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일
레몽 장의 『마드모아젤 보바리』(여백, 1998)을 읽다. - 플로베르의 소설 『마담 보바리』의 맨 마지막 줄은, 혼자 남겨진 어린 딸의 처지가 신중히 묘사된다: “모든 것을 팔고나자 12프랑 75쌍띰만 남았다. 이것은 보바리 양을 할머니 집으로 보내는 여비로 쓰였다. 할머니는 그 해에 돌아가셨고, 루오 영감 또한 중풍에 걸려 한 분 남은 숙모가 그녀를 키웠다. 가난했던 숙모는 생계를 꾸리기 위해 그녀를 방직 공장에 보냈다.”
『책 읽어주는 여자』로 알려진 레몽 장은 플로베르가 『마담 보바리』에 남겨 놓은 어린 베르뜨를 주인공으로 『마드모아젤 보바리』를 썼다. 유명 작품의 내용이나 설정을 고치거나, 거기 나오는 주인공이나 주변 인물을 이용해 원작을 다시 쓰는 일이 그리 흔치는 않지만, 『마담 보바리』의 경우는 ‘다시쓰기’ 작품이 꽤 많았다. 알랭 뷔진느가 편집한 『보바리』(이룸, 2005) 51~53쪽엔 다시쓰기를 했던 작품들이 짧게 소개되어 있는데, 레몽 장의 본작도 그 가운데 하나다.
고아가 된 베르뜨는 수도원 공동체의 일원으로 루앙에 있는 방직 공장에서 일한다. 그녀의 어머니가 수녀원 학교에서 연애소설을 탐독하며 다른 현실을 꿈꾸었듯이, 베르뜨 역시 대중소설을 읽으며 “언젠가 그녀의 인생도 다른 변화를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으며 자신의 운명을 감내”한다.
그녀의 스무 번째 생일날 밤, 공장일을 마치고 나올 때 한 청년이 어색하게 다가왔다. 자신을 나폴레옹이라고 소개한 그는 “우리 어렸을 때 함께 놀았잖아, 그치. 기억 안 나?”라고 말하며 베르뜨의 기억을 환기시켰다. 알고 보니 그는 옹빌에서 약국을 했던 약사 오메의 아들이었다(빚 독촉에 쫓긴 보바리는 오메의 약국 조제실에서 비소를 삼켰다). 여기까지 읽으면, 장차 수의사가 될 거라는 나폴레옹과 가난한 고아인 베르뜨 사이에 또 한편의 『레이스 뜨는 여자』가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든다(여기서 말하는 『레이스 뜨는 여자』는 당연 파스칼 레네의 소설을 가리킨다).
그런데 갑자기 “네가 꼭 읽어야 할 책”이라면서, 나폴레옹이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베르뜨에게 준다. 바로 『마담 보바리』다. 아, 그럼. 플로베르가 실제 사건에서 저 이야기를 취채했다는 걸까? 그렇다면 이 대목이 억지스럽지 않다. 바람을 피우기 위해 잔뜩 빚을 진 여자가 궁지에 몰려 자살했던 사건을 플로베르가 듣고 『마담 보바리』를 썼으며, 장성한 딸이 어머니를 소재로 집필된 소설을 읽고 작가를 찾아온다. 뭐, 이상한가? 그런데 나는 아직 플로베르가 실제 사건에서 저 소설의 동기를 빌려 왔다는 소문을 듣지 못했다. 또 그게 사실이라면, 대중소설에 빠져 있던 베르뜨가 여태껏 『마담 보바리』를 읽지 않았다는 설정이 무리다. 그 소설은 누구도 아닌 자기 부모의 얘기가 아닌가?
외면하고자 했던 부모의 얘기를 담은 소설을 밤새 읽은 베르뜨는 자기 가족들만이 알고 있어야 할 얘기를 만천하에 공개한 플로베르에게 부당함을 따지러 간다. 노쇠한 플로베르는 자신의 소설을 군데군데 짚으며, 표현의 과도함을 따지는 스무 살 난 처녀에게 사랑을 느낀다. 노작가는 베르뜨에게 추파를 던지고, 베르뜨는 선선히 그의 유혹에 응한다.
『마담 보바리』가 출간되었을 때, 플로베르는 부도덕이라는 죄명으로 기소되었으나, 무죄선고를 받았다. 『마드모아젤 보바리』의 주인공인 베르뜨는 작중에서 플로베르에게 그 당시의 재판을 연극으로 재현해보자며, 베르뜨는 판사가 되고, 플로베르 집안의 하녀인 펠리시떼는 변호사가 된다. 그리고 검사 역이 모자라자 앵무새에게 그 역을 맡긴다. 이 ‘소설 중의 극’은 몰리에르의 희극처럼, 익살과 혼돈으로 끝난다: “앵무새는 전에 없이 쉰 목소리로 무대 뒤를 향해 소리치기 시작한다. 무죄를 선고한다.”
소설이 다 끝나가는 이 지점까지도, 독자는 작가의 의도를 헤아릴 수 없다. 그저 베르뜨를 만나면서, 작중의 플로베르가 왕성하게 창작에 몰두하는 것을 놀라서 바라볼 뿐이다. 플로베르가 말한다. “더 이상 우상도 없고, 신들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 너와 내가 있을 뿐.”
마지막 장에 가서야 레몽 장은, 좀 야비한 수단으로 우리를 속인다. 베르뜨는 보바리의 딸이 아니라, 그저 소설읽기에 빠져, 자신을 샤를르와 보바리의 딸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게 탄로 나는 것은, 그녀를 저임금 노동자로 부려 먹는 수도회의 감시 직원이 플로베르의 집을 찾아왔을 때다: “저희는 이 아이의 행실에 대해 매우 걱정하고 있습니다. 비록 이번처럼 심각하진 않았지만 그녀가 도망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선생님께서도 현재 퇴폐풍조가 얼마나 곳곳으로 계속 번지고 있는지 잘 아시겠지요. 정말 이래서는 안 되는데…”
베르뜨는 플로베르의 집을 나서며, 옷가지에 『마담 보바리』를 감추고자 했으나, 감독관은 그 책을 보고 “아, 선생님, 이 책은 외설이에요!”라고 말한다. 때맞추어 앵무새도 “외설!”이라고 되뇌면서 소설은 끝난다.
작중의 플로베르는 처음부터 베르뜨의 거짓말을 알고 있었던 걸까? 왜냐하면 그 소설은 원래 사건에서 취재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베르뜨의 거짓말을 금방 간파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베르뜨를 만나면서 창작열이 왕성해진 것은, 소설 쓰기가 가진 ‘보바리즘Bovarysme'의 위력을 베르뜨의 존재로부터 재확인했기 때문일까?
8월 10일
피터 페리클레스 트리포나스의 『움베르토 에코와 축구』(이제이북스, 2003)는 명료하기 이를 데 없지만, 독후감을 쓰는 건 부담스럽다. 이 책은 어제 벌어진 스포츠 경기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주워 삼키는 ‘스포츠 잡담’을 혐오하는 반면, 이 글이 발표되는 시점은 지난 금요일 개막한 베이징 올림픽이 5일째 무르익을 때고, 당연히 ‘스포츠 잡담’이 만발할 시기다. 때문에 이 글은 본전을 찾기 힘들다.
인간은 ‘놀이’하는 존재다. 하여 에코는 스포츠 자체를 부인하진 않는다. 대신 이렇게 묻는다. 만약 당신 주위에 섹스는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이 하는 섹스를 구경하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 씩 암스테르담(사창가)에 가는 사람이 있다면 과연 정상이라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런 사람을 ‘관음증’ 환자라고 부른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신체를 사용한 ‘놀이(운동)’는 전혀 하지 않으면서, 스포츠 관람에만 넋을 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역시 똑같은 환자다. 그럼에도 각종 미디어와 스포츠 산업은 그것을 당연시한다. 에코에 따르면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상대편에 대한 야유와 욕설은 놀이할 신체를 빼앗긴 관객들이 좀 더 생생한 체험을 얻고자 하는 대리충족 욕구 때문에 일어나며, 머리가 깨지고 피가 튀는 훌리건식 난동은 스포츠로부터 소외된 자들의 슬픈 ‘딸딸이'다.
뭐니뭐니해도 스포츠에 대한 잡담은 “정치적 논쟁에 대한 가장 손쉬운 대용품”이다. 당신은 재무부 장관이 하는 일을 판단하는 대신 축구 감독에 대해 논의하며, 의회 기록을 검토하는 대신 선수의 기록을 검토한다. 또 장관들이 수상한 거래나 잘못된 협정을 체결했는지를 추궁하는 대신 어제 벌어진 승부를 분석하는 데 시간을 허비한다. 그러면서 마치 자신에게 신적인 권능이 부여된 듯한 착각에 빠지며, 민주적인 토론에 참여하고 있다고 자족한다.
어떻게 보면 직업화된 스포츠 경기란 사익에 충실한 극히 개인적인 활동에 불과한데도, 스포츠 잡담가들은 그걸 국력과 연관지으며 공적公的인 화제인 양 기만한다. 예를 들어 한일 대표팀 간의 축구경기는 독도와 아무 상관이 없는데도, 한국팀의 승리는 ‘독도를 빼앗으려는 일본에 대한 응징’으로 묘사되고, ‘대첩’이란 표현으로 우리 속에 잠재된 극일 의식을 고무한다.
베이징 올림픽 3일째, 모 통신사는 “금·금·금…모처럼 국민 웃었다”는 기사를 냈지만, 앞으로 한국 선수단이 획득하게 될 매달 수와 상관없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나 독도 영유권 논쟁,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건, 고유가와 고물가에 따른 생활고 등등은 사라지지 않는다. 열정적인 스포츠 잡담가들에게 에코가 달아준 명예스러운 딱지는 “유아론의 최고 정점”, 다시 말해 아직 어른도 아이도 되지 못한 ‘얼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나는 본서와 상관없이,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과 이 글을 쓰는 날 맞붙은 한국과 이탈리아의 축구경기를 보지 않았다. ‘그래, 너 잘났다’고 말할 독자도 계시겠지만, 다시 상기하는 에코의 멋진 비유는 내가 옳았다고 추어준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섹스’를 구경하기보다, 자신의 인생을 즐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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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