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6일
『장진 희곡집』(열음사, 2008)을 읽다. - 언젠가 이지훈의 희곡집 『기우제』(평민사, 2007)를 읽으면서 “영상적 희곡쓰기와 원작이나 고전의 재구성 혹은 재창조라고도 일컬어지는 상호텍스트성”의 득세는 요즘 한국 연극계에 범람하고 있는 특징이라고 쓴 바 있다. 비록 그 글에서는 우려를 나타내지 않았으나, 현재 우리나라 연극계는 무분별한 ‘영상적 희곡쓰기(작법)’와 고갈된 창조력을 상호텍스트성으로 위장한 ‘번안’이라는 두 뿔 달린 괴물과 싸우고 있다. 때문에 안이한 상호텍스트성에 안주하는 기색 없이 자신만의 이야깃거리를 풀어내고 있는 장진의 다섯 작품은 반갑기 그지없다. 그가 쓴 두 편의 희곡이 OSMU(One Source Multi-Use)의 성공 사례처럼 영화화될 수 있었던 저력도 알고 보면 어떤 상호텍스트성에도 기대지 않은, 자신만의 콘텐츠였기에 가능했다.
그런 뜻에서 장진은 두 뿔 달린 괴물의 한쪽 뿔은 완전히 제압한 작가다. 하지만 그가 영화감독을 겸하고 있기 때문에 자유롭지 못한 게 아니라 오히려 제휴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장진의 극작은 영상적 희곡쓰기로부터는 그리 자유롭지 못한 게 사실이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고급 호텔에서 발견된 미모의 여성 카피라이터의 죽음을 두고 벌어지는 수사극이다. 그런데 작가는 이 수사극에 텔레비전 중계를 덧붙인다. 즉 경찰의 수사 과정을 실시간으로 중계하면서 아나운서와 범죄 전문가가 형사의 취조 과정을 해설해 주거나, 시청자의 의견을 인터뷰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각종 영상 기법을 응용해서, 장면을 반복하거나 요약하는 방식으로 사건과 시간을 되돌려 보여준다(rewind). 이 작품에서처럼 사건과 시간을 자유자재로 되돌려 보여주는 것은, 연극 표현의 확장일까, 극작상의 부실일까?
연극 무대에 촬영 현장(카메라)을 도입해서, 허구와 실재의 이중놀이를 한 대표적인 작품은 이현화의 「불가불가不可不可」였고, 방송 미디어가 현실을 왜곡·조작하는 과정을 보여준 작품으로 이강백의 「쥬라기의 사람들」이 있으나, 아무도 그 작품을 영상적이라거나 영상적 희곡쓰기라고 말하지 않는다. 반면 장진의 「박수 칠 때 떠나라」는 연극 무대에 촬영 현장(카메라)을 도입하거나 미디어가 극 진행의 한 축을 도맡으면서도, 허구와 실재의 이중놀이를 보여준다든가 미디어의 전횡이나 위선을 보여주지 않는다. 단지 그것들은 이야기의 원활한 진행과 볼거리를 위해 동원됐다.
그와 유사한 프로를 모 케이블 방송에서 방영하기도 했던 만큼, 경찰의 수사를 실시간으로 생중계한다는 발상이 억지스럽다는 뜻이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실시간 중계가 극 진행의 한 축을 맡으면서 얻는 극작상의 효과가 무엇인지다. 그 호들갑스럽고 관음 쾌락적인 방송 때문에, 고아 출신의 여성 카피라이터가 결행할 수밖에 없었던 죽음의 의미는 옳게 탐색 되지 못했고, 그 누나를 죽이려고 했던 남동생의 심리 또한 제대로 다루어지지 못했다.
「박수칠 때 떠나라」에는 이야기를 앞으로 밀어내지도 못하면서, 그저 영상 기법이 자유자재로 보여줄 수 있는 ‘잔재미’를 활용하기 위해 되풀이되는 불필요한 장면이 많고, 내용은 물론 주제와도 상관없는 몽타주(삽입)도 빈번히 출몰한다. 그 가운데 2-1장은 정유정이 칼에 찔려 죽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의도를 알 수 없는 대표적인 장면인데, 사건과 시간을 ‘되돌려- 되풀이’ 보여주는 위와 같은 몽타주는 「택시 드리벌」에서 조폭이 등장하는 장면에서도 애용됐다.
영상 기법이 작중 필연성이나 작가의 자의식 없이 자주 남용되는 것은 극작상의 부실과 내용의 빈약함도 원인이겠지만, 또 다른 중대한 이유도 있다. 「박수칠 때 떠나라」에 등장한 방송국의 연출자가 “일단 시청자들의 사고가 복잡해졌거든”이라고 말하는 것을 흉내 내어 말하자면, ‘요즘 관객들은 볼거리를 요구하거든!’ 실제로 장진의 모든 작품 속에는 많은 영화가 거론되고 있는데, 그것은 작가가 그만큼 영화에 패배할 수밖에 없는 ‘연극의 운명’을 강박적으로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그 강박을 이해하지만, 영화를 상대하기 위해 연극이 영상 기법을 차용한다는 것은, 이미 지는 게임을 더 하자는 게 아닐까?
숨 가쁜 영상 기법에도 불구하고 장진의 희곡은 연극적이라기보다는 서술적이다. 「아름다운 사인」과 「웰컴 투 동막골」은 각기 유화이와 작가의 해설로 시작되고, 해설을 맡은 두 인물에 의해 연극이 진행된다. 또한 장진의 작품은 무대와 관객이 단절된 폐쇄형 공연이 아니라, 무대와 관객이 서로 소통하는 개방형 공연을 지향하는 것도 특징이다. 「박수칠 때 떠나라」와 「택시 드리벌」은 똑같이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서사극도 마당극도 아니면서 나레이션의 역할을 겸하는 주인공의 출현이나 관객의 참여를 이끌어내려는 위의 작품들은 빈약한 내용의 보완물인 한편, 요즘 관객들의 요구에 응하는 작가의 전술로도 보인다.
영화와 연극의 차이는 전자가 관객을 몰입시킬 수 있는 굉장한 볼거리(spectacle)를 가지고 있는 반면 연극은 영화의 볼거리에 비해 왜소하다. 그래서 작가는 볼거리를 요구하는 관객에게 아예 ‘이것은 연극이오’라는 극장주의theatricalism 방식으로 응대한다. 다시 말해 작가는 ‘볼거리-몰입’과는 반대로 해설자를 내세우거나 서사극적인 기법을 통해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는 방식으로 볼거리를 얻으려는 관객의 호기심에 부응하는 역설적인 전략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앞서 지적한 「박수칠 때 떠나라」의 2-1장과 「택시 드리벌」에서 조폭이 등장하는 장면은 그래서 재론할 필요가 있다. ‘되돌려- 되풀이’를 보여주는 그 장면은, 그 자체로 가장 자본주의적인 영상기법(몰입)과 거기에 저항하는 서사기법이 합체·혼용된 장면이다. 그런데도 그 장면이 관객에게 몰입 혹은 쾌락의 효과만 준다면, 그것은 영상 기법의 흡인력이 ‘지금 여러분은 한편의 잘 연습된 연극을 보고 계십니다’라는 서사극적 몰입에의 저항을 훨씬 상회하기 때문이다. 바로 지는 게임이다.
영상적 희곡쓰기와 상호텍스트성(번안)은 우리 연극을 골병들게 하는 두 뿔이다. 그런데 굿판까지 동원된 「박수칠 때 떠나라」, 또 뮤지컬도 아니면서 뮤지컬 관습을 관객과 아무런 약속 없이 쓰고 있는 「아름다운 사인」을 보면, 무지향적인 ‘양식상의 혼합’이라는, 우리 연극계가 품거나 다스려야 할 뿔 하나가 더 솟아났다는 기우를 하게 된다. 어쩌면 이런 양식상의 혼합 역시 영상 시대에 대한, 영상 세대의 연극적 응답이나 저항일까?
이상하게도 장진의 희곡은 외부가 없다. 「아름다운 사인」의 부검 결과는 “자살”에서 “타살”로의 상징적 변화를 동반하지만 여섯 여자와 유화이의 심정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굿이라는 ‘기계 장치의 신’을 빌려 범인을 잡긴 하지만 정유정의 자살 동기는 극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극 밖에 있다. 「택시 드리벌」은 현실 풍자가 살아있는 듯하지만 극이 가리키는 시계는 장덕배가 떠나온 추억의 백운산 시절에 고착되어 있다. 「웰컴 투 동막골」은 어떤 이데올로기도 파고들지 못하는 혈연사회를 재현하고 있으며, 「서툰 사람들」에서는 여선생이 도둑질하러 들어온 도둑과 동화同化되어 버린다. 동화童話인 것이다.
2월 1일
조선의 임금 선조宣祖는 16세기 후반에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시문은커녕 한문조차 제대로 읽지 못한다는 보고를 받고 “그는 정말 사람인가?”라고 물었다. 흔히 조선은 선비(士), 일본은 사무라이(侍)라고 하는데 위의 일화는 두 문화의 차이를 확연히 보여준다. 조선의 임금이 공부하는 임금 즉 학자군주였다면, 일본의 경우는 힘만 있으면 누구나 패자覇者가 될 수 있었다. 사무라이는 무사 중에서도 상급 무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의외의 승리를 거둔 직후 미국에 체류하던 기독교 신자이자 유명한 교육자였던 니토베 이나조는 ‘일본은 특정한 종교가 없는데 일본인의 도덕관은 어디서 오느냐?’라는 서양친구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유려한 영문으로 『무사도』를 썼다. 거기엔 ‘무사는 주군에게 충성해야 한다’, ‘무사는 부모에게 효도를 다해야 한다’, ‘무사는 사적 욕심을 버려야 한다’, ‘무사는 부귀보다 명예를 소중히 해야 한다’ 등 사무라이의 기본적 규범과 가치가 소개되고 있다.
붓과 칼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지만, 니토베 이나조가 쓴 것대로라면 선비정신과 무사도는 거의 흡사하다. 미처 인용하지 않았지만 ‘패배한 적에게 연민의 정을 베풀라’는 정도만 무사도에 해당할까, 위의 문장 중에 ‘무사’가 ‘선비’로 바뀐다고 해서 오해가 생길 정의는 없다. 제대로 된 선비나 무사는 물욕을 경계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더욱이 이들은 임금을 위해 충성을 바치면서 주군이 잘못했다고 생각하면 죽음을 무릅쓰고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차이가 있다면, 선비는 사약을 받았고 무사는 할복을 한 정도일까?
조선의 선비는 불교국가인 고려가 망하고 성리학에 바탕을 둔 조선이 개국하면서 생겨났다. 그들은 도덕성과 수신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성인聖人이 다스리는 나라를 꿈꿨다. 반면 무사계급은 자신들의 토지나 재산을 지키기 위한 농민이나 지방의 수령으로 파견된 황족이나 귀족이 지방에 눌러앉으면서 생겼다. 공자나 주자를 경전으로 삼은 선비와 달리 사무라이의 사상은 주로 손자병법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준비된 전쟁을 하라’던 손자의 가르침에 따라 사무라이는 전쟁할 경우를 대비해 버틸 수 있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평소 자신의 영지에서 농업 발달에 힘을 기울였고 상업 발전을 도모했다.
한국으로 귀화한 일본인 저자 호사카 유지는 『조선 선비와 일본 사무라이』(김영사, 2007)를 통해 앞서 거론했던 니토베 이나조처럼 사무라이를 무슨 대단한 ‘도道’로 여기는 일본인의 의식을 공박한다. 원래 옛 무사의 모습에서는, 무사도의 핵심이라고 설명되는 주군에 대한 윤리적 충성 의식이 높지 않았다는 것이다. 적어도 임진왜란이 끝난 무렵까지는 후세에서 말하는 것처럼 ‘배반행위는 비겁행위다’, ‘무사는 주군과 생사를 같이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임진왜란을 계기로 납치된 조선 유학자들이 일본에 성리학을 전하면서, 무사의 사고방식에 일대 전환이 일어났다. 무사들이 성리학의 기본 개념을 받아들이면서 비로소 ‘선비가 칼을 차면 사무라이가 된다’는 의식이 생긴 것이다.
임진왜란 발발과 메이지 유신은 물론 이후의 대만 출병과 정한론征韓論의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사무라이에 대해 알아야 한다. 또 ‘전쟁국가’ 일본을 알기 위해서도 사무라이식 국가경영의 특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쟁을 할 수 없게 규정된 ‘평화헌법 9조’를 개헌하려 는 일본의 현재 사정을 보면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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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