신도들이 도쿄 지하철에 동시다발적으로 사린 가스를 투척했다. 이 사건은 3800여 명의 공식적인 피해자와 11명의 사망자를 냈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사건이 발생한 지 약 1년 후부터, 사망자 유족을 포함한 사건의 피해자 60여 명을 인터뷰하기 시작했다. 그게 『언더그라운드』다.
대담을 마친 하루키는 이 책의 말미에 옴진리교 사건에 대한 나름의 보고서를 쓰는데, 여기서 그는 두 가지를 말한다. 먼저, 개인의 자율성은 본래 사회라는 타율성과 교섭하면서 형성된다는 것.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사회와의 교섭이나 사회의 반영 없이 자율적인 자아를 만들어 버린다. 그럴 때, 사회적 논리와 개인 사이에 갖은 알력이 발생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옴진리교의 교주 아사하라 쇼코가 그런 인물이다.
앞선 사항은, 흔히 우리가 ‘쟤는 사회화가 덜 됐어’라고 지적하곤 하는 것을 되풀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재미난 것은 하루키가 강조하는 두 번째 사항이다. 그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자신의 자아를 이용해,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여기서 이야기란 ‘나는 어떠어떠하게 살고 싶어’라거나 ‘내가 이루고 싶은 꿈’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두 개의 나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즉 ‘현실적인 나’와 ‘꿈을 꾸는 나’. 이걸 풀어보면 이렇다. ‘비록 지금은 호텔의 화장실 청소부지만(현실적인 나), 언젠가는 이 호텔의 사장과 결혼하고야 말겠어(꿈을 꾸는 나)’. 바로 이게 이야기다. 누구는 좀 더 명료히 의식하고, 누구는 그렇지 못할 뿐, 누구나 나만의 이야기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제도에 세뇌당하고 현실에 포박된 현대인들 가운데는 자신만의 고유한 자아를 형성하지 못한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당연히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 수 없다. 하루키의 표현에 따르면 그건 엔진(자아) 없이 차(이야기)를 만들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처럼 고유한 자아가 없는 때문에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자아를 양도하게 되며, 자신의 자아를 양도한 그 누군가의 이야기를 자동기술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옴진리교의 신도들은 고유한 자아와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한 상태에서, 흠집 많은 자아의 소유자인 아사하라 쇼코에게 자신을 송두리째 위탁해버렸다. 하자 많은 거푸집 속에 구겨 넣어진 양도된 자아(신도)들이 만들어낸 비극이, 바로 『언더그라운드』의 내용이다.
12월 19일
아룬다티 로이의 『생존의 비용』을 읽다. - 이 작은 책엔 두 편의 정치적 에세이가 실려 있다. 인도 정부가 나르마다 강에 건설하려는 사르다르 사로바르 댐을 반대하는 「공공의 더 큰 이익」과, 인도의 핵실험과 핵보유를 비판하는「상상력의 종말」.
어느 나라에서 건설되든 댐은 ‘국가적 이익’과 ‘지역적 고통’을 맞바꾸는 원리로 진행된다.
그런데 「공공의 더 큰 이익」을 읽고 나면, 그런 폭력적인 거래가 한 나라 정부와 지역민 사이의 불균형한 역학을 훨씬 뛰어넘는, 더 큰 판에서 이루어지는 부등한 거래라는 것을 알게 된다. 제3세계에서 이루어지는 댐 건설은, 댐 건설 사업이 어려움에 처해 있고 사양길로 접어든 서양의 사업가와 자본가들이 찾아낸 활로이다. 그들은 제3세계에 재래식 무기와 금지된 농약 또는 약품을 팔듯이, 개발 원조라는 이름으로 댐 건설을 수출한다.
1999년에 출간된 이 책은, 국제 댐 산업 시장의 규모가 매년 200억 달러에 달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전 세계에서 건설되거나 계획되고 있는 큰 댐들의 자취를 따라가 보면 어디서나 똑같은 배우를 만나게 된다고 한다. 바로 ‘철의 삼각‘이라고 불리는 정치가?관료?댐 건설 회사들이 그들인데, 이들 ‘철의 삼각’을 지원하는 최대의 이웃이 세계은행이다. 차관을 빌려주고 이익을 얻는 세계은행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온갖 곡예와 여론 조작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것은 아마도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미국 시민들이 천안문 광장의 대학살에 항의하는 와중에도 세계은행은 130만 명을 이주시킬 중국의 싼사(三峽) 댐을 짓기 위한 연구를 지원하는 데 돈을 썼다. 세계은행은 오늘날 중국의 큰 댐들을 지원하는 가장 큰 해외 투자자이다.”
국제 환경 컨설턴트라고 불리는 무법자들은 댐 건설자들의 하수인들이다. 그들은 보통 댐 건설 회사나 그들의 자회사가 직접 고용한 이들로, 그들은 정부로부터 요청받은 환경 영향 평가서를 절대로 댐 건설에 불리한 쪽으로 쓰지 않는다: “개발 사업에서 게임의 규칙은 매우 간단하다. 큰 댐의 개발 계획에 대한 환경 영향 평가서를 작성하도록 정부로부터 요청을 받은 컨설턴트가 유용한 물의 양을 트집 잡거나 당치도 않게 사람과 관련된 비용이 너무 클 것 같다는 따위의 문제점을 지적한다면 그는 업계에서 매장당한다.”
인도는 세계 제3위의 댐 건설국이다. 지난 50년간 3,600개의 댐을 지었으니, 한 댐당 최소 1만 명의 수몰민이 발생했다고 쳐도 3,500만 명의 이주민이 생긴 셈이다. 쥐꼬리만 한 이주 보상금을 받고 도시로 흘러들어간 이들은 빈민이 되거나 품팔이가 된다. 중앙 관개 시스템(댐)을 만들면, 그 주위의 주민들은 농수를 돈 주고 사거나, 세금을 내고 고기를 잡아야 한다. 결국 댐 건설로 이익을 얻는 자는 정부와 결탁한 사업가와 지주들이다: “큰 댐들은 정부가 얼마나 많은 물을 어떤 방식으로 배분하는가를 결정하기 위한 명분 축적의 방법일 뿐이다. 큰 댐은 농부의 지혜를 그들로부터 앗아가 버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물과 땅, 그리고 관개 시설을 빼앗아 부자들에게 선물하는 파렴치한 수단이다. 댐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땅을 떠나야 하고 그들은 집 없고 가난한 채로 버려진다.” 댐 건설로 피해를 당하는 것은 강을 터전으로 살아온 주민들뿐 아니라, 생태계의 파괴와 환경을 맞아야 할 모든 사람들이다. 대규모 관개 시스템(댐)보다 지역적인 관개 시스템에 치중하는 게 환경과 지역민을 살리는 방법이고, 그게 돈도 적게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발을 밀어붙이는 인도 정부를 행해 아룬다티 로이는 이렇게 말한다: “권력은, 겉보기에는 자유로운 국민이 직접 선출한 대표들에 의해 행사되고 있다. 그러나 인류 문명사의 어느 다른 세기에 어떤 군주, 어떤 폭군, 어떤 독재자도 이처럼 어마어마한 무기를 손에 넣었던 적은 없다.” 민주주의는 싸우는 자들에 의해서만, 제 길을 찾는다는 얘기.
1998년 5월, 인도는 핵실험을 마치고 핵보유국을 선언했다. 「상상력의 종말」은 신랄한 재치로 무장하고, 핵무기의 전쟁 억지력과 인도 민족주의의 허울을 벗긴다. 냉전을 거쳐 온 20세기 사람들은, 핵무기의 전쟁 억지력을 신앙처럼 믿는다. 진정 그 말이 옳다면, 더 많은 나라들이 핵무기를 갖도록 권장하는 게 논리에 맞다. 하지만 아무도 그런 논리를 지지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핵무기의 전쟁 억지력은 괴변이다. 그러므로 핵무기를 갖고자 하는 국가적 욕망에는 다른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인도의 경우를 살펴보기 전에, 두 가지 사항을 우선 점검한다. 하나는 핵무기가 생기고부터 생겨난 ‘전쟁에 대한 이중기준’ 문제. 강대국들이 지구를 몇 번이나 파괴할 수 있는 핵무기를 갖추게 되는 것과 아울러, 우리는 전쟁에 대한 이상한 이중기준을 갖게 된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즉 핵전쟁만이 ‘진짜’ 전쟁이고, 재래식 무기로 벌이는 전쟁은 ‘진짜’ 전쟁에 미치지 못하는 ‘가짜’ 전쟁이란 이중기준을 암암리에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특히 핵전쟁을 두려워하는 서구인들은 ‘진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일어날 리 없다고 믿으면서, 매일 저강도 전쟁을 치르는 제3세계의 고통에 무감각해진다.
두 번째는 ‘우리가 진정으로 핵무기의 두려움을 알고 있는가?’하는 문제다. 어느 국가도 핵무기를 갖기 전에, 핵무기의 위력이나 핵전쟁의 참상에 대해 국민에게 자세히 알려 주지 않는다. 그나마 우리가 어렴풋이 느끼고 있는 핵에 대한 미약한 공포는 국가가 아니라, 핵을 반대하는 운동가들의 선전과 투쟁을 통해서였다.
인도가 핵무기를 갖게 된 것은, 중국이나 파키스탄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아룬다티 로이는, 인도가 핵무기를 만든 것은 주위에 포진한 가상의 적 때문이 아니라, “진실은 인도가 인위적인 국가”라는 데 있다고 말한다. 인도는 “한 국가라는 자각이 부족하기 때문에 대항할 적을 계속 만들어 우리를 묶어두는 것이 필요”했고, “이것이 우리를 핵폭탄에 이르게 한 길”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힌두 민족주의자들을 향해 묻는다. “‘인도 문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의 문명이 과연 있었는가? 인도가 응집된 문화적 실체였는가?”라고. 그녀에 따르면 간디가 “영국에 대항하는 인도의 독립 전쟁에서 한몫 거들어달라고, 마술 램프를 문질러” 불러 낸 요정이 힌두 민족주의였고, 인디라 간디가 램프의 정령을 “평생 국민”으로 만들었다. 그 후로 램프의 정령은 다시 램프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힌두교 성전인 『베다』에 핵폭탄이 이미 나와 있다고 떠벌리는 사람들과 이슬람 사원 밑에 있는 힌두 사원을 찾는답시고 바브리 마스지드를 파괴했던 사람들은 똑같은 힌두 민족주의자들이다.
파키스탄의 위협이 아니라 인도의 민족주의가 핵폭탄 제조의 원동력이라는 것은, 인도의 남성 지식인들이 핵보유국 선언에 대해 보여준 반응에 잘 나타난다. “신문을 읽다 보면 사람들이 비아그라를 이야기하는지 핵폭탄을 이야기하는지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는 저자의 희화적인 표현이 그것이다. 핵은 ‘강하고, 큰’ 인도 민족주의의 남성적 상징이다. 하지만 핵보유를 함으로써 초강대국 클럽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인도인들의 희망은 “축구공을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월드컵 결승전에 출전하기를 요구하는 것만큼이나 어처구니없는 일”이라고 저자는 꼬집는다. 전체 인구 10억 가운데 4억이 문맹이며, 2억이 물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한 나라는 초강대국이 될 수 없다.
핵무기는 ‘나’와 ‘너’를 구분하지 않는다. 핵은 당신이 힌두교인지 이슬람인지, 인도인인지 파키스탄인인지, 공산주의자인지 자본주의자인지를 가르지 않는다. 핵무기로 무장한 국가의 정부는 ‘우리’와 ‘적’을 나누지만, 핵전쟁은 아무의 편도 들지 않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우리 편’은 누구이고 ‘적’은 누구인가? 양쪽 다 정부일 뿐이다. 정부는 변한다 (…) 의회에서 과반수를 넘길 발판을 만들려고 이리저리 들쑤시고 다니는 처지에 핵폭탄을 가지고 찧고 까불면서 정부를 믿으라고 강변한다.”
사족이다. 이 책을 보면 그녀가 쓴 소설의 제목이 무엇을 가리키는 지 좀 더 확실해진다. ‘작은 것들의 신’이란, 실패한 사람들, 가장 덜 성공한 사람들, 그러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매일 투쟁에 나서는 사람들이다. 그런 뜻에서 아룬다티 로이 자신이 ‘작은 것들의 신’이다. 이 책의 번역 후기 가운데 한 대목은 『작은 것들의 신』이 인도 사회의 보수적인 세력들은 불편하게 했으며, 소설의 말미에 나오는 내용 일부가 외설스럽다는 것을 빌미로 소송을 제기했다는 것을 알려 준다. 그러나 말미에 묘사된 정사 장면은 그 소설에 꼭 필요했을 뿐 아니라, 인간 제도의 누추함을 벗기는 아름다운 정사였다. 인도의 보수 세력이 정말로 참지 못했던 것은 그녀의 소설이 “카스트 제도와 편협한 도덕과 정치에 정면으로 도전”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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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