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0일
아니 에르노의 『아버지의 자리』(책세상, 1988)를 다시 읽다. - 아니 에르노의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단순한 열정』(문학동네, 2001)은 당연히도, 아직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의 자리』로 좋은 기억을 가졌던 나는 『단순한 열정』을 읽고 나서, 작가에 대한 흥미를 꺼버렸다. 굳이 설명하자면, 『아버지의 자리』와 『단순한 열정』 사이에 나의 ‘포르노’가 있었다. 넌더리가 났다.
『아버지의 자리』에는 비슷한 분량의 중편인 「아버지의 자리」와 「어떤 여인」이 함께 실려 있다. 작가로 하여금 두 작품을 쓰게 한 것은, 1967년과 1986년, 67세와 70세 나이로 타계했던 작가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이다. 하므로 이런 질문은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두 작품은 작가의 전기적 사실에 얼마만큼 근접하는가? 어디서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느 부분이 허구인가?’ 「어떤 여인」의 말미에 작가는 이렇게 쓴다: “이것은 전기도 아니며, 소설도 물론 아니다. 아마 문학, 사회학 그리고 역사 사이의 그 무엇일 것이다.”
작가의 부모는 가난한 시골 농군의 자식들이었고, 두 사람 모두 열두 살 때 학업을 중단한 반문맹자였다. 학업을 중단한 두 사람은 부농의 농장에서 품을 팔다가 밧줄 제조소에 취직하거나(아버지), 마가린 공장에 취직했다(어머니). 뒤늦게 밧줄 제조소에 합류한 어머니는 아버지를 만나 1928년에 결혼을 한다. 결혼 직후 두 사람은 조그마한 카페 겸 일용품점을 냈으니, 그들은 차례대로 농부→공원→자영업자로 신분 상승을 한 것이다(말이 좋아 자영업자지, 매상이 시원치 않을 때 아버지는 공장으로 일을 나갔다).
작가는 그런 집안의 딸로, 고향을 떠나 부모가 받지 못한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행운아였다. 그녀의 부모는 이렇게 희망한 것이다: “[아버지는] 내가 작문을 하나 할 때마다 칭찬을 받고, 나중엔 시험마다 합격하니까 그만해도 감지덕지하여 내가 당신 자신보다는 더 나을 것이라는 바람을 품게 되었다.”(「아버지의 자리」), “그녀에게 있어서 출세한다는 것은 우선 배운다는 것이었다 … 지식은 그 무엇보다도 더욱 아름다운 것이었다. 책은 그녀가 조심스럽게 다루는 유일한 물건이었다. 책을 만지기 전, 엄마는 손부터 씻으셨다. 당신 자신의 배우고 싶은 욕구를 엄마는 나를 통해서 계속 추구했던 것이다.”(「어떤 여인」).
아니 에르노의 부모는 영세 자영업자에서 머물고만 자신들의 신분 상승을, 딸이 대신해서 계속해 나가길 온 마음으로 기원했다. 여기 한 권의 책으로 묶인 두 작품은 그러므로 부모의 지원(희생)으로 신분 상승에 성공한 작가가 부모에게 보답하는 송가頌歌라고도 할 수 있다. 작가는 「어떤 여인」에 이렇게 쓴다: “지금 내가 엄마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은, 이제 내가 엄마를 세상에 낳기 위해서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자식의 신분 상승은 부모 계급에 대한 부정과 배반을 전제로 한다. 「아버지의 자리」와 「어떤 여인」은 그 불편한 지점을 파고든다: “이제 더 이상 엄마는 나의 모델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유행의 메아리> 속에서 보게 되는 여성의 이미지가 더욱 나의 감수성에 와 닿았다. 기숙학교에 있던 내 부르주아 여자 친구들의 어머니들은 그런 여성의 이미지에 가까웠다. 날씬하며 은근하고 사려깊으며, 요리도 할 줄 아는 그 엄마들은 자기 딸을 ‘마 셰리’라고 불렀다. 나는 엄마가 너무 요란하여 눈에 띈다고 생각했었다. 두 다리 사이에 포도주병을 끼우고 마개를 뽑는 엄마를 보면 나는 눈을 돌리곤 했다. 퉁명스러운 그녀의 말투와 행동 방식을 나는 부끄럽게 여겼다. 내가 얼마나 엄마를 닮았는지를 느끼면 느낄수록 나의 수치심은 더욱더 강렬해졌다.”, “어느 순간에 엄마에게 있어서 자기 앞에 마주 선 딸은 사회 계층 상의 적수였던 것이다. 나는 오로지 떠날 것만 꿈꾸었다. 그녀(어머니)는 내가 루앙 고등학교에 가는 것을 동의했고, 그 후에는 런던에 가는 것도 받아들였다. 그녀는 내가 자신의 삶보다 더 낳은 삶을 누리도록 모든 희생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가장 큰 희생, 그것은 내가 그녀에게서 멀리 떨어져 가버리는 것이었다.”(「어떤 여인」), “나는 내가 살았던 그 세계[집안을 떠나 도시로 유학을 가서 만난 교양의 세계]의 욕망에 순응했다. 그 세계의 욕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비천한 세계의 추억들을, 마치 그것이 뭔가 저속한 취향이기라도 하듯이 잊어버리려고 애쓰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가 더 이상 내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말, 아버지의 생각들은 불어 시간이나 철학 시간에는 통용되는 것들이 아니었다 … 나는 여름이면 열려진 내 방 창문을 통해 파 엎어진 땅을 평평하게 고르는 그의 고른 삽질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지금 글을 쓰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서로 할 말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아버지의 자리」)
앞서 “자식의 신분 상승은 부모 계급에 대한 부정과 배반을 전제”로 한다고 썼지만, 다행히도 이 두 작품은, 부모의 죽음으로 격발된 부모에 대한 ‘글쓰기’를 통해 애써 잊으려고 했던 자신의 정체성을 되묻고, 자신이 선 ‘자리(중산층의 세계)’의 허위의식을 밝힌다: “이제 나는 내가 교양 있는 부르주아의 세계로 들어갔을 때 그 문턱에서 버렸어야 했던 나의 유산, 그것을 밝히는 작업을 끝마쳤다.”, “아버지는 나를 당신의 자전거에 태워 집에서 학교까지 데려다 주셨다. 비가 오나 해가 쨍쨍하나 아버지는 이 기슭에서 저 기슭으로 강을 건네주는 뱃사공이었다. 아마 그의 가장 큰 자부심, 아니 심지어 그의 생을 정당화하는 것, 그것은 바로 그를 무시했던 세계에 내가 속해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아버지의 자리」), “지배를 당하는 세상에서 태어나 거기서 벗어나고자 했던 나의 엄마, 엄마는 역사가 되어야 했다. 엄마의 소원대로 내가 들어갔던 지배하는 세계, 말과 생각의 세계에서 내가 외로움을, 그리고 어색함을 덜 느끼기 위해서.”, “이제 나는 엄마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듣지 못할 것이다. 지금의 나라는 여인과 과거의 나였던 어린아이를 결합시켜 주는 것, 그것은 바로 엄마이다. 그리고 그녀의 말들, 두 손, 몸짓들, 그녀 특유의 웃는 방식, 걸음걸이들이다. 내가 나온 세계와의 마지막 끈을 나는 잃었다.”(「어떤 여인」)
12월 22일
아니 에르노의 『칼 같은 글쓰기』(문학동네, 2005)를 읽다. -『아버지의 자리』를 도서관에서 빌려 읽을 때, 함께 발견한 책이다. 『아버지의 자리』와 『단순한 열정』을 피상적으로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니 에르노를 ‘자신의 경험을 떼어 파는 자서전적 작가’로 테두리 지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면, 그런 ‘자서전적 기법의 추구’가 문학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도전에 닿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먼저 작가는 허구와 사실을 경계로 나누어지는 ‘소설/자서전’ 구분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문학을 정의하는 일”을 중지하고자 한다. 이런 태도는 자전적 얘기들을 ‘소설’로 변형시켜 온 작가의 자기 방어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밑바닥에는 ‘소설=허구’라는 등식을 맹신하는 사람들에 대한 반감이 있다. 오로지 ‘글쓰기’를 옹호할 뿐인 작가에게 “장르는 아무런 중요성도 지니지 않”는다. “강렬한 감동을 주고, 생각이나 꿈 혹은 욕망을 열어주고, 때로는 글을 써보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책들이 있을 뿐”, 우리가 소설로 떠받드는 플로베르?프루스트?카프카 등의 작품들 역시 애초부터 그런 인증서(소설=허구)를 달고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진실과 리얼리티의 정도를 결정짓는 것은 통틀어 글쓰기”일 뿐이라고 강조하는 작가가 와해시키고자 하는 것은, ‘문학’이라는 절대화된 정의(가치)이며, 거기에 바치는 숭모다. 아니 에르노에 따르면 “‘문학’은 분류의 원칙일 뿐 가치는 아”니다. 가령 신문의 문학란이 문학적 텍스트와 비문학적 텍스트를 분리시켜 다루면서, 문학란에서 다루어진 어느 소설에 대해 ‘이 작품은 문학이 아니다’고 단언했다면, 그 작품은 문학으로 분류되지만, 가치의 이름으로는 거부된 거나 같다. 그런데 그 가치 판단은 “일종의 권력 행사”일 뿐이다. 우리는 온갖 권력에 대해 저항하면서도 ‘문학의 이름’으로 내려진 것에 대해서는 순종적이다. 문학적 가치란 우연적으로 만들어지고 유동적으로 변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명백하고 당연한 것인 양, 그것이 시간성을 벗어난 보편인 양”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작가는 이렇게 덧붙인다: “비록 문학으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내게는 문학적 가치를 지닌 책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셀 푸코나 부르디외의 텍스트들이 그렇죠. 나는 강렬한 감동을 주는 것이 바로 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새로운 것을 향해 열리고 확장되는 듯한 진한 감동 말입니다.”
다음. 모든 소설은 웬만큼 자서전적이고, 많은 ‘자전적 허구’들은 주인공의 ‘하나뿐인 개성’을 내세우기 위해 골몰한다. 그런데 아니 에르노는 하나뿐인 개성을 내세우기 위해 쓰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보편이나 집단 속에 용해하려고 한다. 대표적으로 「아버지의 자리/어떤 여인」은 별쭝난 문학적 기법이나 은유를 거부하는 “평평한 글쓰기”를 통해 작중 인물들로부터 개성을 박탈한다. “여기서 관건은 ‘나’를 말하거나 ‘재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의 조건이나 고통 등과 같은 더 방대한 어떤 리얼리티 속에서 ‘나’를 상실하는 것이거든요.” 또 “어떤 순수한 나, 다시 말해 타인들과 법과 역사가 그 속에 현재하지 않는 순수하게 나일 뿐인 나를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내밀한 것은 언제나 그리고 여전히 사회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글을 쓰는 동안에 내 앞에 있는 모든 것은 사물이고 물질이며, 외부”라고 말하는 작가는 위의 작품에서 “하층으로 간주되는 생활 방식의 명예회복과, 그러한 삶에 동반되는 소외의 고발”과도 거리를 둔 채, 가족 민족학이나 가족 인류학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전형성 속에 자전적 허구를 매몰시킨다.
사회적으로 형성되지 않은 내밀함이란 없다고 주장하는 작가에게는 글을 쓰는 행위 역시 “정치적 행동”일 수밖에 없다. 「아버지의 자리」에 바칠 경구로 장 주네의 “죄책감은 글쓰기를 추동하는 막강한 동력이다”(책세상 본 『아버지의 자리』의 번역은 “감히 나는 이런 설명을 해본다: 글을 쓴다는 것 그것은 배반을 한 사람이 의지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라고.”로 되어있다)란 글을 빌어온 아니 에르노는 “출신 계급을 변절한 처지에서, 정치적 행위로서 그리고 ‘헌납’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바로 글쓰기”라고 말한다. 그런 작가가 누보로망과 초현실주의와 좌파를 좋아하는 까닭은, 그것들이 모두 나와 세계를 변혁하고 전복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어떤 새로운 형태에 대한 탐구이지 결코 복제가 아니라는 확신”을 가진 작가가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제도화된 글쓰기와 교양인에게 바쳐진 문학적인 거드름으로, 분명코 『단순한 열정』은 그런 아성에 금을 내기 위해 씌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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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