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0일
나는 지난주 화요일, 모 지면에 피터 페리클레스 트리포나스의 『움베르토 에코와 축구』(이제이북스, 2003)에 대한 독후감을 썼다. 그 글을 쓰면서 베이징 올림픽이 무르익고 있는 이때에, 이런 독후감을 쓰는 건 “부담”스러우며, “이 글은 본전을 찾기 힘들다”고 서두를 뗐다. 원고를 송고하고 비겁함과 무력감에 시달렸다. ‘올림픽 광풍’을 혐오하고자 나는 에코라는 권위에 매달렸다. 그리고 글쟁이가 크게 손해 보는 글을 쓰면 쓸수록, 사회가 조금, 아주 조금 이득을 본다는 상상도 해 보면 안 되나? 워낙 이름 석 자에 호구가 걸려 있는 터라, 나는 그걸 못했다.
기호학자며 소설가인 움베르토 에코는 우리가 눈여겨보지 않은 사이에 유럽의 축구문화를 조롱하는 여러 편의 에세이를 썼던 모양이다. 이 책은 단번에 외우기가 힘든 긴 이름을 가진 영국의 문화비평가가 그 글들을 모아 에코의 반反 스포츠론을 완벽히 다듬어낸 일종의 ‘오마주 북’이다.
인간은 ‘놀이’하는 존재다. 하여 에코는 스포츠 자체를 부인하진 않는 대신 이렇게 묻는다. 만약 당신 주위에 섹스는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이 하는 섹스를 구경하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씩 암스테르담(사창가)에 가는 사람이 있다면 과연 정상이라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런 사람을 뭐라 부를지 잘 안다.
마찬가지로 자기 신체를 사용한 ‘놀이(운동)’는 전혀 하지 않으면서, 스포츠 관람에만 넋을 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역시 관음증 환자다. 에코의 말로,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상대편에 대한 야유와 욕설은 놀이를 잃어버린 관객들이 생생한 체험을 보상 받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하며, 피를 보고야 마는 훌리건의 난동은 경기 시간 동안 자기 신체를 선수들에게 빼앗겼던 청년들의 슬픈 마스터베이션이다. 비약하면, 세계가 놀란 한국인의 응원문화 또한 우리 젊은이들이 그만큼 자기 향락이 무엇인지 모르며, 실제 스포츠로부터 유리되어 있다는 증거다.
스포츠가 개인의 건강과 육체를 향상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면, 관음화된 현대의 스포츠는 그 정의에 맞지 않는다. 역설적이게도 육체가 제거된 관음화된 스포츠는 구경꾼을 잡담가로 타락시킨다. 그들은 장관들이 하는 일을 판단하는 대신 축구 감독에 대해 논의하며, 의회 기록을 검토하는 대신 선수의 기록을 복기한다. 또 새로운 정책이나 법령의 잘잘못을 따지는 대신 어제 벌어진 승부를 분석하는 데 시간을 허비한다. 그러면서 마치 중요한 민주적 토론에 참여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어떻게 보면 직업화된 스포츠 경기란 사익에 충실한 극히 개인적인 활동임이 분명한데도, 스포츠 잡담가들은 그걸 국력과 연관지으며 공적公的인 화제인 양 기만한다. 그러는 사이 현실의 부조리는 암처럼 커간다. 올림픽이 시작되고 대통령의 지지율이 30%에 육박한 이유다. 사족이다. 올림픽이나 월드컵 때면, 사변적이고 나약한 ‘먹물’이라는 기왕의 이미지를 이 기회에 씻겠다는 듯, 문인文人들은 참 오지게도 도착적인 스포츠를 예찬하고 스타를 ‘빨아’준다(여기 그 매문가들의 이름과 칼럼을 다 열거하진 않겠다). 그래, 자신의 별 볼일 없는 유명세를 부풀릴 이 절호의 기회를 어쩌자고 놓치랴?
8월 24일
올해 2월의 설 연휴는 징검다리 휴가를 잘 이용하기만 하면 최장 9일까지 휴가가 가능했고, 노동절과 어린이날·부처님오신날이 이어졌던 5월 역시 연월차를 잘 활용할 경우 최소 5일에서 최대 12일까지 황금연휴가 가능했다. 기억이 희미하거나, 믿기지 않는 분들은 바로 달력을 펴 보시면 안다. 그러면 질문이다. 바로 그 황금연휴에 톡톡히 매상을 올린 데는 어디였을까? 해외로 나가는 비행기표는 일찌감치 동이 났다니, 당신은 다른 답을 찾아야 한다.
좀 의외이지만, 올해 2월과 5월에 있었던 두 차례의 황금연휴에 문전성시를 이룬 업소는 성형외과였다. 많은 직장인들이 회복기간이 충분히 보장된 연휴를 이용해 그동안 미뤄왔던 몸매나 얼굴을 고치고자 몇 주 전부터 예약 사태를 벌였던 것이다. 원래 우리나라에서는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氣라는 전통이 오래 있어왔거늘, 어쩌자고 한국은 세계에서도 으뜸가는 ‘성형공화국’이 됐을까?
노엘 샤틀레의 『맞춤육체』(사람과책, 2002)는 성형 열풍이 우리나라만의 것이 아니라고 말해준다. 개성이 최고의 ‘멋’으로 통하는 프랑스에서도 성형은 마치 ‘영양크림’을 바르거나 치과에 가듯이 일반화되어가는 추세다. 이 책의 저자는 성형 시술을 고작 해야 ‘눈가림’이나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기면서도, 성형 열풍을 개인의 나약함이나 현시욕으로 돌리지는 않는다. 성형외과 의사의 메스를 미모나 노화된 주름을 고치는 ‘화장솔’로 여기게 된 까닭은 사회가 “못생긴 사람들, 늙은 사람들을 손가락질하면서 죄책감과 수치의 감정을 품게” 하기 때문이고, 우리가 그런 “편견을 아주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성형이 대중화되었다고는 해도 아직 프랑스는 한국과 달리 대학 졸업생들이 취직을 하기 위해서나 어린 학생들이 연예인이 되기 위해 시술을 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또 성형외과가 돈을 잘 버는 인기 분야이긴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수익을 위해 마구잡이 집도를 하지도 않는다. 많은 경우 프랑스의 성형 외과의들은 심리상담사와 함께 진료를 하고 있으며, 재건성형이 아닌 미용성형은 늘어난 주름이나 못생긴 코의 문제이기 보다, 심리적 문제라고 간주된다.
저자의 사려 깊은 분석에 의하면, 성형 수술의 성공 여부나 불만족에 따른 재수술 여부는 피시술자의 정신적 내상과 연동된다. “성형수술은 오랫동안 품어온 환상적 욕망”을 일시적으로 실행하는 방식이기에 “자기 자신에 대해 무한히 질문하는 정신 분석적인 방식”에 비추면 응급처치에 불과하다. 노엘 샤틀레의 분석이 성형이라는 극히 기술적인 접근에 대한 추상적인 호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마이클 잭슨의 성형 강박은 저자의 논지를 입증하고도 남는다. 아프로-아메리칸의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곧게 펴고, 광대뼈와 턱은 깎고, 피부의 색소를 탈색하여 희게 만들고, 넓적한 코는 가늘고 오똑하게 세운 ‘백인’ 마이클 잭슨은 자신을 ‘신’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그의 성형 강박은 성형이 미의 문제이기보다는 개인의 심리적 외상과, 그것을 만들어낸 한 미국 사회의 합작물이다.
9월 7일
편의점 매장에서 오래 책을 읽고 있다가 점원에게 주의를 받은 70세 노인은 전기톱을 들고 와 “다 잘라 죽여버릴 거야!”라고 소리치다가 경찰에 체포된다. 62세의 또 다른 할아버지는 앙숙이던 이웃집 할머니를 산탄총으로 쏘아 죽이고 놀라 달려온 피해자의 올케에게도 중상을 입힌 다음 자신도 그 총으로 목숨을 끊었다. 뿐 아니다. 17세 난 어느 가출소녀는 세 명의 노인에게 유인된 뒤 4개월 동안 두 차례나 장소를 옮겨가며 성폭행을 당하다가 구출됐다. 세 노인의 나이는 67·68·79세.
위 사건들은 매해 고령자 범죄가 늘어나고 있는 일본에서 벌어졌다. 2005년만 하더라도 범죄 검거자 가운데 65세 이상이 4만 7천여 명에 달했고, 60세 이상으로 나이를 낮추면 그 해에만 무려 7만 5천여 명의 노인이 경찰 신세를 졌다. 원래 폭력은 젊은이들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에 열거된 범죄는 ‘문학적 광증’처럼 보인다. 그만큼 우리는 노인들은 성숙하고 지혜로우며 관용을 지닌 사람들이라고 오랫동안 믿어왔고, 활자나 영화·드라마에서 재생산되는 노인의 이미지는 역시 그 언저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노인이 뉴스가 될 만한 사건을 일으키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도 더 이상 신기한 일이 아니다. 앞서 ‘문학적 광증’이라는 표현이 나왔지만, 실제로 작년 전남 보성에서 있었던 70세 된 오모 노인에 의한 두 건의 해상 살인 사건은 너무 허구적이어서 ‘노인과 바다’라는 헤밍웨이의 소설 제목으로 희화화됐다. ‘40이면 불혹에 들고, 50엔 천명을 알고, 60에는 이치를 깨달으며, 70에는 마음 가는 대로 해도 도에 어긋나지 않았다’는 공자왈식 노인관은 믿지 못하게 된 반면, 요즘 노인들은 확실히 성마르고 사납다.
후지와라 토모미의 『폭주노인(暴走老人)』(좋은책만들기, 2008)은 산업사회에서 정보화 사회로의 급변과 공동체 사회에서 개인화 사회로의 변환이 전통 사회를 살았던 오늘의 노인들에게 고독이란 감정을 강요했고, 새로운 사회 상식에 순응하거나 극복할 수 없는 ‘신노인(新老人)’들의 무기력과 분노가 사회 일탈적인 행위나 폭력으로 터져 나온다고 말한다. 고독은 매우 정적이며 내면을 돌보는 행위이지만, 집단적인 공동사회와 산업사회를 경험했던 그들에겐 낯선 것이다.
늘어나는 노인 범죄에 대한 설명은 고령화 사회에 따른 노인 인구 증가로 설명되기 쉽지만, 이 책의 저자는 그런 안이한 분석보다 신노인을 둘러싼 사회와 주변 환경 변화라는 든든한 착상을 택했다. 소박하고 미진한 느낌도 없지 않지만, ‘시간·공간·마음’이라는 간단한 세 가지 열쇳말로 개인화되고 정보화된 사회로부터 소외된 신노인들의 상황을 포괄적으로 그려낸 점이나, 노인 범죄를 신노인들의 변화한 사회에 대한 ‘둔감’ 탓이 아니라 ‘민감’하기에 내지르는 ‘사회적 경고’와 같다는 결론은 되새길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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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