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9일
지난번에 소개한 에이프릴 카터의 『직접행동』(5월 14일 독서일기 보기)은 제목 자체가 역설이었다. 지은이는 촛불을 들거나 삼보일배를 하며 거리로 나선 시민들의 행동을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완하는 ‘직접행동’이라고 적극 옹호하는 반면, 소위 대의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투표)는 민주주의의 이상을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불완전한 ‘간접행동’이라고 폄하한다. 위와 같은 주장은, 내 손으로 직접 대통령을 뽑는 게 ‘민주화’라고 오랫동안 믿어온 우리를 당혹게 한다.
그래서 다시 뽑아든 책이 버나드 마넹의 『선거는 민주적인가』(후마니타스, 2007). 대의민주의의에 대한 제도사적 고찰을 행하고 있는 이 책을 읽어보면, 몽테스키외와 루소에서부터 에이프릴 카터에 이르는 숱한 서구의 정치 이론가들이 선거를 불신하는 원인이 짐작된다. 결론부터 미리 말하자면, 시민들을 대표하는 평의회 의원에서부터 최상급의 행정관에 이르기까지 일찌감치 대의제를 시행했던 아테네에서 실제로 행했던 것은 선거가 아니라 추첨이었다는 것. 그들은 선거를 민주주의의 덕목이 아니라 적으로 간주했다.
아테네인들은 평의회 의원의 전체와 각종 공직의 대부분이 무작위로 충원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제도를 200년 동안이나 유지했다. 왜 그랬는지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가르쳐 준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추첨을 통해 집정관을 지명하는 것은 민주적인 것이고, 선거에 의한 것은 과두적이라는 것이다. 재산 자격에 기초하지 않은 것이 민주적이고, 그에 대한 제한이 있는 것은 과두적인 것이다.”
선거로 선출된 정부는 과두정에 다름 아니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은,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으로 선거를 과신해 온 근대인들에게는 상식을 벗어나는 정의지만, 현실은 아테네인들의 우려대로다. 입후보자의 ‘재산 자격 조건’은 18세기 말부터 점차 완화되다가 현재는 ‘선거 비용 위탁’이라는 흔적으로만 남아있지만, 선거의 과두적 성격은 고대보다 더 강화되었다. 미국의 비판적 지식인 노암 촘스키가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듯이, ‘선거 비용을 더 많이 쓴 후보가, 더 적게 쓴 후보보다 당선될 확률이 월등히 높다’는 지적은 우리나라에서도 진실이다.
작년에 있었던 대선과 올해의 총선은 역대 선거 가운데 가장 낮은 투표율을 보였다. 저조한 투표율은 흔히 ‘정치 무관심’으로 풀이되곤 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본서가 현대의 선거를 아예 한 줌의 엘리트들을 위한 “과두제적인 절차”며 평범한 시민들의 “민주주의적인 열망을 방해”한다고 단정 지은 것처럼, 투표장에 가지 않은 많은 유권자들은 당선권에 든 중요한 입후보자들의 전력이 상종 못 할 범죄자와 거의 같은 유형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명세와 재력을 지닌 파렴치범들이 승리할 것이며, 그 게임에서 뽑힌 당선자가 민의와 겉돌 것이란 것을 너무 뻔히 안다. 그들은 ‘정치 무관심’자가 아닌 ‘선거 무관심’자들이며, ‘간접행동’ 대신 ‘직접행동’을 선택한다.
6월 1일
몇 년 전부터 미술품이 인기 투자 종목이 되면서 지명도를 가진 웬만한 작가의 가격이 5~10배나 뛰어올랐다. 혹자는 국민총소득 2만 달러가 낳은 문화적 욕구의 폭발이라고도 하고, 누구는 부동산 투자가 가로막힌 유휴 자금의 유입이라고도 풀이한다. 자연 매달 미술 관련 신간이 쏟아져 나오고, 그만큼 관련 저자들도 바빠졌다. 그 가운데서 뽑아든 이연식의 『위작과 도난의 미술사』(한길아트, 2008)는 제목에 드러난 그대로의 무척 흥미로운 주제를 가지고 미술사의 한 단면에 접근한다.
미술 이론을 전공한 저자는 미술계에서 일어난 유명한 위작과 도난사건을 일화와 인물 중심으로 다루면서, 미술의 구조적인 이해를 돕기보다는 주변적인 흥미만을 충족시키는 게 아닌가 우려한다. 그러나 독자들은 위작과 도난사건에서 거듭 등장하는 요소로부터 자연스레 미술사와 미술계를 떠받치고 있는 불변의 구조를 슬쩍 엿볼 수 있다.
고흐는 살아생전 한 번도 자신의 그림을 팔아서 호강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사후에 치솟은 그림 값으로, 고흐는 위작 시비에 가장 많이 거론되는 작가다. 10년 동안 무려 2천여 점이 넘는 작품을 남긴데다가 짧은 시기에 많은 작품을 제작하면서 화풍의 변화가 급격했기 때문에 위작자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많다는 점, 또 그 자신이 직접 복제한 레플리카(replica:원작자에 의한 복제)가 여러 점이나 된다는 게 고흐를 위작이 많은 화가로 만들었지만, 경매에 나올 때마다 매번 낙찰가를 갱신하는 초고가 작가가 아니라면 누가 위작을 시도했을까?
위작이 화가의 명성에 ‘화룡점정’의 서명을 해주는 것처럼, 도난 역시 작가의 명성을 드높여 준다. 해명되지 않은 온갖 수수께끼로 전 세계의 미술연구자와 관람객들의 애호를 받고 있는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그런 사례에 해당한다고 말하면 불경일지도 모른다. 세로 77센티미터, 가로 53센티미터에 불과한 이 작품은 그러나 처음부터 오늘만큼 유명하진 않았다. 1911년 8월 어느 날, 불시에 도난을 당함으로써 이 그림은 세간의 이목을 모았고, 급기야는 숱한 유명 미술품으로 가득한 루브르미술관을 <모나리자>를 모신 일개의 신전에 불과하게 만들었다.
미술 수집가나 미술관의 탐욕을 이용하여 위작이나 도난작을 유통하려는 범죄는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시민계급이 사회의 주역이 되고 그들의 문화적 욕구가 높아지던 19세기 후반부터 맹위를 떨치기 시작했다. 국제적인 미술시장의 활성화와 함께 미술 관련 범죄도 신종 사업이 된 것이다. 그러면서 위작을 가리기 위한 전문 감정사나 미술사가의 눈도 점점 날카로워졌지만, 결정적인 대목에서는 늘 X선이나 방사성 탄소연대측정 같은 과학적 검증에 유권해석을 맡긴다. 매일 시민들이 촛불을 켠 채 광화문으로 쏟아지는 오늘의 ‘쇠고기 정국’을 보건대, 미술의 세계에서나 현실 정치의 세계에서나, 작심하고 담을 넘기로 한 도둑을 열 명의 문지기가 지키지 못하는 것은 매일반이다.
6월 2일
수박과 모기와 공포영화가 슬슬 나타나기 시작하면 6월이고 여름이다. 그런 뜻에서 백문임의 『월하의 여곡성』(책세상, 2008)은 참 적기에 나온 책이다. 이번 여름에도 두어 편의 공포영화가 개봉될 게 분명한바, 이 책은 공포에서 얻어지는 즉자적인 쾌락을 넘고, 하위대중문화로 취급받는 홀대를 불식하며, 장르적 관습에 가려진 공포영화의 사회적 맥락과 의미를 관객에게 노출시켜 줌으로서 영화보기를 몇 배나 즐겁게 해줄 것이다.
공포영화는 ‘도시/문명/합리성/근대/종교/남성…’의 반대항으로서의 ‘자연/원시/본능성/전근대/미신/여성…’으로 자리매김되며 항상 저급하고 일회적인 장르(납량특선!)로 취급되었다. 그래서인지 60년대 말, 권철휘 감독이 연출한 <월하의 공동묘지>(1967) 이래 꾸준히 제작되었던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인 연구서가 흔치 않았다. 그러다가 <여고괴담>(박기형, 1998)과 일본 영화 <링>을 리메이크한 <링:바이러스>(김동빈, 1999)가 연이어 흥행 되거나 주목을 받으면서 단속적인 연구가 시작됐다.
제목이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지은이는 한국형 공포영화의 전형적이고 특별난 요소로 ‘여귀(女鬼)’를 든다. 외국의 경우 간혹 ‘드라큘라’나 ‘프랑켄슈타인’인 같은 남성이 공포영화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건만, 왜 한국 공포 영화의 주인공은 여자(=여귀) 일색일까? 앞서 든 <월하의 공동묘지>·<여고괴담>·리메이크판 <링:바이러스>는 물론이고,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화제작들의 긴 목록마저 그러하다. <가위>(안병기, 2000)·<소름>(윤종찬, 2001)·<장화, 홍련>(김지운, 2003)·<분신사바>(안병기, 2004)·<분홍신>(김용균, 2005)·<아랑>(안상훈, 2006)…
한국 공포영화의 단골 손님인 ‘여귀’는 꽤 오랜 문화적 기원과 사회적 맥락을 지니고 있다. 유교적 가부장 사회에서 남성은 죽어서 조상신으로 봉제사를 받았고(현모양처의 역할을 충실히 했던 여성도 마찬가지), 죽은 남편을 뒤따르거나 시부모를 극진히 모신 여자는 열녀문을 세워 추앙했다. 하지만 남성 가부장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여성들, 이를테면 시집을 가지 못했거나 순결을 지키지 못했던 여성 혹은 자식을 낳지 못했던 여성은 살아서 핍박받다가 죽어서는 원귀가 되었다. 우리나라 구전(口傳)에 등장하는 숱한 여귀는 성리학적 가부장 질서로부터 벗어난 비정상적인 여성에 대한 강한 두려움을 나타내는 한편, 자신들이 억압했던 타자(여성)를 위무하고 애도할 필요에서 불려온 존재다. 할아버지·할머니들이 자신의 품에 손자·손녀를 껴안고 들려 준 ‘귀신이야기’는, 공포를 훈육 도구 삼아 알게 모르게 가부장 규범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위의 예가 공포영화 ‘장르’에 대해 가르쳐 주는 것은 꽤 분명하다. 아니, 공포영화든 또 어떤 특정 장르든, 무릇 숱한 ‘장르’란 초역사적인 인식적 구조물이거나 어느 걸출한 작가의 창의물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실험적인 구성물이자 특수한 사회역사적 상황이 낳은 우연적인 산물이란 것이다. 그래서 지은이는 장르의 본질을 미리 규정해 놓고 형식적인 접근을 하기보다는, 어떠한 사회역사적 국면이 특정한 장르를 발생시켰는가를 자세히 살피는 것이 더 의미 있다고 말하면서, “장르는 이를 탐구하기 위한 비계(飛階)와 같은 것으로, 그에 대한 탐구가 끝나면 유기될 수도 있는 개념이다”고 까지 썼다. 인용된 일절은 수긍이 되는 면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이 책에 거론된 공포영화를 모두 모아 튼 것보다, 더 공포스러운 발언이다. 왜냐하면 장르의 사회적 기원과 맥락을 알고 나면 폐기될 수도 있는 ‘개념’이란 평론가의 것이지, 현장 종사자의 것은 분명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뭐, 사멸하는 장르도 없지 않은 것을 보면, 지은이의 말이 전적으로 틀린 것도 아니지만).
60년대 전후와 초기의 한국 공포영화는 퍽 흥미롭게도 ‘공포’라는 알을 ‘신파’와 ‘멜로드라마’라는 둥지 속에서 부화시킨다. 즉 신파와 멜로드라마가 관습적으로 사용해 온 처첩 갈등과 고부 갈등은 공포 영화 속에서 원한을 배태하고 여귀를 낳는 플롯으로 고스란히 이월된다. 한국형 공포영화 문법이라고 해도 좋을 이런 혼합은 한국에서의 여성 억압이 그만큼 풀기 힘든 난제라는 것을 증거한다. 하지만 1990년대 말부터 만들어진 새로운 공포영화는 한국형 공포영화인 <월하의 공동묘지>와 사뭇 다른 전개를 보여준다. 1960년대의 ‘여귀’는 한을 풀고는 사라졌으나, 30여 년 뒤에 나타나기 시작한 신세대 여귀(?)는 애당초 한풀이가 목적이 아니다. 그래서 퇴치하기도 힘들고, 따라서 공포는 더 묵직해진다. 그것의 사회적인 의미와 맥락을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 책의 4장을 읽으면 된다.
지구온난화와 이상기온으로 매년 더 무덥고 긴 여름이 갱신되고 있는 우리나라 사정을 보건대, 납량장르로서의 공포영화는 더욱 사랑받으며 번성하지 않을까? 나는 이 질문이 자못 공포스러운 질문이라고 여기지만, 지은이는 썰렁하게 여길 터다. ‘공포’란 더위와 아무 상관없는, 우리가 억압했던 타자나 친숙한 것의 귀환이다.
--------------------
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