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5일
내가 하면 아름답지만 다른 사람이 하면 추한 것, 그것이 우리가 사용하는 로맨스romance의 정의다. 보통 그것은 사랑이나 결혼에 도달하지 못한 ‘불장난’이나 배우자 몰래 하는 ‘부도덕한 사랑’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융 심리학자이면서 꿈 분석가인 로버트 A. 존슨의 『We - 로맨틱 러브에 대한 융 심리학적 이해』(동연, 2008)를 읽고 나면 로맨스에 대한 정의를 달리해야 할지도 모른다.
지은이에 따르면 로맨틱 러브(romantic love·courtly love=로맨스)에 대한 이상은 중세 서양에서 탄생했으며, 그것의 원형은 숱한 장편 서사시로 각색된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야기다. 켈트인에 의해 4~5세기경에 완성된 이 신화는 12세기에 이르러 많은 음유 시인과 대중으로부터 폭발적인 애호를 받았다. 또 한 번 지은이에 따르자면, 인류 역사상 12세기는 중요한 분수령이었고, “서구인들의 정신이 진화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로맨틱 러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트리스탄은 서양 남성 영웅의 원형이다. 그는 어머니 없이 자라며, 그가 사는 나라엔 왕비가 없다. 칼과 창을 지닌 채 군영軍營에서 사는 그의 삶에는 여성성이 부재한다. 일찍이 심리학자 융은 “인간 정신은 양성적”이며 “인간은 예외 없이 여성성과 남성성”을 간직하고 있다고 말한다. 융 체계 속에서, 우리가 꿈꾸는 완전한 ‘자아’니 ‘자기’니 ‘깨달음’이니 하는 것들은, 한 인간 속에 ‘남성성-여성성’을 조화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남성성의 특질은 정복하고 지배하는 일이다. 트리스탄은 그 과정에서 매번 치명적인 상처를 받게 되고, 그때마다 이졸데가 그를 치유해 준다. 흥미롭게도 트리스탄이 치유를 하기 위해 돛도 노도 없는 빈 배에 올라 무작정 떠날 때, 그는 칼을 버린 채 하프만을 가슴에 안고 파도에 운명을 내맡긴다. 사태를 분석(돛)하고, 목표를 향해 전진(노)하며, 타자를 정복(칼)하는 남성적 특질을 포기하고, 타인과 교류하고 관계를 맺기 위한 감성적 도구인 하프만을 가지고 망망대해로 나갔을 때 트리스탄은 자신이 망각하고 있었던 또 다른 자아의 반쪽인 이졸데를 만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신화가 만들어진 12세기는 사회문화 전반에 가부장적인 남성문화가 팽배해진 시대다. 전쟁과 음모가 판을 치던 이런 시기에 정복자들의 궁정에서, 여성을 자신의 이상이자 영감이며 모든 아름다움과 완전함의 상징으로 여기는 로맨틱 러브 이야기가 음유시인들에 의해 왕성히 불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당대의 사람들은 남성성이 원리가 되는 세계는 곧 파국을 불러온다는 것을 알았고, 남성성을 순화시키려는 그 시대의 집단 무의식이 자연스레 잃어버린 반쪽(여성성)을 이상시하는 ‘로맨틱 러브’를 낳았다.
로맨틱 러브는 ‘불장난’이나 ‘부도덕한 사랑’이 암시하곤 하는 성적 관계를 배제하며, 안정감을 기반으로 삼는 결혼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로맨틱 러브는 “상대 여성을 신격화”한 남자와 그 대상인 여성이, 타오르는 열정을 깨트리지 않은 채 평생 동안 유지하는 것이다. 강렬한 욕망 때문에 고통받으면서, 결혼이나 성적 관계로 축소되지 않는 남녀 관계가 바로 로맨스라면, 누가 이런 사랑을 원할까? 실제로는 신화 속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도 그러지 못했다는 게, 로맨틱 러브의 아리송한 역설이다.
5월 14일
어린 학생들의 촛불시위가 연일 전국을 달구고 있는 ‘쇠고기 정국’에, 에이프릴 카터의 『직접행동』(교양인, 2007)을 읽었다. 직접행동(direct action)은 영국·오스트레일리아·독일·프랑스의 시민운동가들이 고속도로 건설을 저지하기 위해 인간 사슬을 만들거나 열대우림의 벌목을 막기 위해 나무에 자기 몸을 묶는 일, 또는 핵폐기물을 적재한 수송열차 앞에서 연좌 농성을 벌이거나 농장을 급습해서 유전자 조작 작물을 뽑아버리는 등의 온갖 시위를 가리킨다. 본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새만금 갯벌을 살리기 위해 우리나라 운동가들이 처음 선보였던 삼보일배 행진도 직접행동이다.
직접행동의 목표는 대의민주주의의 테두리 안에서, 권위주의적이고 불완전한 정책과 제도의 시정과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다. 용어가 낯설어서 그렇지 직접행동은 소로우의 ‘시민불복종’ 운동이나 간디의 ‘비폭력 저항’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저자가 대의민주주의를 보완하고 완성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한 직접행동의 반대말은 대체 무엇일까? 꽤 샅샅이 읽었는데도 끝내 직접행동의 반대말이 나오지 않으니, 독자가 직접 나서 저자에게 그것을 지어 바칠 수밖에.
『직접행동』의 대의를 파악하건대, 저자가 말할 필요도 없었던 직접행동의 반대말은 ‘간접행동’이고, 그것은 ‘선거(투표)’를 가리킨다. 대의민주주의의 근간인 선거가 시민의 대의를 완성해 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시민들의 직접행동에 의해 보완되어야 할 만큼 부차적인 ‘간접행동’으로 전락했다는 인식은 무척 놀랍지만, 새삼스럽진 않다. 이탈리아 최초로 세 번씩이나 총리직에 오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뇌물 수수와 탈세·공무원 매수·불법 정치 자금 운용을 밥 먹듯 하면서 2년 넘는 징역형까지 받았으나, 돈과 미디어의 힘으로 선거에서 이겼다.
사소한 호기심이나 정쟁이 공공적 의제보다 우선하고, 각종 미디어 스타가 선출직에 쉽게 진출하는 한국과 세계 각국의 경향을 살펴보면, 대의민주주의의 토대인 선거와 정당 정치가 민주주의의 실질을 보장해 주지 못하는 게 아닌가라는 우려를 깊게 한다. 뿐 아니라, 로비 단체의 헌금과 재력가들에 의해 치러지는 오늘의 선거는 경제적·정치적 권력으로부터 배제된 다양한 소수자들의 정치 진입을 더욱 어렵게 한다.
정당 정치와 선거에 염증을 느끼는 사람들은 투표에 참여할 가능성이 낮은 대신, 직접행동에 나서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때 직접행동은 특권층이 높여놓은 대의민주주의의 진입장벽을 돌파하고, 대의민주주의의 왜곡된 균형을 바로 잡으려는 아래로부터의 정치운동이다. 청계광장에 모인 어린 학생들의 촛불시위는 선거에 참여하지 못하는 세대의 대의가 결집한 것일 수 있다. 보수정당은 선거 때마다, 청년층의 투표율이 낮기를 바라는데, 그건 곧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고비용이 당락을 좌우하는 선거의 규칙을 고치고, 유권자 전체의 선거율을 높이며, 선거연령을 낮추는 게 골치 아픈 직접행동을 방지하는 방법이라고 귀띔하면 그들이 알아들을까?
5월 17일
누구나 쇼핑을 좋아하지만, 쇼핑을 좋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잘 없다. 종종 사치와 과소비로 결말을 맺는 그것은, 비주체적인 ‘소비의 노예’로 비난받거나 조롱받고, ‘쇼핑 중독증’이란 영예롭지 못한 병명까지 얻는다. 비록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즐겁게 쇼핑을 하는 도중에 불현듯 조울증을 느끼는 사람은 많다. 근검절약을 위반하고 재화를 탕진하는 행위에서 오는 소비자의 죄의식을 무마하기 위해, 백화점이나 대형 쇼핑 공간은 인공조명과 분위기 있는 음악, 바깥을 볼 수 없도록 창을 은폐하는 등의 방법으로 구매가 일어나는 현장을 현실사회와 절연시킨다.
문화와 취향의 ‘구별짓기’를 통해 계급사회의 무의식적인 복제와 경쟁을 꼬집었던 피에르 부르디외는, ‘구찌나 프라다를 갖고 싶은 욕망은 개성을 나타내기 위한 당신의 주체적인 선택이 아니라, 그것으로 상징되는 계급에 속하고 싶은 사회적 집단 욕망’에 복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당신을 개성적으로 만들기 위해 떠나는 매일매일의 모험(쇼핑)이 사실은 지배와 경쟁이라는 사회 전체의 투쟁에 가담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부연하자면, 여기서 논의되는 쇼핑은 일주일 동안 가족을 먹일 식품이나 생필품을 사는 일과는 다른 종류다.
물질적인 가치를 낮게 평가하는 일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지식인들이 쇼핑을 부정적으로 정의하는 전통은, 좀 썰렁하지만, 플라톤에게까지 소급된다. 이데아(불변적·초월적·영구적)와 이데아를 모방하는 현상세계(가변적·감각적·일시적)로 세계를 이분하고 전자에 가치를 두었던 그의 관점에 따르면, 물질 과잉인 사치에 대한 관심이 강할수록 영혼은 육체에 묶여 타락한다. 이런 플라톤적인 교의는 오늘날에 이르도록 부르주아·부자富者·재산가들을 부정적으로 여기게끔 한다.
하지만 『쇼핑의 철학』(개마고원, 2007)이란 발칙한 책을 쓴 프레데리크 페르넹은 부르디외의 구별짓기설을 거부하고, 플라톤의 이원론을 지양하고자 한다. 저자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을 ‘대상-사물’로 만들려는 모든 기도에 저항하며, 패션은 육체를 타락시키는 게 아니라 실존(정체성)을 고정할 수 없는 현대인들이 여러 상황에 따라 다른 존재가 되려는 부응의 산물이다.
욕망을 강제하는 광고의 힘을 무시하는 게 좀 미심쩍고, 또 오늘날에는 계층 간의 ‘수직적’ 흉내내기가 아니라 개인들 간의 ‘수평적’ 흉내내기만 있을 뿐이라는 주장에도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그러나 원래 인간은 다양한 내면을 가졌으나 그것을 인간성이라는 보편성으로 일원화하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진 게 ‘영혼’이니 ‘자아’니 ‘실체’니 하는 단일 개념들이었던 것처럼, 거기에 저항하는 개인들이 자신의 다양한 내면을 밖으로 드러내고 증명하기 위해 쇼핑이라는 유희를 즐기는 것이라는 논리는, 충분히 ‘쇼핑의 철학’에 값한다(다양한 영혼만큼, 다양한 쇼핑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묻지 말라).
5월 19일
『박근형 희곡집 1』(연극과 인간, 2007)을 읽었다. 그리 길지 않은 5편의 작품으로 구성된 이 두껍지 않은 희곡집은,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독특하고 일관된 작가의 개성으로 발광發光하고 또 발광發狂한다. 우리나라 극작가 가운데 박근형만큼 ‘엽기적’인 개성이 어디 있었던가? 그는 자기증식 하듯 비슷한 일화와 주제가 반복되는 5편의 작품을 통해, 가족과 멜로드라마라는 우리 시대의 환상과 관습을 무참히 깨트린다.
극작가로서 박근형의 이름을 인상 깊게 알린 첫 작품은 「청춘예찬」. 화사한 제목과 달리 주인공 박해일은 잦은 결석과 비행(?)으로 2년째 학교를 ‘꿇고’있는 고등학교 2학년생. 그의 아버지는 한 번도 돈을 벌어 본 적이 없는 허풍선이 건달인데다가, 부부싸움 중에 대드는 아내에게 염산을 부어 실명시킨 전력이 있다. 맹인이 된 해일의 어머니는 남편과 이혼하고 현재는 안마시술소에서 안마사로 일하는데, 아버지는 걸핏하면 전처의 일자리를 찾아가 술값을 뜯어오는 눈치다.
어려서부터 한 번도 가장의 몫을 하는 걸 보지 못한데다가 개구신이기까지 한 아버지를 아들이 존경할 리 없다.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에게 여사로 대들고,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구슬리거나 가끔씩 손찌검도 해보지만, 어쩔 수 없이 아들의 ‘니나돌이(말을 까는 것)’를 수락하고야 만다. 아버지가 아버지가 아니고, 아들이 아들이 아닌 부자관계의 노골적인 파탄은 뒤에 나올 「푸른 별 이야기」에 삽입된 카페 장면에서 다시 볼 수 있다.
다시 「청춘예찬」. 어느 날 해일은 ‘고삐리’ 친구들과 어울려 술도 팔고 여자도 파는 다방에 놀러 갔다가, 거기서 주방 일을 하는 못생긴데다가 간질까지 있는 다섯 살 연상의 여자를 만나 함께 살기로 약조하고 집으로 데려온다. 아버지는 명색이 아버지라, 학교도 졸업 못한 아들이 다방에서 쫓겨난 여자와 함께 살겠다고 하니,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다. 아들은 이죽이며 어깃장을 놓은 아버지를 들이 받는다(이하 인용 가운데, 있어야 할 곳에 마침점이 없는 것은 작가의 구술투 탓이다).
해일ㅣ (술상을 들어엎으며)
그래서 뭘 잘해서 병신 새끼처럼.
내가 안 죽이고 데리고 사는 게 고마운 줄 알아야지.
사람이면 안 그래 꼴에 애비라고 지금 폼 잡는 거야.
아버지ㅣ앉아라.
해일ㅣ까지마!
아버지ㅣ(따귀를 친다.) 정신 좀 드냐. 너는 미쳤어 새끼야.
해일ㅣ 그래 나는 미쳐서 그런다 근데 정신은 안 든다.
아니, 아냐 아주 맑아지는데.
아버지ㅣ맨 정신에 이러면 몰라도 술 쳐먹구 이러면 개야 개.
개 되면 그 순간에 인생 끝나는 거야.
이 불쌍한 새끼야.
해일ㅣ너나 개 되지 마라 이 불쌍한 아버지야. 이걸 그냥!
첫날부터 부자가 싸우는 꼴을 보고 그것을 말리던 여자는 간질을 일으키며, 바지에 똥을 싼 채 쓰러진다. 그제야 부자는 싸움을 멈추고, 화해 아닌 화해를 한다. 이런 찝찝하고 개차반스러운 얘기 어디서 들어나 봤나?
박근형의 대표작으로 꼽는 「대대손손」은 잠시 미뤄두고, 「쥐」를 먼저 얘기해야 한다. 이 작품의 첫머리엔 “무대는 허름한 라디오 방송국 안./ 그 곳에는 사람이 사는 듯 간단한 가재도구가 놓여 있다./ 낡은 방송 시스템 일부와 난로와 침대가 놓여 있다./ 벽에는 멈춰 있는 시계와 2000년을 표시한 달력이 걸려 있다.”라는 지문이 나와 있지만, 여기 나오는 시·공간은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동화나 민담의 세계다. 큰아들은 집에서 방송을 하고 어머니와 임신한 며느리는 집안일을 한다. 저녁 무렵이 되자 사냥을 나갔던 작은아들과 여동생이 낯선 소년을 데리고 돌아온다. 허탕을 치고 돌아오는 길에, 빈사 상태에 빠진 길 잃은 어린 소년을 발견한 것이다.
작은아들ㅣ근데 조금 빠삭한 게 맛이 없어 보이죠?
어머니ㅣ빠삭하기는? 내가 보기엔 제법 실하다.
그리고 맛이란 건 먹어보기 전에는 모르는 법이다.
집안에 무수히 널려 있는 주인 없는 신발로 짐작건대, 이들은 인육을 먹는 일을 버릇해 왔고, 아마 그게 이 가족의 생존 수단이었을 것이다. 『헨젤과 그레텔』 에 나오는 ‘숲 속의 집’이 보여주었듯이, 비록 인육을 먹지는 않았지만 김지운 감독의 <조용한 가족>에 나오는 산장이나, 이강백의 『황색여관』에 나오는 허허벌판 위에 세워진 황색여관, 그리고 똑같이 외딴 들판에 위치한 것이 분명한 이 작품 속의 허름한 라디오 방송국(방송국 이름이 ‘라디오 파라다이스’란다)은, 동화나 민담에 자주 나오는 ‘숲 속의 집’이자, ‘죽음의 집’이다.
가족들의 저녁 식사가 끝난 뒤, “여기가 방송국 맞나요?”라며 초췌한 방문객이 찾아온다. 집 나간 아이를 찾기 위해 방송을 부탁하러 온 소년의 어머니다. ‘죽음의 집’의 식구들은 허기진 소년의 어머니에게 천연덕스레 자신들이 먹고 남은 국을 주고, 소년의 어머니는 연방 “고소하네요”라며 자식의 살로 만든 음식을 먹는다.
5편의 작품 가운데 「푸른 별 이야기」는 그나마 엽기성이 가신, 익숙한 얘기에 속한다. 주인공은 오매불망 ‘입봉’을 꿈꾸는 예비 영화감독. 작중 설명은 부족하지만, 처제(여동생)와의 불륜을 감지한 아내는 자신의 병을 방치하는 방식으로 자살을 선택한 듯하다. 아내의 죽음 이후 외국으로 출국했던 처제가 돌아와 도저히 잊지 못하겠다며 함께 살기를 요청한다. “원한다면 집에 같이 가요. 엄마한텐 제가 말씀드릴게요 (…) 내가 다 준비할게요. 우리가 함께 살집하며, 또 제가 일 할 만한 곳도요. 알아보면 몇 군데 있어요”라고 애원하는 처제에게 툭 던지는 감독의 대꾸가 재미나다.
감독ㅣ 아직도 날 몰라?
이건 영화가 아니야
신경숙 소설이 아니라니까
(사이)
우린 같이 살 수 없어
박근형의 희곡은 두 개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의사 가족성’이다. 「청춘예찬」이나 「푸른 별 이야기」에 잠시 등장하는 패륜적 부자가 보여주듯이, 그들의 관계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러해야 할 인륜적인 부자관계를 체현하고 있지 못하다. 「쥐」에 나오는 며느리는 남편(큰아들)이 아닌 시동생(작은아들)의 아이를 임신한 게 분명하고, 막내딸 역시 작은아들(작은오빠)과의 근친 행위로 임신을 했다(박근형의 희곡에서는 부권이 그랬듯, 장자 또한 실추되어 있다). 또 「푸른 별 이야기」에서는 끝내 함께 살기를 거부하는 형부(감독)를 처제가 칼로 거듭 찌르며 “사랑해요”, “같이 살아달라”고 애원한다. 그래서 두 사람은 죽음도 뛰어넘는 사랑으로 맺어진 것일까? 방금 든 이런 예들로 보아, 애초부터 이들은 가족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가족을 흉내 내고 있는 것이다. 뒤에 살펴볼 「대대손손」의 비밀이 거기 있다.
가족이 아니면서 가족이라는 ‘끈끈이’에 묶여 사는 의사 가족성을 잘 드러내 주는 사이가 「청춘예찬」의 아버지와 어머니다. 그들은 이혼했으면서도, 의사 가족성이라는 허위의 울타리에 여전히 구속되어 있지 않은가? 뿐 아니라 「쥐」에서는 ‘죽음의 집’의 가족들이 가출한 아들을 찾는 방송을 부탁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방문객에게 이렇게 말한다.
어머니ㅣ에미 싫다고 지발로 나간 자식 찾으면 뭐하나요.
그런 자식은 없느니만 못해요.
돌아오면 또 뭐하나요. 지발로 또 나갈 텐데.
그냥 엿 바꿔 먹었다 생각하세요.
이참에 여기서 그냥 우리랑 삽시다! 이모!
얘들아 뭐하니, 이모님께 인사 올려라!
박근형의 작품을 본 누군가가 착취와 이용을 위해 급조되는 이런 가족(왜냐하면 ‘죽음의 집’에서처럼 그들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방문객을 포획한 다음, 실컷 부려 먹다가 결국 먹어 치울 테니)은, 가족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역설적이게도 오늘날의 ‘가족’을 너무 신성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카프카의 「변신」이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듯이 자본주의 문명하의 가족이란 사회적 침탈에 대한 자경(自警=방어벽) 역할만 아니라, ‘가족애’라는 이름으로 착취와 이용이 벌어지는 자본주의의 전초기지가 된 지 오래다.
자신들이 먹어치운 소년의 어머니에게 이모가 되어 함께 살자고 권하는 ‘죽음의 집’의 후안무치한 일화는 「삽 아니면 도끼」에 다시 반복된다. 영화감독을 사칭하면서 친구 여동생의 몸과 마음을 빼앗은 주인공 맨발이 뒤늦게 찾아온 아내와 아들을 따라나서려고 하자, 순정을 빼앗긴 친구의 여동생은 마치 체홉의 어느 여주인공처럼, 감독과 그의 본부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감독님! 언니! 감독님은 언니를 버린 게 아니라 예술을 위해 언니 만나기를 참고 계셨던 거 같아요. 하시고 싶은 그걸 할 때까지 스스로를 누르고……. 전 감독님이 불쌍해요. 그날이 올 때까지 여기서 우리 모두 조금씩 참고 살아요?” 그러자 맨발의 아내가 뭐라고 즉답했던가? 곧바로 “동생!” 하지 않았던가? 이러구러 세월은 흘러, 이 화목한 ‘성聖 가족’을 보라!
여동생ㅣ(아내의 방을 가리키며) 감독님 날이 찬데 들어가 주무시지 않고?
아내ㅣ 아니에요 동생.
저 여보 내일 큰일도 있고 한데 오늘은 동생 방에서 주무세요.
[…]
맨발ㅣ오늘은 우리 함께 잡시다.
가족이면서 가족이 아닌 가족, 가족이 아니면서 가족인 박근형의 의사 가족적 세계가 가장 신랄하게 드러난 작품이 「대대손손」이다. 자유자재로 시·공간을 이동하면서 3대에 걸친 함경남도 청진 출신의 조씨 집안 내력을 이야기하고 있는 이 작품에서, ‘빛나는 족보’는 그야말로 ‘비굴과 불륜’의 기록이다. 아버지(삼대)와 고모(삼순)는 할아버지(사대)· 할머니(사처)의 자식이 아니라 식민지 조선에 거류했던 일본 사업가 이께다의 자식이고, 일본에 돈 벌러 갔다가 일본 창녀 마이꼬와 결혼했던 아버지(삼대)는 누가 뿌린 씨앗인지도 모르는 아들(이대)을 친아들로 여긴다. 서로 닮지도 않고 피가 섞이지도 않은 가족들이 제사를 올리며 막을 내리는 이 반어적 세계의 기막힘이란!
「대대손손」을 역사의식 부재나 식민 경험이 낳은 비극으로 설명하고, 박근형의 작품 전체에 나타나는 부권의 상실을 역사의식 부재와 식민 경험의 결과인양 해석하고픈 유혹도 아주 없지는 않다. 「청춘 예찬」에서 해일을 편애하던 세계사 선생이 사표를 내고 뉴질랜드로 떠난다면서 “나는 이 나라 포기다. 역사는 힘이 없어. 원래는 그게 아닌데”라고 말할 때, 의식되지 못한 역사가 꺼꾸러뜨린 것은 또 한 명의 ‘사회적 아버지’인 선생이었다.
의사 가족성과 함께 박근형 희곡을 특별나게 만드는 또 다른 특징은, 연극에 대한 자의식이다. 「청춘예찬」에서 아버지와 해일의 싸움을 말리려던 여자가 간질을 일으키며 쓰러진 사실은 앞서 얘기했다. 그런 직후, 학교에서 단체 관람으로 「벚꽃동산」을 보고 왔던 용필이 “관객이 원하는데 씨발 써비스 정신이 하나도 없어! 프로야구나 청춘의 덫이 백배 낫다 씹새끼들!”이라고 욕하는 대사가 뜬금없이 덧대어진다. 이 대사는 아버지와 아들이 개처럼 싸워대고 그것을 말리는 새 며느리가 바지에 똥을 싸며 발작하는, 향기롭지 못한 바로 그 장면 혹은 이 연극에 대한 시의적절한 관객평이다. 영화처럼 호쾌한 볼거리도, 신경숙 소설처럼 연약하고 지친 자들의 감성을 위무해 주지도 못하는 이따위 연극!
「대대손손」의 주인공인 일대와 그의 애인은 가난한 연극 배우며, 이 작품의 서두는 두 사람의 연극으로 시작한다. 그것을 몰래 관람한 일대의 아버지 이대는 “무슨 연극이 그러냐, 도대체 무슨 얘긴지 하나도 모르겠다. 요즘 다들 죽네사네 하는 마당에 참 한심하구나”라면서 “난 또 예술 한답시고 나가길래 무슨 쉬리 비슷한 영화나 만드는 줄 알았지”라고 지청구한다. 이 대목에 작가의 연극에 대한 자의식과 자괴감이 확연하다.
몇몇 대목을 모아 짐작건대, 박근형은 오늘의 한국 연극이 볼거리로 무장한 영화와 달짝지근한 ‘멜로드라마’의 틈바구니에서 질식해 가는 중이라고 보는듯하며, 본 희곡집에는 어떻게 영화적 볼거리에 응전하고 멜로드라마적 관습을 돌파할 것인지에 대한 작가의 고심이 담겨 있다. 때문에 저 위에 인용해 놓은 「삽 아니면 도끼」의 두 장면이 어떻게 연출될 것인지를 상상하면, 웃음이 안 터질 수 없다. 작가는 ‘이런 게 당신들이 보고 싶은 거지? 달짝지근한 거짓화해로 봉합되는 이런 멜로드라마를!’하며, 한껏 조롱하지 않는가? 진정한 연극은 항상 한 시대의 파국을 드러내며, 파국을 두려워하는 대중적 장르의 관습을 전복한다. 『박근형 희곡집 1』이라는 제목에 연이은, 2권이 속히 출간되길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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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