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5일
『내 생애 단 한 번의 사랑』(연극과 인간, 2008)은 제주도에서 태어나고 자란 제주 출신 극작가 장일홍의 세 번째 희곡집이다. 이번 작품집에 실린 여섯 편을 합쳐 도합 21편이나 되는, 적지 않은 작품을 발표한 작가의 신작 희곡집을 소개하면서 굳이 ‘제주 출신’ 작가라는 군말부터 다는 것은 비례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첫 희곡집인 『붉은 섬』(문학과비평사, 1991)에서부터 지속적으로 제주도의 역사를 극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군말은 군말이 아닌 작가의 전모를 조명하는 열쇠말의 비중을 지닌다.
이번 작품집에 실린 여섯 편은 크게 두 가지 이야기로 대별된다. 하나는 가족의 해체를 다룬 극들로 「우리가 가야 할 머나 먼 길」·「슬픈 유목민」·「내 생애 단 한 번의 사랑」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불멸의 영혼」·「탐라 오디세이」·「민중의 장두 김통정」이 앞서 말한 제주도 역사의 연극적 형상화에 바쳐진 작품들이다.
우리가 보는 것처럼, 이번 작품집의 제목은 가족 해체를 다룬 작품군에서 뽑았으나, 아무래도 이 작품집의 본령은 작가가 거듭해서 천착하고 있는 ‘제주도 역사극’이다. 하지만 그것들을 읽기 전에 먼저 가족 해체를 전면화한 작품부터 읽어보자. 「우리가 가야 할 머나 먼 길」은 대학 시절 존경하던 은사였던 미국인 신부의 권유로 미국 유학을 갔으나 학업 중에 자폐증을 얻은 채 귀국한 남자 주인공과, 그가 미국 박사라는 말에 혹해 결혼한 여자의 피폐한 결혼 생활을 큰 줄기로 한다. 이 작품을 통해 작가는 ‘미국의 꿈’이 허구며, 미국식 애정관과 물질주의의 파탄을 가리켜 보인다.
중석 | (…)이게… 다니엘, 그 개자식이 거품을 물고 칭송하던 미국이냐! 세계의 중심, 문명의 메카, 영광과 찬미의 나라, 자유·평등·박애의 땅, 아메리카! 오, 저주 받을진저! 저주 받을진저!
우리나라 문학에서 미국이 온전히 ‘아름다운 나라’였던 적은 그렇게 흔치 않다. 때문에 위의 인용은 그리 독창적인 진술이 못 된다. 하지만 이 대사는 작가가 사명감을 갖고 쓰고 있는 듯이 여겨지는 제주도 주제의 작품군을 다룰 때, 다시 한번 상기 될 것이다.
「슬픈 유목민」은 입양아 수출국이란 오명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한 우리나라의 해외입양아 실태가 소재다. 미혼모의 아이와 고아들을 외국으로 내쫓았던 한국인들의 가족주의와 혈통주의는, 미국에 유학 간 아들이 사랑하는 입양아 처녀를 데려와 결혼하겠다고 허락을 구할 때도 극구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표제작 「내 생애 단 한 번의 사랑」에는 자신이 낳은 자폐아 아들을 학대하는 한편, 의붓딸을 성폭행하는 아버지가 등장한다. 전직 직업 장교였던 박무성은 길거리에서 추위에 떨며 군밤을 팔던 모녀의 구세주로 자처하며, 모녀에게 폭군처럼 굴다가 자폐아 아들의 총에 죽는다. 어머니는 “짐승을 죽인 거야”라며 아들을 감싸고, 대신 감옥엘 간다. 그리고 자폐아의 의붓누나는 동생을 버리고 홀로 캐나다로 떠난다.
위의 세 작품은 갈등과 절정을 향해 자기 조직하는 극이 어디론가 실종되고, ‘설명’이 번다하다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가 가야 할 머나먼 길」에서 다니엘 신부가 중석의 아내 수미에게 들려주는 비밀이 그런 예에 속한다.
다니엘 | 대학 시절 그는 음대에 다니는 여학생을 짝사랑했소. 그의 성격대로 철저히 그녀에게 몰입했지만 몇 번씩이나 여자로부터 거절을 당하고 나중엔 고발되어 파출소에 끌려가기도 했어요. 결국 여자는 졸업반 때 다른 남자와 결혼을 했는데 불행히도 그녀는 백혈병으로 죽고 말았지요, 입에 담기조차 두려운 말이지만… 미스터 한은 그 여자의 장례식이 있던 날, 무덤을 파헤치고 시체를 능욕했다오.
이런 설명은 이 작품의 인과성으로부터 분명 동떨어져 있는 예외적인 설명이지만, 피치 못할 것이기도 하다. 극이 극적 사건을 자기 조직하지 못하고 자꾸만 끊어질 때, 설명이 나서서 끊어진 극을 대신 메우는 역할을 담당할 수밖에 없을 뿐 아니라, 나아가 극에 없는 긴장을 대신 고조시키기 위해 설명은 자꾸 엽기적으로 발전한다.
제주도의 역사를 극화한 세 작품 역시 ‘설명’이 극을 압도한다. 「불멸의 영혼」의 서두가 김준의 긴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게 그렇다. 하지만 이 경우는 앞선 세 경우와 달리 봐야 한다. 장기간의 역사를 압축해서 보여주거나, 역사적 실증이나 재해석을 통해 모종의 교훈을 추출하려는 목적을 지닌 역사극에서는 ‘설명’이 효율적인 기법이 된다. 장일홍의 ‘제주도 역사극’은 여러 곳에서 서사극적 설명의 기법을 원용하고 있다.
「불멸의 영혼」은 1948년 제주의 4·3 사건 당시 미군의 강경 진압을 저지하고자 했던 고 김익렬 장군(작중의 김준)의 4·3회고록을 근간으로 픽션을 덧붙인 작품이다. 당시 세계의 이목은 한반도에서의 미·소 점령 정책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우월한가에 쏠려 있었고, 미국은 소련과 공산주의자들의 악선전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 4·3항쟁에 가담한 제주 도민을 아예 공산주의자들에게 매수된 빨치산으로 규정하고자 했다. 김익렬 중령은 초토작전을 실행하라는 미군의 요청을 뿌리치고 항쟁군과 평화협정을 추진하다가 경질됐다.
김준 | 나에게 초토작전을 감행하라는 건 내 민족을 배반하라는 것과 같습니다.
정치고문 | 임무를 완료한 후, 국민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코리아에서 살기 어렵게 되면 당신의 가족을 데리고 미국에 이민 가서 살도록 해 주겠소.
김준 | 이민이라고요? 난 내 나라를 떠나 미국으로 갈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정치고문 | 잘 생각해 보시오. 미국은 황금만 있으면 모든 행복을 다 누릴 수 있는 곳이라오. (미국 잡지를 꺼내 보여 주면서) 좀 보시오.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말이 괜히 생겨난 게 아니오. 미국이 당신의 꿈을 실현시켜 줄 거요.
미군 정치고문의 회유에 대한 김준의 대답을 우리는 이미 들은 바 있다. 바로 「우리가 가야 할 머나 먼 길」을 언급할 때, 인용했던 중석의 대사가 그것이다. 이런 독법으로 본다면, 대별되어 보이는 장일홍의 두 작품이 하나로 종합될 여지도 없지 않다.
또 다른 ‘제주도 역사극’인 「민중의 장령 김통정」은 제주도까지 쫓겨 온 삼별초와 육지 관원들의 가렴주구에 시달린 탐라인들이 연합해서 여몽연합군과 싸웠던 역사를 극화했고, 「탐라 오디세이」는 제주도가 육지(모라)의 식민지가 되기 이전 독립국을 이루고 번성했다던 탐라국의 기원을 들춘다.
김진사 | 탐라의 시조는 삼성혈이라고 하는 땅의 구멍에서 나왔고 모라의 시조는 하늘에서 내려왔지. 우리와 저들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는 거야.
설문대 | 저들은 모라가 차지한 중원의 대륙은 세계의 중심이며, 꿈과 희망과 동경의 피안이라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김진사 | 이 섬은 대륙보다 더 먼저 생긴 땅이야. 탐라야말로 인류문명의 기원이며 하늘의 고향이다. 낙원을 먼 곳에서 찾지 말아라. 너희들 발 딛고 서 있는 이 땅이 낙원이니라.
설문대 | 그래서 스승님은 탐라국의 재건, 이어도를 말씀하신 겁니까?
김진사 | 섬 무지렁이들은 현세의 고통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죽어서 찾아가는 영혼의 안식처로 이어도를 상상하며 고통을 잊으려고 했지.
설문대 | 죽어서 영혼이 찾아가는 이어도가 무슨 소용입니까? 살아서 복락을 누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김진사 | 그렇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을 이어도로 만들어야 해. 도둑과 거지와 대문이 없는 세상, 그야말로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장일홍의 작품에는 두 겹의 내부와 외세가 있다. 즉 섬의 입장에서 보면 고려시대부터 제주도를 수탈한 모든 내륙 정부는 외세이다(4·3의 원인이 된 서북청년단과 대동청년단도 외세다). 그러나 더 큰 외세를 상대로 할 때는 한반도가 곧 제주도가 된다. 이런 상대성이 얼핏 드러난 데가 「불멸의 영혼」의 다음 구절이다.
조기자 | 광주의 5·18과 제주의 4·3은 무관하지 않다는 거죠. 만약에 4·3이 일어난 후, 가해자의 책임 소재를 명백히 가려내어 그 천인공노할 만행을 준엄하게 심판했더라면 5·18과 같은 야만의 역사는 되풀이되지 않았을 거예요. 반성 없는 역사는 반복된다는 게 역사의 교훈이거든요. 말하자면 4·3과 5·18은 피비린내나는 야만의 역사가 낳은 쌍생아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니까 4·3은 제주도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문제, 더 나아가서는 인류의 문제라는 거죠.
현재 제주도는 해군기지 건설 문제로 주민 간의 갈등이 격화되고 있다. 누가 「탐라 오디세이」에 나오는 설문대고 고종달일지는, 제주도 삼신할망이 아실 것이다.
12월 16일
무라카미 하루키의 『언더그라운드』(열림원, 1998)를 읽다. - 이 책의 의의에 대해서는 아룬다티 로이의 『작은 것들의 신』에 잠시 언급했다. 거기에 역자의 재미난 ‘옮긴이의 말’을 보탠다: “지금까지 한국에 소개된 무라카미의 소설을 읽은 독자라면, 『언더그라운드』를 읽고 놀랐을 것이다. 우선 전혀 재미가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은 이야기가 반복되는 것 같다. 그리고 무라카미가 사회적인 문제에 이렇게 관심을 가지고 르포를 쓰다니, 하고 의외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1995년 3월 20일, 교주 아사하라 쇼코의 지령을 받은 일단의 옴진리교 행동대원들이 도쿄 지하철에 동시다발적으로 사린 가스를 투척했다. 이 사건은 3,800여 명의 공식적인 피해자와 11명의 사망자를 냈다. 『언더그라운드』는 하루키가 사망자 유족을 포함한 사건의 피해자 60여 명을 인터뷰한 것이다. 그런데 많은 대담집이 그렇듯이, 6백여 쪽이 넘는 이 두툼한 책을 읽다 보면, 살짝 지루해진다. 더욱이 이 책처럼, 60여 명의 희생자들이 하나의 사건에 대해 거의 비슷한 체험을 되풀이한다면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역자도 “우선 전혀 재미가 없다”고 말한 것이겠지만, 읽어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반복되는 인터뷰 읽다 보면 돌발 상황에 노출된 현대인들의 공통된 대응이랄까, 인식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지하철 객실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고 또 출근길의 사람들이 평소와 달리 재채기를 하거나 군데군데 쓰러져 있더라도, 현대인들은 그걸 어떤 ‘사건’과 연관할 능력이 없다.
도시 전체가 ‘디즈니 월드’화된, 위험(모험)이 제거된 문명 도시에서는, 테러와 같은 돌발적인 ‘사건’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말끔히 소거되어 있다. 그래서 사린 가스 중독 현상인 동공협착(주위가 어두워 보이고, 눈물이 흐른다)과 고열, 탈진현상이 본인에게 나타나도, 그저 ‘어제 운동을 너무 많이 해서’라거나 ‘며칠 전부터 과로 해서’ 생긴 현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어떤 돌발 사건도 자신의 일상 혹은 톱니바퀴처럼 분주한 일과 속에 축소되어 버리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시스템의 구조적 패배”란 그런 것이 아닐까?
책 말미에는 대담을 마친 하루키가 옴진리교 사건에 대한 한편의 종합적인 보고서를 쓰고 있다. 이 글에서 하루키는 두 가지를 말한다. 개인의 자율성은 본래 사회라는 타율성과 교섭하면서 형성된다는 것. 그런 교섭 끝에 생긴 생겨나는 것이 ‘자아의 객체화’다(‘객체화된 자아’).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전자(나)와 후자(사회) 간의 교섭이나, 후자의 반영 없이 곧바로 전자를 만들어 가는 사람도 있다. 입문 의식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런 자아 발달 단계를 무시하거나 생략한 채 곧바로 “‘자율적 파워 프로세스’라는 거친 논리로 넘어서려 할 때, 사회적 논리와 개인 사이에 물리적(법률적) 알력이 발생”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옴진리교의 교주 아사하라 쇼코가 그런 인물이다.
앞서 말한 사항은 그리 새로운 게 아니다. 자신만을 앞세우는 ‘트러블 메이커’를 가리켜 우리는 흔히 ‘쟤는 사회화가 덜 됐어’라고 말하곤 하니까 말이다. 재미난 것은 하루키가 강조하는 두 번째 사항이다. 그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자신의 자아를 이용해 자신 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자신의 자아가 만들어낸 자기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 못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자아가 만들어낸 타인의 이야기에 자신을 위탁하게 된다.
하루키의 이야기에 대한 설명을 더 들어보자: “이야기는 그냥 하나의 이야기다. ‘이야기’는 논리도 윤리도 철학도 아니다. 그것은 당신이 꾸고 있는 꿈이다. 당신은 혹시 느끼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당신은 숨을 쉬는 것처럼 끊임없이 ‘이야기’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이야기란 한마디로 ‘나는 어떠어떠하게 살고 싶어(살거야)’라거나 ‘내가 이루고 싶은 꿈(희망)’을 일컫는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두 개의 ‘나’를 가지고 있다. 즉 ‘현실적인 나’와 ‘꿈을 꾸는 나’. 이걸 풀어보면 이렇다. ‘비록 지금은 호텔의 화장실 청소부지만(현실적인 나), 언젠가는 이 호텔의 사장과 결혼하고야 말겠어(꿈을 꾸는 나). 바로 이게 이야기다. 어떤 사람은 좀 더 명료히 의식하고, 또 어떤 사람은 무의식으로 밖에 느끼지 못하는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나만의 이야기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고유한 자아를 가지지 못할 때 당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없다.” 하루키의 표현에 따르면, 그건 엔진(자아)없이 차(이야기)를 만들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처럼 고유한 자아가 없는 때문에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자아를 양도”한다. 그리고 자신의 자아를 양도한 그 누군가로부터 새로운 이야기를 받아들인다.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과정일지 모르겠다. 당신의 자아가 일단 타자의 자아에 동화되어버리면 당신의 이야기도 타자의 자아가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문맥에 동화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옴진리교의 신도들은 고유한 자아와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한 상태에서, 흠집 많은 ‘자율적 파워 프로세스’의 소유자인 아사하라 쇼코에게 자신의 자아와 이야기를 위탁해버렸다. 이때 자신을 양도한 사람들은, 자신을 떠맡은 피양도자의 이야기가 아무리 조악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조악하면 조악할수록 더 좋다: “주어진 이야기는 하나의 ‘기호’처럼 단순할수록 좋다. 그걸로 충분하다. 전쟁에서 병사들에게 수여하는 훈장이 순금이 아니어도 좋은 것과 마찬가지다. 훈장은 그것이 ‘훈장이다’라는 공통 인식에 지탱대고 있는 한 충분히 존재 이유가 있으므로 싸구려 동으로 만들어져도 아무 상관없는 것이다.” 하자 많은 거푸집 속에 구겨 넣어진 양도된 자아(신도)들이 만들어낸 비극이 바로 『언더그라운드』의 내용이다.
사족1: 일본에서는 신흥종교를 ‘신종교’와 ‘신신종교’로 구분한다. 1950년대 이후부터 창시된 종교를 폭넓게 신흥종교라고 하지만, 가난과 질병의 극복이 주 입신동기가 되는 종교는 ‘신종교’에, 풍요로움 속의 허무와 고독 때문에 입신하게 되는 종교를 ‘신신종교’라고 한다. 옴진리교는 후자라고 할 수 있다.
사족2: 하루키가 옴진리교에 의한 도쿄 지하철 사린 가스 사건을 보고 느낀 압도적인 감정은 ‘말에 대한 무력감’과 ‘말이 가진 가치’에 대한 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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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