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31일
어떤 책들은 제목보다 부제가 앞으로 읽을 책의 내용을 더 정확하게 요약해 주기도 한다. 타이먼 스크리치의 『에도의 몸을 열다』(그린비, 2008)도 그런 책 가운데 하나다. 제목만으로는 긴가민가하던 것이 ‘난학과 해부학을 통해 본 18세기의 일본’이란 부제가 책의 성격을 명확하게 해준다.
난학이란 메이지 이전, 네덜란드어를 통해서 들어온 실용적인 학술의 통칭이다. 그런데 난학의 출발점이 된 것은 그 무엇도 아닌 한 권의 해부학 서적과 관련된다. 1732년 요한 아담 쿨무스라는 독일 해부학자가 쓰고 G. 딕덴이 네덜란드어로 번역한 『타펠 아나토미아』란 책을, 1774년 에도 시대 중·후기의 양의였던 스기타 겐파쿠와 그 일파가 『해체신서』라는 제목으로 번역하면서 난학이 창시되었다.
1632년에 그려졌다는 렘브란트의 저 유명한 그림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가 웅변하듯이 서양에서는 해부가 꾸준히 시도되어 왔고 서양 의학은 외과를 중시했다. 그러나 동양 의학(한방)에서는 찢고 자르는 신체 절개 따위는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한방의는 약만을 써서 치료하는 사람들이었으며, 외과 기술은 침술사·안마사 등과 같은 무리에 끼어 있는 보조 의술에 지나지 않았다.
동양에서 신체의 내부를 들여다본다는 해부학이나, 찢고 자르는 외과가 발달하지 않은 것은 서양과는 판이한 인식론에 기인한다. 동양에서는 사물에 대한 절개와 응시보다는 ‘전체로서 살아 있는 것’으로 사물을 파악하려는 사고가 우세했고, 내부와 외부를 구별하지 않았다. 오장육부는 자르고 들여다보아야 할 내부가 아니라 그저 기氣로 감지될 것이었다. 또 부처는 인간의 모습으로 표상되지만, 육신을 받은 존재는 아니다. 따라서 중대한 진리를 구하기 위해 신체를 통한다는 관념이 없었다. 몸은 벗어버려야 할 무엇이자 공空에 해당하는 것이다.
반면 서양인들에게 인간의 신체는 우주를 응축시킨 소우주이자 하느님과 같다고 여겨졌다. 성경은 하느님이 인간을 자신의 모습과 똑같이 창조했다고 말하고 있으며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의 성육화는 서양인들에게 인간의 육체를 아는 일이 곧 하느님을 아는 일과 동일시하게 해주었다. 신체가 곧 하느님이라는 관념이 육체에 대한 여러 가지 금기를 만들어 놓은 것도 사실이지만, 인체를 열어서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은 신을 탐구하는 행위로 격상되었고, 해부 작업이 상징하는 합리성은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고리로 열띤 주목을 받았다.
인간의 내부를 적나라하게 열어젖힌 서양의 해부도감과 칼(메스)·가위와 같은 의료기구는 에도 시대의 일본인들에게 서양 문명(난학)에 대한 다음과 같은 강렬한 정의를 낳았다. 즉 에도인들에게 “난학이란 요컨대 어떤 어려움에도 끄덕하지 않고 사물을 여는 것 […] 사물을 엶으로써 ‘내부’를 보고 ‘내부’에 있는 것에 대처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하는 지적인 주장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무라이의 칼을 대신한 서양 해부학(외과술)의 칼(메스)은 에도 시대 후반을 강타하면서, 의학과는 애당초 상관없는 여러 분야로 외삽된다. 일본도 보다 작은 메스로 외양을 가로질러 내부를 보는 행위가 바로 ‘이해’며 나아가 ‘근대 서양 문명’이라는 새로운 사고 체계를 의술과 전혀 무관한 사람들에게까지도 받아들이게 했다. 현실의 경치를 그리지 않았던 화가들이 문인화의 전통을 버리고 사진처럼 분석적인 진경眞景을 그리기 시작한 것도 재미있지만, 명소만 다니던 여행에서 벗어나 아무런 가치조차 없다고 여기던 장소로 여행을 떠나는 여행객의 등장은 무척 흥미롭다. 그것은 오장육부에 대해서만 분석을 했던 한방의 태도를 벗어난 여행이면서 서양의가 인간의 신체를 열어서 속을 들여다보듯이 풍경을 해부하는 일이었다.
해부학적인 관념은 지리학에까지 전파되어, 국가를 신체의 은유로 삼는 논리도 따라나왔다. “신체가 생장하고, 하나의 국가”가 된다는 신체적·유기적 은유 속에서 도로와 강은 혈맥이 되고, 교토는 일본의 심장이 된다. 『에도의 몸을 열다』는 여기서 마무리되지만, 무사도를 대신한 메스가 아시아를 침탈하는 일본도로 되 바뀌는 것은 시간문제였지 않을까? 아시아의 그 어느 나라보다 먼저 서양 문명을 받아들인 일본은 자신을 대동아의 심장으로 여기면서, 여행자가 아닌 정복자가 되어 간 것이다.
4월 3일
메이지 이전의 일본 근대화는 1774년 에도 시대 중·후기의 난학자였던 스기타 겐파쿠와 그의 동료가 『타펠 아나토미아(해부학표)』라는 네덜란드 해부학 서적을 『해체신서』라는 제목으로 번역한 데서 시작된다. 근간 된 타이먼 스크리치의 『에도의 몸을 열다』는 서양의 인체해부도가 여러 분야에서 일본인의 감각을 바꾸어 놓은 사실을 포착한다. 화가들이 문인화를 버리고 사진처럼 분석적인 진경을 그리기 시작한 것도, 명소만 찾아다니던 여행객들이 아무런 가치조차 없다고 여기던 낯선 국토를 탐사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다. 풍경을 해부하듯 하는 이런 의식의 변화는 인간의 신체를 절단하는 서양의 외과 수술과 상통했다.
해부학적 지식은 국가를 신체의 은유로 삼는 논리도 무성히 했다. 오장육부만 중요시되던 한방적 사고관에서 벗어난 해부학적 발견 속에서 도로와 강은 혈맥이 되고, 교토는 일본의 심장이 된다. 『에도의 몸을 열다』는 거기서 마무리됐지만, 일본도를 대신한 메스가 여의봉처럼 자라나 아시아를 침탈하는 일본도로 바뀌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아시아에서 가장 앞서 서양 의학을 받아들인 일본은 자신을 대동아의 심장으로 여기면서, 여행자가 아닌 정복자가 되어 간 것이다.
병원역사문화센터가 펴낸 『동아시아 서양의학을 만나다』(태학사, 2007)는 한국·중국·일본·미국의 학자들이 모여 서양의학의 동아시아 수용사를 공동 연구한 성과물이다. 동양은 오랜 역사 동안 정교화시킨 동양의학이 있었으나, 외과 수술이 전무했다. 거기에 반해 서양의학은 1537년 베살리우스의 획기적인 ‘해부학 혁명’ 이후로 외과 수술의 광대한 가능성이 열렸다. 하지만 그런 서양에서도 외과의는 긴 세월 동안 ‘이발사’ 취급을 받았다. 18세기 말까지만 해도 내과의만 대학에서 학자로 교육받은 뒤 상류계급을 진찰했고, 외과는 대학의 커리큘럼에서 제외된 채 외과의들의 길드에서 기술을 습득하여 대중들을 치료했다.
사정이 급전한 것은 무기의 근대화와 함께 나폴레옹에 의한 대전란으로 부상자가 속출하면서다. 그때부터 유럽의 각 나라는 대학이 외면한 외과를 위해 군대 내에 군의학교를 만들었고, 1870년대가 되어 대학이 외과를 의학의 일부로 받아들이면서부터 유럽 각국의 군의학교는 차츰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외과가 군대와 관련 맺었던 이런 사정은 서양 제국주의가 동아시아로 흘러들 때, 부국양병을 꿈꾸던 동아시아 국가들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메이지 시대에 일본이 수용한 근대 의학 교육은 서양의 의과대학이 아니라 독일의 군의학교의 시스템을 그대로 이식했는데, 군의학교 커리큘럼 속에는 의철학·의학윤리·의학사가 존재하지 않았다. 홀로코스트에 참여했던 독일군 의사나 관동군 세균전 부대를 이끌었던 일본군 의사는 같은 나무의 열매였다. 조선의 경우 일본과 같은 ‘군진의료’를 모방하고 싶었으나 여러모로 여의치 않았고, 대신 선교사들의 ‘선교의료’를 통해 서양의학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일제가 남겨 놓은 군진의료 시스템은 해방 이후, 오늘날의 한국 의과대학 커리큘럼에 뚜렷한 흔적을 남겨 놓았다. 일독을 권한다.
사족으로 윗글을 쓰기 위해 긁적였던 부스러기들: 서양의학은 서양의 동아시아 식민사업이 활발해진 19세기 말부터 동아시아에 유입되는데, 병원역사문화센터의 공동저자들은 그때의 서양의학을 ‘제국의학’이라고 부른다. 식민지에 진출한 유럽인을 현지의 질병으로부터 보호하고, 비유럽 세계에 유럽인의 우월성을 과시하거나 유럽문명을 시혜하기 위해 제국주의 식민정책과 함께 진출한 서양의학을 일컬어 ‘제국의학’이라고 지칭한 것이다. 후술 될 ‘군진의료’나 ‘선교의료’는 ‘제국의학’의 하위 범주다.
4월 7일
우리에게는 소설가로만 알려진 프랑스와즈 사강은 즐겨 희곡을 썼다. 나는 누군가 그녀의 희곡집을 번역해서 출간해 주기를 학수고대한 지 오래다. 그런데 사강의 한참 후배 세대인 아멜리 노통의 희곡 『불쏘시개』(열린책들, 2004)를 읽고 보니, 프랑스에는 사르트르·카뮈·주네처럼 작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 희곡을 써 보는 게 전통인 듯이 여겨진다. 아마 거기는 우리나라처럼 희곡이 천대받거나, 문학 장르 간의 ‘칸막이 현상’이 심하지 않은 모양이다.
3백여 매의 분량밖에 되지 않는 아멜리 노통의 『불쏘시개』는 그 단출한 분량만큼 이야기도 간단하다. 한 명의 교수와 두 명의 남녀 제자(다니엘·마리아)가 사는 도시는 적군에게 2년째 포위된 채 패전을 기다리고 있으며, 겨울이라 날씨는 몹시 춥다. 추위와 배고픔으로 갈 곳이 없는 두 명의 젊은 남녀 대학생은 자신들의 스승인 문학 담당 교수의 집에 더부살이한다. 밖으로 나가면 포탄과 총알이 노리고 있고, 집안은 추위로 얼어붙을 지경이다. 그들이 온기를 얻기 위해 땔 수 있는 것은 가구를 모두 불태우고 난 뒤에도 남아있는 수천 권의 책더미.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받을 수 있는 질문 가운데 ‘무인도에 간다면 어떤 책을 가져갈 것입니까?’라는 질문은 가장 짓궂은 것에 속한다. 아이들은 재미로 돌을 던지지만, 그걸 피해야 하는 개구리는 죽을 맛이다. 도서관을 통째로 옮겨 놓으면 안 되느냔 말이다. 그 질문이 짓궂은 줄 알았던지 아멜리 노통의 『불쏘시개』는 ‘당신이 추위에 떤다면 어떤 책을 먼저 태우겠느냐?’고 묻는다. 질문을 달리한다고 해서 광적인 애서가의 곤란함이 깨끗이 씻겨질 리는 없겠지만, 다행히도 『불쏘시개』는 우리를 또 다른 주제로 이끌어 간다.
두 제자가 교수의 집에서 더부살이하며 교수에게 복종하는 이유는 그들이 어떤 종류의 약자이기 때문이다. 조교이기도 한 다니엘은 강의를 맡기 위해 교수에게 저자세로 복종하며, 그의 애인이기도 한 마리아는 추위를 벗어나고 잠자리를 얻기 위해 교수와 함께 잔다. 어쩔 것인가? 추위를 물리치고 온기를 얻을 만큼 마음껏 불태울 책(지식)이 교수에게는 있지만, 두 제자에겐 없다. 이들 세계에서 책은 곧 권력을 의미하는데, 교수와 제자 사이의 비대칭적인 관계와 ‘지식 권력’이 휘두르는 폭력성을 그녀보다 앞서 극화한 사람은 「수업」을 쓴 이오네스코며, 아멜리 노통의 소설『로베르 인명사전』(문학세계, 2003)은 상당한 경의를 가지고 이오네스코와 「수업」을 언급한 바 있다.
지금까지 내가 읽어본 아멜리 노통의 소설은 지식인과 지식 세계의 위선과 약점을 들추고 조롱하는 일로부터 창작의 동력을 얻고, 독자들과 함께 누릴 기쁨을 찾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적의 화장법』(문학세계사, 2001)은 지식의 자기 기만적인 성격을 보여주며, 앞서 말한 『로베르 인명사전』 역시 학교 교육의 맹점과 교사들의 무능력을 두루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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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