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0일
에바 캐시디의 『불륜 다이어트』(갤리온, 2007)를 읽다. - 오만가지 다이어트 방법이 있지만, 작가가 제시하는 최고의 방법은 남편 몰래 다른 남자를 사귀는 것. 마흔 살이 된 64kg의 인테리어 칼럼니스트 에바 캐시디가 47kg의 보기 좋은 몸으로 거듭나게 된 것은, 오로지 20여 년 전에 헤어진 첫 애인 마이클과 재회하기 위해서다. 그녀를 다이어트에 성공하게 한 비법은 “내 몸을 훑어보는 마이클의 시선에 대한 상상”이었다니, 자신의 날씬했던 처녀적 몸매를 기억하고 있는 옛 애인과 바람피울 수만 있다면, 당신의 다이어트는 무조건 성공한다. 그래서 소설의 제목은 아무나, 특히 ‘청소년’은 따라 할 수 없다는 뜻의 ‘The Adultery Diet’.
이 소설은 헌책방에서 사온 심심풀이였지만, 재미있는 구석도 있다. 전자 통신이 발달하기 전에, 편지는 문학 작품의 중요한 모티프였다. 하지만 21세기엔 e-mail이 그것을 대신하며, 뉴욕과 LA에 떨어져 살고 있는 이 소설의 남녀 주인공들의 소통 수단도 당연히 e-mail이다. 하므로 여기에 대한 작가의 논평이 없을 수 없다. 작가에 따르면 19세기의 편지 문화는 즉각적인 답신을 요구했다. “제인 오스틴의 책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하인들을 통해 편지를 건네받은 다음에는 하인이 부엌에서 기다리는 동안 당장 바로 써”주어야 했다. 그런 식으로 “1차 세계대전 전에 런던의 사교계 사람들은 매일 세 차례”씩 이나 우편 왕래를 했다. 하지만 e-mail의 경우, 19세기의 편지보다 더 즉각적인 답신이 이루어질 것 같지만, ‘바빴다’는 핑계로 답신을 뭉그적거릴 수 있다. 작중의 에바 캐시디만 아니라, 우리들은 모두 그렇게 한다.
『불륜 다이어트』의 여주인공은 대체 “체중을 줄여 성취감이란 것을 얻다니, 생각해보면 우스운 일이다”고 말하면서, 다이어트가 “미친 듯이 운동을 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학교를 졸업한 것도, 이상적인 새 직장을 얻은 것도, 지위가 올라간 것도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성취와는 정반대다. 다이어트란 부정적인 염원, 즉 원래보다 ‘줄어’들겠다는 욕망”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도 많은 여성들이 다이어트에 목을 매는 까닭은 무엇일까?
소설과 함께 읽은 한서설아의 『다이어트의 성정치』(책세상, 2000, 책세상문고·우리시대018)는 ‘아름다움’이 이성애heterosexuality의 기반이라는 것을 수긍한다. 때문에 아름다움 혹은 육체적 매력은 이성애를 완수하기 위한 각자의 기반(능력)이다. 그런데 이성애를 완수하기 위한 육체적 기반(능력)이 여성에게만 적용되고 남성에게는 불균형하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정체성의 승인과 확보에서 외모가 차지하는 비중 자체가 성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물론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호소하는 기본적인 ‘매력’ 역시 남자다운 몸일 것이다. 하지만 남성들은 여성에 비해서 다양한 사회적 자원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그러한 자원의 소유가 남자로서 가지는 매력 중 중요한 부분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사회적 기준에 꼭 들어맞는 외모를 가지고 있지 못해도 그 부족함이 다른 자원, 예를 들면 높은 사회적 지위나 좋은 성격 등으로 충분히 상쇄될 수 있는 융통성이 남성들에게는 존재한다. 그에 비해 여성들의 경우에는 워낙 다른 사회적 자원에 대한 접근도 어려울뿐더러, 설령 그러한 자원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도 일차적으로 외모를 중심으로 ‘여성다운 매력’이 구성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상적인 외모를 갖고 있지 못하면 아무리 다른 사회적 자원을 가지고 있어도 남자들의 시선에 의해서 ‘여자’로서 감지되지 못하며 오히려 다른 자원의 가치까지 폄하되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예쁜 여자가 공부를 잘하면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못생긴 여자가 공부를 잘하면 독한 여자라는 소리를 듣는다는 농담 등은 여성이 가진 다른 자원의 가치를 ‘외모의 수준’에 따라 평가하는 사회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남성이 남자다움을 인정받는 데 외모는 하나의 필요조건일 뿐이지만, 여성에게는 ‘여성’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충분조건이다. 따라서 여성의 다이어트는 남성이 만들어 놓은 사회적 시선에 자신의 몸을 맞추기 위한 노력이다. 이렇게 말하면 여러 가지 이유로 ‘다이어트를 하는 남성도 있다’며, 사회적 시선에 포획되기는 남성 육체나 여성 육체나 매 한 가지라고 반박할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비만 남성은 비만 여성에 비해 다이어트 실행도가 낮고, 반대로 여성들의 체중은 “날이 갈수록 감소되어가는 데 비해 자신이 뚱뚱하다고 느끼고 다이어트를 시도하는 여성들의 수는 늘어”난다. 이런 괴리가 나타나는 것은 여성이 남성보다 더 이상적인 육체를 요구하는 사회적 시선에 강하게 포박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여성의 다이어트와 남성의 다이어트는 접근 방식이 다르다는 점도 덧붙여야 한다. 여성의 다이어트는 ‘체지방’을 없애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반면, 남성의 다이어트는 똑같이 남아도는 체지방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근육’으로 바꾸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차이는 남녀의 이상적인 신체상이 어떻게 다른가를 가르쳐주는 한편, 사회와 노동 현장에서의 남녀의 역할이 어떤 방식으로 분할되어 있는지 마저 상징적으로 또 실제적으로 보여 준다.
청년 실업률이 급등하면서 여성의 취업문도 점차 좁아진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능력이 동일할 경우 외모가 결정적인 요소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여성들 스스로가 수용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외모를 중요한 직업적 자질의 하나로 평가하는 기업의 시선이 일반적으로 여성의 외모에 대한 남성의 시선과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점”이며, 여기에 부응하는 여성들이 “남성 중심적인 시선”을 수긍하고 내면화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또 여성의 외모가 “취업 조건”으로 등장하는 상황은 여자들끼리의 경쟁을 상정했을 때 가능한 일이며, 때문에 외모 차별은 “‘여여차별’이지 ‘남녀차별’이 아니라는 논리”도 등장한다. 이런 논리의 맹점은 “여성과 남성의 직종과 업무가 분리되어 있고 성별을 구분해서 직종별로 따로 인력을 충당하는 구조와 밀접하게 맞물려 있”고, 그런 “성별 직종 분리는 자연스럽게 임금, 승진 등에서의 차이로 연결됨으로써 결과적으로 여성과 남성의 위계를 더욱 강화하게 된다”는 것을 외면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취업 경쟁에서 여성의 외모가 중요한 기준이 되는 사회는 남녀의 성별 직종 분리가 그만큼 두터운 사회라는 것을 증빙하는바, 우리나라에서 성공한 여성들이 주로 어떤 직종과 부서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여성 개개인의 외모 관리가 남성의 시선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적 힘”에 의해 추동되었다는 것을 모른 체하는 현실에서는 다이어트의 고통이 “단지 아름다움 또는 건강에 대한 여성의 자연스러운 본능적 욕망”이며 “‘자기 만족’을 위한 철저한 ‘자기 관리’의 일환”으로 설명된다. 이때 다이어트에 성공한 여성은 날씬한 몸만 아니라, 자제력·자기 개발의지·부지런함 등의 ‘도덕적 트로피’마저 함께 얻는다. 페미니스트임을 공표한 이 책의 저자는 “날씬한 외모가 여성들에게 가져다줄 수 있는 사회적 혜택”과 그로 인해 얻는 “자신감”을 인정하며, “외모가 하나의 ‘자본’이 될 수 있고 ‘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딱히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승인된 현실이 여성들 사이에 ‘억울하면 예뻐져라, 날씬해져라’라는 식의 맞대응을 낳게 하여 “여성들을 분열”시키고 “서로 만나서 공감하고 연대할 수 없도록 하는 위력”을 발휘한다고 말한다.
『다이어트의 성정치』는 “‘외모 관리’의 문제는 단지 개별 여성들이 직면한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여성’이라는 집단이 처해 있는 사회적인 문제”임을 강조하면서, 정작 여성이 치료해야 할 것은 여성의 ‘살’이 아니라, “여성들에게 외모가 차지하는 비중을 이렇게 높여 놓은 사회”라고 지적한다. ‘외모 사회’에 대응하는 연대와 저항 없는 치유는 불충분하고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저자는, 남성의 ‘시선 권력’에 포박된 여성의 신체를 되찾기 위해 벌였던 가장 도전적이고 획기적인 저항으로 1997년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가 기획했던 미인대회 반대운동을 꼽는다.
성공한 뉴요커들의 일상과 감성을 한껏 엿볼 수 있었던 『불륜 다이어트』의 두 대목을 인용하면서 이 독후감을 끝맺는다: “유부녀들이 살찌는 이유는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이 옆에 있기 때문이야. 그게 진실이야. 남자한테 잘 보이려고 애쓰지 않아도 임자가 있으니까. 유부녀가 갑자기 다이어트에 목매는 이유는 딱 두 가지야. 첫째, 바람피운다. 둘째, 남편이 바람피우는 것 같다. 아니니? 맞지? 그거 말고 다른 이유가 있다면 글쎄, 결혼식에 갈 일이 생겼을 때 정도?”, “인간도 동물이라, 욕망을 갖는다는 건 당연하다. 식욕이나 성욕으로 인해 인간은 계속 살아간다. 그리고 행복은 인간의 내부에 빌트인으로 설계되어 있는 게 아니다. 좋은 음식, 만족스런 섹스, 아이와의 시간 같은 것들은 일시적인 보상으로서의 행복을 제공할 뿐이다. 욕망은 피로나 배고픔보다 강한 습관이 되었다. 욕망으로 인해 나는 잠자리에서 빠져나와 1월 아침의 쌀쌀한 거리로 나섰다. 그리고 회색 하늘에서 먼동이 트기도 훨씬 전에 헬스클럽으로 향했다.” 이 뉴요커에겐, 이것이 다이어트다! 이상적인 파트너와 나눌 수 있는 섹스의 기회와 식욕이 서로 불화하는 게 문제지만.
5월 21일
조정래의 『오 하느님』(문학동네, 2007)을 읽다. - 1944년 6월 6일, 미군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이 벌인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의 분수령이자 승부처였다. 독일군의 허를 찌른 상륙작전은 순조롭게 완수된 듯 알려져 있으나, 실제의 전황은 연합군이 상당한 희생을 치러야만 했던 독일군의 강한 저항이 있었다.
미국의 뉴올리언스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쳤던 스티븐 앰브로스는 베스트셀러 작가이면서 노르망디 상륙작전 전후의 제2차 세계대전사를 여러 권 남겼다(그가 쓴 『밴드 오브 브라더스』(Band of Brothers)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미니시리즈로 제작했고, 우리나라에도 책이 번역되어 있다). 『D-DAY』는 그중의 한 권인데, 그 책에 ‘나치 군복을 입은 조선인 병사’의 사진이 실려 있다. 다음은 사진 설명이다: “일본에 의해 징용으로 끌려가 일본군이 되었다. 러일전쟁 시기 만주국경분쟁에서 1939년 소련군에 의해 체포, 소비에트 붉은 군대에 징집되었다. 2차 대전 시, 소련과 독일 간 전쟁이 벌어지자 이번에는 독일군에 체포, 징집되어 독일 대서양 방어선 구축 전선에서 복무하였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이번엔 미군에 체포되었다. 그 누구도 이 사람이 쓰는 언어를 알아듣지 못했다. 그는 조선인(한국인)으로 판명되었고, 미군 정보부를 통해 그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프랑스 노르망디, 유타비치. 1944. 06. 06.”
『D-DAY』에 실린 한 장의 사진은 우리나라의 ‘밀리터리 마니아’들에게 발굴되어 인터넷 사이트에서 진위 논쟁이 벌어졌고, 2005년 12월에는 SBS가 2부작 다큐멘터리로 제작·방영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오 하느님』을 쓴 조정래는 책 말미에 붙인 ‘작가의 말’을 통해, 스티븐 앰브로스의 책에 실린 한 장의 사진이 방송사의 특집 다큐로 만들어진 사정과, 거기로부터 집필 동기를 얻었음을 밝히고 있다.
작중의 조선인 주인공들은 맨 처음 일본군에 징용되었다가, 만주에서 벌어진 일·소 국경분쟁인 노몬한 전투(1939년) 때 소련군의 포로가 된다. 그 후, 독·소 전쟁이 발발하자 소련군으로 징집된 조선인 병사들은 모스크바를 방어하기 위해 제도프스크 전선에 투입(1941년)되었다가, 독일군에게 사로잡힌다. 나는 방송을 보지 못했지만, 『오 하느님』은 히틀러에게 백여만 명이나 되는 동방대대가 있었다고 쓰고 있다. 동방대대는 나치군이 소련군으로부터 포획한 전쟁 포로나 슬라브인을 징집해서 급조한 부대로, 언어 소통의 벽과 충성도를 신뢰할 수 없었던 이유로 전투가 치열한 동부전선보다는 서부전선(노르망디)의 방어 작업에 투입되었다.
소설은 미리 인용한 사진 설명의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한 장의 사진이 주는 강렬한 인상을 뛰어넘지 못한다. 한 장의 사진 설명에 작가가 덧보탠 것은, 미군 포로가 된 조선인 나치 병사가 미국의 뉴포트 수용소에 수용되면서 국적이 ‘Soviet'로 분류됐다는 것. 그 때문에 미국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던 조선인 나치 병사들이 스탈린의 요구로 소련으로 송환되게 되었고, 소련으로 송환된 조선인 병사들은 나치의 동방대대원으로 ‘조국을 배반’했다는 이유로 모두 처형된다. 하지만 이 정도의 새로운 이야기를 읽기 위해, 한 편의 ‘역사 소설’이 따로 필요한 건 아니다. 등장인물들은 꼭두각시들처럼 아무런 성격이나 갈등도 지니고 있지 못하며, 전쟁이나 제2차 세계대전을 바라보는 작가의 문명적 시야는 너무 약소하다.
‘민족주의는 반역’이라는 반민족주의 담론도 요즘엔 무성하지만, ‘나라 없는 민족’이 당한 설움을 기술하고 있는 이 소설에는 그런 논의가 끼어들 자리가 없다. 그래서 생긴 문제는 두 가지다. 먼저 주인공들이 겪는 비극이 ‘민족 국가’의 부재 때문이라는 작중의 대전제는, 상부로부터 지원병(징병)을 할당받은 면사무소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소작인”들을 골라 징병을 보냈다는 중첩된 ‘비극의 자리’를 옳게 파헤치지 못하게 방해한다. 이 때문에, 민족주의는 일제 통치자의 옆자리에서 같은 민족을 핍박했던 조선인 중간 관리자들의 반민족적 범죄를 간과하게 한다. 대일對日 민족주의의 역설이다. 또 작품 서두에, 일본군을 탈출하기 위해 미시마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신길만의 죄책감이 몇 차례나 악몽으로 재현되었다가 시부적이 사라지고 마는 것도, ‘나라 없는 민족’이 당한 설움이라는 작중의 전제가 그어 놓은 한계다. 민족주의라는 양보할 수 없는 최저 한계 속에서 ‘휴머니즘’이 실종하고 만 것이다.
사족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대한 일반인들의 오래된 선입견(‘노르망디 상륙작전은 땅 짚고 헤엄치기처럼 쉬운 작전이었다’)이나, 최근의 시각 변화(‘그렇지 않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시에 입은 미군의 피해는 컸다’)는 미국의 흥망이나 미국의 국제 정치 전략과 밀접한 관계가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해 준 것은, 엠마뉴엘 토드가 쓴 『제국의 몰락』에 나오는 짧은 주석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미국이 도덕적으로 떳떳하면서 제국이고자 하지 않았을 때, 할리우드 영화 속의 로마는 항상 악으로 묘사됐다. <벤허>(Ben Hur, 1959) 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미국이 스스로 제국을 자처하면서 로마의 이미지는 <글래디에이터>(Gladiator, 2000)에서처럼 긍정적으로 묘사된다. 똑같이 미국의 군사력이 최강이었을 때 할리우드 영화가 묘사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지상 최대의 작전>(The Longest Day, 1962)이 묘사한 것처럼 웅장하고 애국적이었으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Saving Private Ryan, 1998)에서는 ‘국가’가 ‘가족’으로 축소되면서 상륙작전의 처절함은 오히려 더 강조된다. 미국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세계 경찰’의 비극을 묘사하는 게, 제국(미국)에게 도움이 되어서였을까? 아니면 벌써부터 제국이 자신의 막중한 역할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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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