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7일
김태균의 『빨리 빨리와 전통사상』(양림, 2007)을 읽다. - 이 책을 두 번 읽었다.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저자는 2001년에「한국인의 특성과 고도 성장의 관계」라는 논문을 발표한 이래로 줄기차게 “한국의 ‘고도 경제 성장’과 ‘샴페인을 빨리 터뜨린 것’이 ‘빨리 빨리’의 특성” 때문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저자만 있는 게 아니라, <파이낸셜 타임즈>와 같은 외국 언론도 있다. 영국의 그 경제 신문은 한국인들의 ‘빨리 빨리’ 특성에 유일무이한 고유성을 부여하기 위해서인 듯 아예 ‘Balli, Balli’라는 한국어 음가를 그대로 사용하여, ‘빨리 빨리’야말로 한국을 “빈곤 국가에서 아시아 3위의 경제대국으로 급속히 발전”하게 해준 탁월한 추진력이라고 분석했다.
굳이 학자나 외국 언론이 나서지 않더라도, 한국인들이 ‘빨리 빨리’에 인이 박혀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나만 해도 그렇다. 크게 바쁜 일이 없이 느릿느릿 길을 걷다가도 멀찍이 있는 횡단보도 신호등에 푸른불이 들어오면 갑자기 발걸음이 빨라지지 않던가. 지하철을 타기 위해 역사에 들어섰을 때도 그렇다. 어느 방향으로 가는 전철인지도 모르면서, 전동차가 들어오는 소리만 들리면 마치 세상에서 가장 급한 용무가 있는 사람처럼, 혹은 그게 막차이기나 하듯 체면 불고하고 다급히 계단을 달려 내려간다.
이 책은 “무엇이든 빨리하려고"하고 “매사에 급하기만 하는” 한국인들의 습성 내지 문화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분석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빨리 빨리 병病’이라고 까지 폄하해 부르고 나아가 한국인의 급한 습속을 “의학적 질병”이라고 까지 부르는 모양이지만, 저자의 생각은 다르다. 한국인의 ‘빨리 빨리’는 현실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해서 생긴 한국인 고유의 문화요 특성이며 가치관이다. 어떤 민족도 자신의 문화나 특성 또는 가치관을 병이라고 부르지 않는 게 맞다면, 한국인이 ‘빨리 빨리’를 치유해야 할 병으로 여기는 것은 그 자체로 잘못된 태도이자 “우리가 우리의 문화를 잘 모르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 민족에게는 창조신화가 없다. 단군신화를 보면 환웅이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세상을 탐[數意天下 貪求人世]”하므로 아버지 환인이 환웅을 땅으로 내려 보낸다. 대개의 신화에서는 인간세상을 신이 창조하지만, 우리의 건국신화에는 신이 우리 민족을 창조했다는 말이 없다. 우리 민족의 신화는 “신과 인간이 창조와 피조물의 관계로 맺어진 것”이 아닐뿐더러, 신이 인간 세계를 탐내서 땅으로 내려온다. 바로 이 때문에 한국인들에게는 내세來世 개념이 없다: “(…) 아마도 내세의 개념은 불교가 유입된 후에 생긴 것 같다. 내세가 없으니 인간은 이승에서 가족과 이웃과 함께 살다가 죽게 되면 육체는 없어지고 영혼은 자손들과 함께할 뿐이다. 내세가 없으니 죽어서 신 앞에 불려가 심판받을 일도 없고 벌을 받을 일도 없다. 그저 살아 있는 동안이 내 존재가치의 전부다.”
한국인은 유사이전부터 내세 관념이 없는 신화를 만들었고, 바로 그 때문에 ‘현세에서 복을 받고 잘 살자’는 현세구복적인 성향이 어느 민족보다 강하다. ‘쇠똥 말똥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 ‘잘 먹고 죽은 귀신은 화색도 좋다’, ‘죽은 정승이 산 개만 못하다’ 등의 속담은 모두 한국인에게 ‘죽음 이후’가 없기 때문에 생겨난 말들이며, 한국인의 ‘빨리 빨리’ 습속과 문화는 그런 가치관의 발현이다: “이렇듯 현세가 중요하고 현세에서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중요하니 바쁘지 않은 것이 없다. 인생은 유한有限하기 때문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 얼마 남지 않은 내 인생에서 빨리 서둘러 남보다 더 잘 살려고 하니 모든 것이 급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을 급히 해야 할지도 모르는 순간에도 항상 마음은 쫓기듯 급하다. 무언지 모르지만 남보다 더 서둘러야 하고 급히 해치워야 한다. 무언지 모르지만 남에게 뒤지면 안 된다.”
어떻게 보면, 한 나라의 민족성을 분석하는 일은, 자국의 지식인이 할 수 있는 손쉬운 여기일 수 있다. 그런 작업은 하나의 특성(민족성=빨리 빨리)을 과장한 다음, 그 특성이 비롯된 하나의 원인(내세 개념 없음)을 제시하고, 그 원인이 낳은 피상적인 현상들(현세구복적 성향)을 얼기설기 엮는 일로도 가능하다. 이 책 또한 그렇게 읽힐 소지가 있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작심하기만 한다면 한국인에게는 내세가 없기 때문에(원인), 죽음에 저항하기 위해 ‘느릿느릿’한 문화와 습속이 만연했으며(민족성), ‘양반은 아무리 급해도 뛰지 않는다’거나 ‘오늘만 날이냐?’라는 식의 게으름이 미덕이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피상적 현상들).
그러나 이 책은 그처럼 쉽게 조롱당할 책이 아니다. 이런 대목은 한국인의 민족성을 떠나서도, 참 재미있게 읽힌다: “‘잘살아야 한다’는 한국인의 대명제는 이미 사회적 과제가 된 지 오래다. 그러면서도 고생스러운 과정을 거쳐 성취하려는 노력은 드물다. 이 역시 ‘잘사는’ 것에 배치되기 때문이다. ‘잘산다’는 말에는 ‘고생스럽지 않게 산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비록 나중에 잘 살기 위해서 현재 고생하는 것이 논리적으로는 맞는 말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고생하지 않고 잘 살 수 있다면 더 좋다.”
이 책을 두 번 읽게 된 까닭은 ‘빨리 빨리’에 대한 분석이 어려워서가 아니었다. 그건 이 책의 ‘미끼’ 주제였을 따름이다. 독자가 그 미끼를 단단히 물고 나면, 저자는 좀 더 무거운 주제로 육박해 들어간다. 예컨대 한국인의 현세구복적 지향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뿌리부터 헤치는지에 대해: “‘잘 산다’는 것이 너무도 소중하기에 당장 조금이라도 경제적 윤택을 이루면 그 저변의 문제점은 따져보지도 않고 그 시대의 비민주적 폭정을 아무것도 아닌 양 외면한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도입으로 그동안 존재하지 않았던 경제 지상주의가 한국에서 태어난 것이다. 그로 인해 민주라는 이름으로 다수의 횡포가 수없이 자행되었다.”
올해(2007년) 9월에 출간된 이 책은, 막 치러진 17대 대통령 선거의 결과에 딱 들어맞는다. 전과가 수두룩했던 후보가 이번 선거의 승자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이러했다: “인생은 유한하며 살아 있는 동안에 복을 받고자 하는 한국인의 성향은 변함없이 여전하다. 심지어 민주주의체제에서 살고 있는 현재 한국인들의 다수가 강압적이거나 도덕성이 결여된 정권이라도 경제만 좋아진다면 수용할 정도다. 경제에 대한 한국인의 욕구가 얼마나 강한지를 ‘강압적 및 도덕성의 개념’과 대비시켜 설문조사한 결과, 1,894명의 응답자 중 62.04%가 강압적이고 도덕성이 결여된 정권이라도 국민의 경제생활을 우선하는 정부를 택함으로써, 현실의 경제생활에 얼마나 많은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가를 알려주고 있다 (…) 이러한 특성 때문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엄청난 독재 강압정치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정부의 경제정책이 실패하여 국민생활이 도탄에 빠졌을 때 정권을 강제로 퇴진시키는 문제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입장이 응답자 1,976명 중 41.86%를 차지하여 부정적인 입장인 36.09%보다 앞서고 있다. 이 점은 한국정치의 제1목표가 무엇이라야 하는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미끼에 다름없었던 ‘빨리 빨리’라는 분석을 넘어 저자가 강변하고자 하는 이 책의 핵심은 “서구 자유민주주의의 문제점들을 극복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 몸에 맞는 제도를 도출하기 위해 전통사상의 재조명을 통한 한국적 민주주의 제도를 창조”해야 한다는 역설이다. 학술상 ‘유교 민주주의’라고 말해지는 저자의 담론은 내게 좀 더 많은 공부를 하게 만드는데, 서구에서 수입된 자유민주주의가 한국인의 집단 성향을 개인주의 성향으로 바꾸어 놓음과 함께 현실구복적 성향을 더욱 부추겼다는 진단이나(동양의 정치는 ‘도덕의 추구’), 현실구복적인 성향이 강한 한국인들에게 지방자치는 지역 이기주의와 부정·부패를 더욱 부풀리는 잘못된 제도라는 지적은 새겨들을 만하다. 결국 이 책을 두 번 읽게 만든 것은, 전통사상과 한국인의 고유 가치관에 대한 검토 없이 이루어지는 한국 정치 또는 현대 정치에 대한 반성과 심문이다.
사족. 내세가 없으니, ‘빨리 빨리’는 오히려 죽음을 재촉한다. 이승에서의 삶을 연장시켜주는 것이 ‘느릿느릿’이라는 것을 황진이의 시조 한 수가 역설해주지 않는가?: “청산리 벽계수야 쉬이감을 자랑마라/일도창해 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하리.”
12월 29일
아니 에르노의 『집착』(문학동네, 2005)를 읽다. - 이 책의 판권란에는 이 책을 산 헌책방의 이름과 날짜가 적혀 있다. ‘2007. 4. 7 책나라’ 원고지 300매도 채 안되는 이 얇은 책(하지만 책 표지에는 떳떳이 ‘장편소설’이라고 씌어 있다)은 여태껏 방치되어 있다가, 한 일주일 전에 작가의 문학론집이라 할 『칼 같은 글쓰기』를 읽고 나서, 다시 내 눈에 띄었다. 딴은 작품을 통해 작가의 문학론을 확인해 보자는 것이었다.
의도가 불순해서였던지, 첫 장 펼치는 순간부터 소설을 읽는 흥미는 휘발되고 없었다. 아니, 실제로 재미가 없기도 했다. 멀어져 가는 애인에 대한 구질구질한 미련. 그걸 들어주어야 하는 독자는 이미, ‘책값’까지 지불한 가장 재수 없는 인질이다!
아니 에르노의 이 소설 역시 ‘자전적 허구’로 분류될 수 있지만, 작중의 어느 구절은 『칼 같은 글쓰기』에서 펼쳤던 논리, 즉 “‘나’를 말하거나 ‘재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의 조건이나 고통 등과 같은 더 방대한 어떤 리얼리티 속에서 ‘나’를 상실”하고자 했던 작가의 ‘반 자서전적 전략’을 상기시킨다: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더 이상 나의 욕망, 나의 질투가 아니라 그저 욕망, 질투에 속하는 것이고, 나는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난 곳에서 작업하고 있는 것이다.”
위의 인용문은, 이번 작품 역시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하지만 그것은 ‘나만의 특별한 경험이 아니라, 이별을 경험한 어느 연인들이나 다 함께 느끼는 것’이며, 이번 소설을 통해 ‘헤어진 연인에 대한 집착의 원형’을 보여주고자 했다는 작가의 의중을 싣고 있다. 하지만 작가 자신이 하소연했듯이, 독자들은 이 소설을 ‘아니 에르노의 얘기’로 읽는다. 이런 현상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는 많은 이론(문학론)이 다 그 사람의 ‘욕심’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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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