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0일
성지혜의 『은가락지를 찾아서』(문학사상사, 2006)를 읽다. - 이 작품은 아주 정통적인 소설이다. 우선 가족이 나오고, 가족의 비밀이 나오는데, 그것의 전개 과정은 1940년대 말부터 1951년 1·4 후퇴까지의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한다. 이 소설의 서두는 시작부터 무척 흥미롭다. 인사동의 여러 골동품점을 들리기 위해 나섰던 주인공 최우제는 갑작스런 폭우를 만나게 되고, 근처에 있던 미국 여성이 우산을 씌워 준다. 그때 그는 우산을 든 미국 여성의 겨드랑이에서 ‘암내’를 맡게 되고, 성욕을 일으킨다(두 사람은 훗날, 서로 정사를 나누는 사이가 된다): “나는 제인의 겨드랑이에서 풍겨 나오는 암내에 코를 컹컹거렸다. 아랫도리가 뻐근해지고 감당하지 못할 성욕이 발동했다.”(31쪽. 이 책의 서두엔 여러 종류의 골동품을 찍은 화보가 실려 있다. 그래서 소설의 본문은 31쪽쯤에서부터 시작한다)
우연히 만난 서양 여자의 암내(혹은 서양 사람의 ‘노린내’)와 우제의 갑작스런 ‘성욕’간의 관계는 맥락 없이 튀어나온 듯하지만, 작품을 읽어 나가다 보면, 작가의 서툰 도발이 아니라, 소설의 중요한 뼈대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제의 어머니는 경남 진양군 대곡면 단목마을의 최씨 집 외동아들과 결혼하였으나, 아들(우제)이 여섯 살 때 허약한 남편을 여의게 된다. 그러고 난 직후, 경찰서의 부탁으로 6·25 참전 중에 부상당한 미국 병사 마이클 오닐을 맡아 집안에서 가료하게 된다. 우제의 어머니인 수연에게 연정을 품게 된 마이클 오닐은 어느 날 “당신 몸에서 좋은 향기가 나는군요”라고 추파(구애)를 던지는데, 이 대목이 재미있다: “다른 어떤 찬사보다도 그 말 한마디가 수연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 좋은 향기라니? 고약한 냄새에 주눅이 들어 기를 펴지 못하고 지낸 세월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겨드랑이를 씻는 고생을 감내해도 냄새는 한시도 떠나갈 날이 없었다. 다른 사람 앞에 바로 서지도 못하고 움츠린 자세로 지내야 하는 건 고역이었다. 자신의 치부를 가장 아름다운 말로 표현하며 접근하는 외국 남자가 진정 말벗으로 여겨지는 순간이었다.”(140쪽) 우제의 어머니는 암내가 심했으나, 외국인 마이클 오닐은 그것을 ‘향기’로 받아들인다. 그것이 두 사람을 연결하는 촉매였으며, 결국엔 정사로 발전하게 한다.
마이클 오닐이 이국 여성의 암내에서 향기를 맡았던 게 일종의 오인인 것처럼, 아들 우제 역시 서양 여성의 노린내에서 어머니의 ‘냄새’를 맡는다. 서양 여성의 노린내로부터 어려서 사별한 어머니의 냄새를 느끼는 우제는 뉴욕과 로스앤젤레스에 파견 근무를 하던 10년 동안, ‘모성’을 찾아 백인 여성들과 동침한다: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몇몇 백인 여자들과 외도를 했다. 나는 어머니의 체취를 그리워하듯 암내 풍기는 여자들을 원했으며, 그런 여자를 찾기 위해 굳이 헤맬 필요는 없었다. 만나는 백인 여자들마다 암내를 풍기고 있었다.”(168쪽) 아, 오랜만에 만난, 너무 재미있는 작품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팀 라헤이·제리 젠킨스의 『레프트 비하인드』(홍성사, 2003)와 루 살로메의 『우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가』(문예출판사, 1978, 2판 1993)를 번갈아 읽었다. 일찍이 나는 이런 짓거리에 ‘독서의 리모트 콘트롤화化’라는 이름을 붙여 놓았다. 루 살로메가 스물세 살에 썼다는 『우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가』는 전형적인 독일 교양소설이다. 근대적인 감정으로서의 ‘고독’이 탄생하는 풍경이 무척 흥미롭다. 신의 죽음, 가족이나 연인과의 결별… 오로지 나는 부스러질 듯한 고독만을 실감한다. 그건 ‘행복’이란 감정과는 다르다. 근대인은 자신의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이 처해있는 고독의 상태를 한껏 추앙한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신도 공동체도 없는 고독 속에서 그가 마주하는 것은, 자연이다. 고독한 주인공은 자연의 변화에 민감하고, 자연을 찬미한다.
『레프트 비하인드』는 아주 황당하다. 하지만 기독교 작가들이 노골적인 선교를 목적으로 쓴 ‘묵시 문학’이 어떤 건지를 보여주는 문서로 대하면 매우 재미있다. 휴거와 함께 적 그리스도가 나타나는데, 적 그리스도는 이스라엘과 7년 협정을 맺고 지구를 정복하고자 한다. 적 그리스도의 특징은 “로마 제국의 혈통”을 물려받은 자로 유엔 사무총장과 같은 세계적인 인물로 위장하는데, 이 소설에서는 루마니아 대통령이 적 그리스도로 등장한다. 일부 교회의 입장을 대변하는 이런 문서가 소설로 발표되는 것에는 문제가 있지 않을까? 교인들에게 이것은 예언서도 아니고(소설이니까), 허구도 아니기 때문에(묵시를 전하고 있기 때문에) 혼란스러운 텍스트다.
1월 16일
로랑 그라프의 『행복한 나날』(현대문학, 2005)을 읽다. - 이 소설은 유머가 풍부하면서도, 지적인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소설이다. 주인공 앙트완은 친구들이 자동차에 반해 있을 열여덟 나이에, 우연히 물려받은 막대한 유산의 일부로 자신의 묘지를 산다. 그는 죽음에 대한 “쓸데없는 선견지명”, 동물학자적인 시선으로 인간을 관찰한 끝에 “동물과 다름없는 인간의 태생적인 부조리함”을 깨닫고, 일찍이 우리 인생이 “아, 이 알량한 인생!”임을 알게 된 비관주의자다.
12년의 무덤덤한 결혼 생활을 마친 그는 미련 없이 이혼을 하고, 서른다섯 나이에 ‘행복한 나날’이란 이름을 가진 양로원에 들어간다. 거기서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의 다짐을 되뇐다. “나의 신랄함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인간의 비참한 삶의 조건 뒤에 감추어져 있는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며 “인간 속에 깃들어 있는 인간을 찾아내기 위한 작업. 감정을 배제하고 냉정하게 바라보는 외과의사의 관점”으로 “인간의 삶이란 과연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싶다고.
양로원에서 하루하루 죽음에 다가가는 노인들을 보면서 앙트완은 “죽음에 가깝게 다가가는 우리는 한없이 미약한 존재라는 사실 외에 우리가 다른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그가 앞서 말한 것과 같은 비관주의자가 되지 않는 것은, 죽음 너머에 있는 “무한성과 자기 자신을 어떻게든 연결시키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것이다. 이때 바다는 자신이 명확히 감지할 수 있는 무한성으로 실체로 다가온다: “바다는 사람들에게 겸손을 가르치고, 사람들은 바다 앞에서 왜소함을 느낀다.”, “바다, 바다는 아름답다. 파도와 파도소리, 그리고 수평선.”
아주 오래전에 번역된 장 필립 투생의 『욕조』는 파스칼적인 교의로 충만했다. 그런데 이번 작품에서 투생의 ‘욕조’보다 조금 더 큰 ‘양로원’을 선택한 로랑 그라프는 더욱 파스칼적이다. 우선 “평생 나는 나를 죽도록 내버려두었다”라거나 “인간은 전체 속에서 별 볼일 없는 하나의 미미한 요소, 더구나 의식이라는 것을 갖춘 보잘것없는 존재로서 시시하게 살도록 만들어진 존재에 불과한 것일까?”라고 회의하는 비극적인 인간 인식이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앞의 인용문에서 “의식”이 강조되었듯이 “나는 운명을 내 손아귀에 움켜쥐고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 너머에도 길이 있는지, 전망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관찰자의 입장에 섰다”고 매번 말하는 로랑 그라프는 인간의 위대함을 사고思考에서 찾은 파스칼을 다시금 연상시킨다.
그리고 로랑 그라프는 “달리 뾰족한 수가 없으므로 알 수 없으나, 우리를 인도하기 위한 좋은 말씀을 전파하는 구세주를 기다려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인간의 끊임없는 불행과 거짓 행복을 폭로하면서, 신만이 인간의 절대 선이라고 갈파한 파스칼의 호교론에 다가간다(그의 ‘바다’ 예찬은 그러므로 겉멋으로 말해진 게 아니다. 파스칼은 신이 너무 멀리 있기 때문에, 신과 자연에 대하여 구별 없이 이야기 했다.)
『욕조』의 주인공이 마지막엔 욕조에서 나오듯이, 『행복한 나날』의 주인공 역시 양로원에서 나온다. 변덕스럽게도 양로원이 어린이들을 위한 여가활용캠프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때 앙트완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를 세상에 묶어놓는 닻줄을 풀고 흐름에 몸을 맡겨볼 필요도 있다.”
이 소설과 함께 읽은 또 다른 소설은 와타야 리사의 『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황매, 2004)과 제니 에르펜베크의 『늙은 아이 이야기』(솔, 2001). 우연히 동시에 읽게 된 세 소설은, 놀랍게도 발상이나 소재가 비슷하다. 『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은 소위 은둔형 외톨이라고 풀이되는 ‘히키코모리’ 얘기로, 작중의 풀이에 따르면 히키코모리란 “이쪽 세계에서 이미 모습을 감추고” “아예 이쪽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된 사람이다.
『늙은 아이 이야기』는 아동 복지원에 수용된 열네 살짜리 소녀의 얘기다. 그녀는 한밤중에 상가 한복판에서 빈 휴지통을 쥔 채 발견되었다. 그런데 그녀는 누구인가? 갑자기 “일어”나지를 못하고, “피부에 주름”이 생기고, “생리가 없”어지고 불시에 “성인의 얼굴”로 늙어가는 이 소녀가 복지원의 병원에 누워 있을 때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병실만큼 세상이 저 멀리 바깥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장소는 없다. 그곳은 보호의 장소였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보호받는다. 세상이 아니면 어디로부터 보호를 받는단 말인가.”
옮긴이는 이렇게 썼다: “아동 복지원 전체를 구동독사회에 대한 알레고리라고 한다면 이 ‘상가’는 통일 이후 구동독인이 직면하게 된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상가’ 한복판에서 미아로 발견된 ‘늙은 아이’는 새로운 사회에서 미처 적응하지 못한 구동독인의 혼란한 심리 상황을 구체화한 인물 형상이다. 아동 복지원 울타리 안에서 언제까지나 열네 살짜리 소녀로 머물려던 이 ‘늙은 아이’의 헛된 노력과 좌절은 구동독 출신 동향인들에게 과거에 대한 향수가 부질없는 꿈일 뿐임을 알리려는 작가의 뜻을 함축하고 있다.”
의사가 ‘늙은 아이’에게 “이분이 당신의 어머니”라고 소개하자 “아, 당신이 내 어머니라고요. 소녀였던 여자가 그렇게 말하고 아주 천천히 눈을 뜬다. 당신을 도무지 기억할 수 없네요”라고 말한다. 이 대목은 ‘어른들의 세계(자본주의)’로부터 퇴행하여 사라지고 싶다는 꿈을 앞서 실천한 카프카의 「변신」을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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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