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3일
『비밀 - 나와 나 사이에 숨겨진 열두 가지 이야기』(행복한책읽기, 2006)를 읽다. - 이 책은 열두 명의 일본 작가가 참여한 소설집이다. 저작권란을 보니 여기 실린 소설들은 한 권의 책이 되기 이전에, <Da Vinci>라는 일본 잡지에서 게재되었던 듯하다. 열두 명의 작가들에게 잡지사가 내준 청탁 요지는, 하나의 비밀로 연결된 두 명의 주인공을 내세워 두 편의 이야기를 쓰되, 그걸 합치면 한 편의 이야기가 되도록 하라는 것. 미술 용어로 하면 데칼코마니일 텐데, 한국어판 편집인은 표지에 옛날의 비닐 레코드Vinyl Record를 도안해 놓고 표4에 이렇게 책을 설명해 놓았다: “레코드의 A면, B면과 같이 하나의 스토리를 두 사람의 다른 주인공의 시점에서 그린 단편 열두 이야기.”
요시다 슈이치의 「부재전표 - OUT SIDE」는 택배사 배달원의 얘기다. 주인이 부재중이라 3일째 허탕을 쳤던 화자는 그 집 근처에 다른 물건을 배달하러 간 김에 4번째 방문을 한다. 유아용 세발자전거가 들어 있음직한 종이 박스를 안고 맨션 입구에 들어선 화자는 또 다른 택배사의 이 구역 담당자를 만나, 함께 엘리베이터를 탄다. 엘리베이터에서 헤어지기 직전에 다른 택배사 직원이 화자에게 “그러고 보니, 벌써 태어났던가?”라고 묻는데, 마침 오늘이 아내의 출산일이어서 “아침부터 내내 안절부절”하고 있다고 대답한다. 3일간 부재중이었던 505호의 벨을 누르자, 서른 살 정도의 남자가 피로에 지친 얼굴로 문을 연다. 남자는 화자가 건네주는 물건을 받으며 “흠, 나카사토 다이키 님인가”라며 코웃음을 쳤는데, 물건을 전달한 뒤 문패를 보니 “‘나가사토 신이치?마유미’라고 쓰여 있을 뿐, ‘다이키’라는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부재전표 - IN SIDE」는 방금 물건을 전달받은 505호 남자가 화자가 된다. 며칠째 한숨도 못 잤기 때문에 억지로 자보려던 때에 벨이 울렸다. “문을 여니, 젊은 남자가 불안정하게 서 있었다. 남자가 안고 있는 종이 박스에는 지난주에 갔던 대형 완구점의 이름이 박혀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고열을 앓던 아이는 자신의 사소한 실수로 4일 전에 죽었다. 수령증에 사인을 하고 문이 닫히는 순간, 배달 기사의 핸드폰 소리가 울렸고 “태, 태어났어? 야호! 야호!” 하는 소리가 들렸고, 505호의 화자가 문밖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아, 그리고 이름말인데”라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 다이키라고 하자. 왠지, 지금 팍 떠올랐어. 유타보다는 역시 다이키야. 사쿠라이 다이키. 좋잖아?”
시노다 세쓰코의 「별장의 개 - A side」는 “길 잃은 개를 맡아두고 있습니다 […] 혹시 개를 잃으신 분이 계시면 5월 4일까지 전화 주세요”라는 종이 포스터의 문구로 시작된다. 화자는 아버지와 함께 휴가를 왔던 어린 소녀. 그녀는 도쿄로 돌아가기 3일 전에, 별장 차고에서 자신에게 안겨오는 덩치 큰 길 잃은 사냥개를 만나 정이 들었다. 도쿄로 데려가고 싶지만 좁은 맨션에서는 키울 수가 없어, 소녀는 주인을 찾는 포스터를 만들어 별장지대에 붙였다. 아버지는 그런 딸을 안타깝게 여기며 “기르던 주인 따위는 안 나타날 거야”라고 미리 주의를 준다. 귀가 일을 하루 더 연장 한 이틀째 아침, 엉겨 붙는 개를 주차장에서 몰아내고 별장의 문을 잠그는 순간,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개 찾는 종이를 봤어요.” 어린 소녀는 아버지에게 안겼다. “역시 버려진 개가 아니잖아. 주인, 있었잖아.” 십 분 후, 낡은 경트럭이 별장 앞에 멈췄고, 작업복 차림의 중년 여자가 내렸다. 그리고 개를 향해 “미카 짱”하며 주저하는 듯 부르자 “개는 지면을 힘껏 차면서 곧바로 여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별장의 개 - B side」의 화자는 개를 찾으러 왔던 중년의 여성. 하지만 그녀는 그 개의 주인이 아니다. 그녀는 4년 전, 집을 버리고 나왔다. 평소처럼 남편은 회사에, 초등학교 6학년인 딸은 학교에 보내놓고 나서, 가방을 들고 현관을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이미 사정을 알고 있는 것처럼, 누구보다 더 그녀를 따랐던 미카가 현관에 앉아서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남편에게는 미련이 없었고, 딸과는 언제든지 만날 수 있지만 “기르던 개와는, 살던 집에 발을 들여 놓지 않는 이상,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 하지만 “추억들을 억지로 잘라내려는 듯, 그녀는 뒤돌아선 채 문을 잠그”었다. 레드 앤 화이트 아이리쉬 세터 종인 미카는 작년에 딸의 침대 옆에서 죽었다고 한다. 집을 나온 그녀는 호텔 청소부가 되었고, 전남편보다 수입은 없지만 성실한 남자와 재혼했다. “전혀 풍족하다고 볼 수 없지만, 이전보다 온화한 삶을 손에 넣었다, 라고 해도, 레드 앤 화이트의 강아지를 살 돈은 없었다.” 그 개는 한 마리에 7, 8백만 원이나 하는 희소종이였다. 그녀는 개를 맡아두고 있다는 사람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메모해두었지만 “지금쯤 주인이 필사적”으로 찾고 있을지도 모르는 “타인의 개를, 자신의 것이라고 속여서 손에 넣을 정도로 악하지는 않다. 무엇보다도 주인이 아닌 사람이 끌고 가려고 해도, 개는 따라오지 않을 것이다.” 고민하던 화자는 날짜가 지나도 벽보가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연락을 하고, 조퇴를 했다. “죄의식 때문에 가슴이 조금 아팠다. 미카 짱, 이라고 부르고 보자, 그렇게 생각했다. 만일 그것으로 개가 내 쪽으로 달려온다면, 틀림없이 미카 짱이 다시 태어난 것이다. 모른 척한다면 포기하자. 여자는 경트럭의 액셀을 밟으며 별장지대로 가는 오르막을 올라간다.”
아베 가즈시게의 「감시자 - 나」의 화자는 흥신소의 직원. 화자는 지금 중요한 시료를 들고 행방불명된 과학자를 추적하기 위해, 그가 12년 전에 버리고 간 딸을 6개월째 감시하고 있다. 의뢰인은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고 감시 규모와 기제의 축소를 요구해 왔지만, 화자는 그럴 의향이 없다. “이 정도 해두지 않으면 그녀를 지켜가기가 어렵다. 비범한 미모를 가지기도 한 그녀는 바로 요전까지도 다수의 스토커에게 동시에 쫓기기도 했다. 눈이 보이지 않는 그녀의 손을 잡아주는 척하면서 꾀이는 녀석들이 여전히 끊이질 않는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본래의 임무를 넘어서까지 그녀를 호위하게 되어, 그녀에게 달라붙는 파리 떼들을 죄다 쫓아내는 일을 해왔던 것이다.” 말하자면 “딸 같은 나이의 그녀를 보호해 나가는 사이에 부성애에 가까운 감정”이 싹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근 그녀에게 나타난 한 남자의 존재가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그 남자와의 결혼을 주저하고 있는 그녀에게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그가, 도청을 피해 꼭 전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피감시자 - 나」의 화자는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던 시각장애인 소녀에게 구혼한 남자. 그에 따르면,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곤란한 일이 생겼을 때 “슈퍼맨 같은 사람이 항상 보호해 주면 좋을 텐데”라고 생각해 왔다고 한다. 몇 달 전부터 결혼에 대해 얘기해 온 끝에, 화자는 3주 전에 그녀에게 구혼했다. 그러나 “12년 전에 부친이 집을 나갔을 때 가져야 했던 절망감”이 상처로 남아있는 그녀는 결혼 그 자체에 불안감을 느낀다. “나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약속”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전혀 진전이 없는 듯 보인다. 6일 만에 그녀와 만나 화자는 집 근처의 노천카페로 그녀를 데려갔다. “잠시 후 의외의 사건이 일어났다. 카페의 점원이 다가와서, 가게로 걸려온 전화를 그녀에게 전해준 것이다.”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전화를 받는 그녀를 두고 화장실에 다녀왔을 때, 전화를 끝낸 그녀가 울고 있었다. “그녀의 볼에 묻어난 것은 기쁨의 눈물이었고, 전화의 상대방은 상상도 못하던, 그녀의 부친”이었다. “12년 만에 이루어진 부녀의 대화는 지금 그녀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이었던 것 같다.” 그녀는 “아버지는 언제나 너를 지켜보고 있다”라는 말을 아버지가 했다면서, “내 손을 꼭 잡았다.”
열두 명의 작가가 똑같은 임무를 부여받았기 때문에, 각자의 특색과 역량이 뚜렷이 비교될 수밖에 없다. 그게 작가들에겐 부담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을 잘 아는 일본 독자들에겐 즐거운 일이었을 것이다. 아쉽게도 이 책에 실린 작가들 가운데 내가 아는 유일한 작가는 시노다 세쓰코뿐이어서 흥미가 반감했는데, 그나마 출판사가 작가 약력을 꼼꼼히 해놓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칠 뻔했다. 그녀의 약력에 적힌 『카논』이란 제목을 보고서야, 언제가 그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기도 했다는 사실을 기억했다(2002년 5월 29일에 쓴 것으로 『독서일기』 6권에 나온다. 거기서 세쓰코는 ‘세츠코’). 그 독후감을 다시 읽으며 여기 실린 「별장의 개」를 보면, ‘작가의 지문指紋’이 보인다. ‘중년의 재출발’이랄지, ‘아직 늦지 않았어, 새로 살아봐!’ 같은 것.
출판사가 정리해 놓은 개별 작가의 약력을 보면, 여기 실린 작가의 거의 모두가 우리나라 말로 번역된 책을 가지고 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물어침공物語侵攻, 아니면 모노가리타리 인베이젼Monogatari Invasion이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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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