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6일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를 사전적 의미의 제국(帝國·Empire)이라고 한다지만, 세계사에서 운위되는 제국은 다른 뜻을 지닌다. 제국이란 권력을 장악한 특정한 문화와 인종이 문화적·인종적으로 전혀 다른 영역에까지 지배권을 행사하는 국가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일제 합병 직전에 존재했던 대한제국은 사전적 의미의 제국일 수는 있어도, 역사적 실체는 없는 그런 제국이다.
에이미 추아의 『제국의 미래』(비아북, 2008)는 인류 최초의 패권 국가였던 페르시아에서부터 로마·당唐·몽골·스페인·네덜란드·영국의 예로부터 제국이 흥하게 된 비결과 망하게 원인을 찾고자 한다. 지은이에 따르면 역사상 존재했던 세계의 초강대국들은 대단히 다원적이고 관용적이었다. 관용은 패권을 장악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핵심적인 요소였으며, 반대로 인종적·종교적·민족적 순수성에 대한 촉구로 시작되는 불관용과 외국인 혐오는 고스란히 제국의 쇠퇴로 이어졌다.
앞서 거론한 제국들은 하나같이 당대의 후진국이거나 변방에 불과했으나 그보다 앞섰던 주변국의 불관용과 외국인 혐오의 덕으로 제국이 될 수 있었다. 즉 한 사회가 지역을 뛰어넘어 전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기술적·군사적·경제적 면에서 세계의 최첨단에 서 있어야만 하는데, 이때 중요한 것은 우수한 인적 자본이며, 세계에 흩어져 있는 우수한 인재를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인종·종교·배경을 따지지 않는 관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미국은 건국 초기부터 종교의 자유와 다민족을 포용하는 이민자 정책을 택했기에 오늘날 같은 초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반면, ‘천년 제국’을 꿈꾸었던 나치 독일은 인종적 증오로 말미암아 자국은 물론이고 인류사에 큰 재앙을 부르고 패망했다. 그렇다면 2001년 9월 11일 이후, 노골적으로 제국을 자임하고 나선 미국은 성공할 수 있을까? 또 유럽연합이나 중국 또는 인도가 과연 제국이 될 수 있을까? 이 책의 11장과 12장이 두 질문에 충분한 답을 내리고 있지만, 여기서는 첫 번째 질문에만 답한다.
사전에서 찾았듯이, 제국이란 먼저 군주가 다스리는 나라여야 한다.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이 다른 국가를 정복하는 제국이 되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민주적인 검열을 통과해야 한다. 관타나모와 아부그라이브 수용소의 포로 학대 사건과 이라크 민간인 살상이 드러나자 이라크전에 대한 미국민의 지지가 순식간에 고갈되었듯이, 민주주의적인 이념과 제국은 서로를 밀쳐낸다. 네오콘이나 광신적인 복음주의자를 제외한 대다수 미국민들은 제국주의를 원하지 않는다. 이 책 『제국의 미래』는 ‘단일 민족’의 환상에 빠져 있는 우리에게 풍요롭고 요긴한 영감을 준다.
6월 19일
무라카미 류와 무라카미 하루키는 우리나라에 꽤 알려진 일본 작가다. 두 사람의 소설을 재미나게 읽었던 때가 어언 15년 전이라서, 무라카미 양씨兩氏를 비교할 기억이 남아있지 않다. 그나마 잔존한 비교점 마저 음악과 관련된 것이다. 하루키는 고교 시절부터 재즈에 심취했고 작가가 되기 이전에는 직접 재즈바를 운영했다. 두 권이나 번역되어있는 하루키의 재즈 에세이는 그가 재즈에 바친 열정의 산물이다. 반면 류는 어느 소설에서 ‘일본에 재즈가 넘쳐나는 것은 미국과의 전쟁에서 졌기 때문이다. 베트남처럼 미국에 이긴 나라에서는 재즈 따위를 듣지 않는다’라고 야유했다.
미국과 전쟁을 하거나 패하지도 않았는데 재즈를 받아들인 나라도 있다. 과장하자면, 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시작된 프랑스인의 열화와 같은 재즈 사랑이 없었다면, 그것은 뉴올리언스 주점 가에서나 울리는 하찮은 미국의 민속음악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류처럼 재즈를 미국 패권주의의 상징으로 여기는 사람은 상처가 많은 사람이다. 미군기지촌에서 미국의 일본 점령을 실감하고, 미군에게 몸을 파는 일본 여성을 보면서 일본 남성의 자부심에 내상을 입었을 류에게 재즈는 듣고 싶은 음악이 아니었을 테다.
요시미 슌야의 『왜 다시 친미냐 반미냐』(산처럼, 2008)는 류의 재미난 언급과 반대로, 재즈는 1920년대부터 일찌감치 일본인의 대중적 감수성을 휘어잡았다는 것을 알려 준다. 또한 이 책은 우리의 상식과 달리, 막말幕末에서부터 메이지 유신의 초기 10년간 일본인의 개화 모델은 영국이나 프랑스보다 미국이었다는 것도 새로 밝혀준다. 일본 지식인들에게 미국은 ‘자유’와 ‘민주’의 모델이었으며, 미국의 대중문화와 소비문화는 대중의 일상생활에 폭넓게 파고들었다. 1929년에 출간된 한 평론집은 “미국적이지 않은 일본이 어디에 있는가. 미국을 떠나서 일본이 존재하는가. 오늘날 일본 역시 미국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닌 게 됐다”고 실토한다.
일본인은 태평양전쟁에 돌입하기 직전부터 귀축미영을 외치면서도, 무의식적으로는 미국을 계속 욕망했다. 이런 태도는 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미국이 일본을 냉철한 관찰의 대상으로 보고 인류학·사회학·역사학을 동원해서 이론적인 연구를 한 것과 상당한 불균형을 이룬다. 일본의 입장에서 미국은 그저 욕망하거나 증오할 수 있을 뿐이었다는 사실은, ‘도깨비나 짐승 같은 미국’이라는 환상적인 표어에 자기 속에 숨어있는 미국에 대한 매료를 함께 매장하는 심리적 은폐로 드러난다. 이처럼 일본과 미국 사이에는 군사·경제적 불균형뿐만 아니라 여러 층의 문화적 불균형이 있었던 것이다. 이 괴리를 극복해야 하는 것은 또한 우리의 과제다.
‘전후 일본의 정치적 무의식’이란 부제를 지닌 이 책은 패전 후 일본에서 줄곧 유지된 ‘친미’ 사대의 기원과, 또 다른 갈래인 ‘반미’ 의식이 일본의 극우 민족주의로 전화하는 대목을 잘 포착하고 있다. 사족이다. 일본의 개항이 페리제독의 함포외교에 굴복했다는 것을 상기하면, 류의 말이 전혀 엉뚱한 것도 아니다.
6월 30일
지난 토요일, 두 번째로 촛불집회에 나갔다. 처음 참석했던 6월 6일로부터 3주가 흘렀지만, 시위대가 얻은 것은 전무하다. 그동안 추가협상을 하러 갔던 한국 측은 미국 정부와 아무런 규정력 없는 논의만 하고 돌아와서 대단한 협상이나 한 듯 사기극을 펼쳤고, 미국의 몇 개 주에서는 대량의 쇠고기 리콜 사태가 터져 나왔다. 그럼에도 정부는 어떤 우려나 대책도 없이 함구하고 있다.
거리 행진을 하는데 고미숙 선생이 눈에 띄어, 인사를 하고 그동안의 안부를 물었다. 몇 해 전에 나와 선생은 대담을 하느라고 딱 한 번 만났었다. 시위가 벌어지는 와중에 선생은 참 ‘문화적’으로 내게 책 한 권을 선사했다. 『이 영화를 보라』(그린비, 2008). 공짜로 신간을 얻게 됐으니 나만큼은 촛불집회에 참석한 보람을 찾은 것인가? 그렇다면 비를 맞아가며 점점 목이 쉬어갈 저 숱한 사람들은?
이 책은 여섯 편의 한국 영화를 교재 삼아 ‘한국의 근대성’을 파고든다. 여러 가지 독법이 있겠지만, 아무래도 본서를 읽게 만드는 동력은 ‘내가 본 영화에 대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라는 관음증적 호기심이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와 목차부터 훑었다. 위생권력과 <괴물>, 민족주의와 <황산벌>, 포르노그라피의 전복성과 <음란서생>, 예술 지상주의의 서글픈 기원과 <서편제>, 가족이라는 환상과 <밀양>, 이질적인 변이가 만들어내는 연대와 <라디오스타>. 이 가운데서 내가 본 건 <서편제>와 <밀양>.
내 협소한 취향과 달리, 이 책에서는 <밀양>처럼 흥행이 되지 않은 영화가 있긴 하지만, 작가주의 풍의 영화가 아니라 애초부터 많은 대중과 소통하려는 목적을 가졌던 영화들을 대상으로 삼는다. 지은이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상품화에 대항하면서 “생의 한가운데”에서 “일상과 네트워킹”하는 것이 예술이지, 미美라는 이상주의를 추구한답시고 평상적 삶과 결별하고 자폐에 빠지는 건 좋은 예술이 못된다. 아니나 다를까, 책에 실린 <서편제>에 관한 분석은 예술 지상주의자들에 관한 통렬한 문서다.
분명 불성실한 일이지만, 내가 본 영화가 두 편밖에 없기에 <밀양>과 <서편제>에 관한 글만 읽고 이 독후감을 쓴다. <서편제>에 대해서는 폴 올리버·막스 해리슨·윌리암 벌캄이 함께 쓴 『가스펠, 블루스, 재즈』를 읽고 쓴 독후감 속에 지나가듯 언급했던 대목이 『장정일의 독서일기』 1권에 실려 있으므로, 여기서는 <밀양>에 대한 내 감상만 약간 보태기로 한다.
신애(전도연)가 장로를 유혹하는 등의 몇몇 장면이 일부 기독교계의 심기를 긁었다지만, 이 영화는 오히려 기독교적이다. 종교개혁을 주동한 프로테스탄트 운동가들은 신자 개개인의 고해성사를 도맡는 신부로부터 교황으로 이어지는 가톨릭의 여러 교계제도를 전근대적인 주술로 여겼다. 프로테스탄트 운동가들에게 진정한 근대적 신앙은, 신과 나의 1대 1 대면과 기도로 완성된다. 하지만 이 영화에 드러나는 한국 기독교의 모습은, 신애가 처음 신앙에 빠져든 심야 기도회는 물론이고 대규모 야외 목회와 신방 풍경이 보여주듯 집단 최면적이고, 종교개혁 이전의 주술이나 마찬가지다.
하늘을 보며 “나 보여?”라고 자주 묻는 신애는, 바로 그런 우리나라 기독교계의 주술로부터 벗어나 자신을 송두리째 내건 신과의 적나라한 대면을 시도한다. 그것이 사투에 다름 아니라는 것은 그녀의 안타까운 정신병원행이 보여주지만, 그런 사투가 생략된 신앙은 앞서 말했듯, 주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가 한국 기독교계에 비판적일 수는 있어도 반기독교적일 수는 없는 것이다.
장로이기도 하신 이명박 대통령이 가끔 하늘을 바라보며 “저 보입니까?”라고 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온갖 생명의 보호자이신 하나님이 무슨 말을 건네시는지 귀 기울여 듣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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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