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4일
호영송의 『죽은 소설가의 사회』(책세상, 2007)를 읽다. - 아홉 편의 단편 소설이 실린 작가의 세 번째 소설집. 표제작「죽은 소설가의 사회」는 한때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H가 신작 소설을 낸 직후,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끌려가 온갖 얼차려와 재교육을 당하고 풀려난 이야기다.
H가 깨어났을 때 그는 무슨 지하실 같은 곳에 혼자 누워 있었다. 그는 한기를 느꼈다. 그 낯선 장소에서 그는 한동안 갇혀 있었다.
“당신이 소설쟁이야?”
누군가 H에게 묻는 말이었다.
“대답해봐. 요새 무슨 책을 냈다면서?”
“아, 네…”
“흠! 소설을 써냈다 이거지? 요새 같은 세상에 무슨 지랄로 소설은 써가지고?”
사내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소리가 역겹고 고약했다. H는 앞에 선 사내를 바로 쳐다보기도 싫었다.
“요새 같은 때 소설을 써냈다는 걸 보면, 그 배짱이 가상하기도 한데, 이왕이면 좀 화끈한 걸로, 잘 팔릴 걸 쓰지 그랬어?”
비웃는 듯이 건들거리면서 그런 소리를 뱉어내는 사내를 올려다보면서, H는 도대체 감을 잡을 재간이 없었다.
“대체 누, 누구시죠? 다, 당신은…”
“뭐, 그런 건 알아서 생각하슈. 난 내 할 일만 하면 되니까.”
“그러지 말고 얘기 좀 해주세요. 나한테 무슨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닐 텐데.”
“하하. 이 아저씨가 괜히 혹 하나 더 붙이고 싶은 모양이네. 그런 식으로 억지 부려봤자, 한 대 맞을 것 두 대 맞게 된다구요. 그냥 깨끗이 한 대 맞는 게 사내답잖아? 안 그래?”
“아, 제발…”
“자, 일어서! 내 앞에 일어서 ‘차렷!’한다. 알았어?”
마치 군대의 조교 같은 말투였다. 그는 잘 조련되고 날렵한 몸을 갖고 있었다.
「죽은 소설가의 사회」를 읽으면서 한 20여 년 전에 발표된 박남철의 시 「독자놈들 길들이기」를 떠올리는 것은 무척 흥미롭다. 총 다섯 개의 연으로 구성된 박남철의 시는 아래와 같다.
내 시에 대하여 의아해하는 구시대의 독자 놈들에게 → 차렷, 열중쉬엇, 차렷,
이 좆만한 놈들이......
차렷, 열중쉬엇, 차렷, 열중쉬엇, 정신차렷, 차렷, ○○, 차렷, 헤쳐모엿!
이 좆만한 놈들이......
헤쳐모엿,
(야 이 좆만한 놈들아, 느네들 정말 그 따위로들밖에 정신 못 차리겠어, 엉?)
차렷, 열중쉬엇, 차렷, 열중쉬엇, 차렷......
박남철의「독자놈들 길들이기」는 제목 그대로 독자를 길들인다. 하지만「죽은 소설가의 사회」에서는 그와 반대다. 이게 대중과 시장의 영향력을 받아들이는 시와 소설 장르의 차이인지, 아니면 두 작품이 씌어지고 발표된 20년간의 거리 탓인지는 문학사회학의 좋은 주제다.
까닭은 둘 다 일 것이지만, 「죽은 소설가의 사회」 위에 또 언젠가 읽었던 이기호의 단편 「囚人수인」을 겹쳐 놓으면, 좀 더 확실해 지는 게 있다. 이 두 편의 소설은 자본주의 세계에 놓인 소설가들이란 한 마디로 처치 곤란한 잉여에 불과하며(“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소설 나부랭이나 쓴단 말이에요? 시대착오도 분수가 있지.”), 여기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상품임을 증명해야 한다는 풍자를 담고 있다(“앞으로 소설을 쓰려면, 우선 재미있게 쓰시오. 또 이런 데 끌려와서 눈물 질질 짜는 것 보고 싶지 않응게.”).
이 소설집에는 문학뿐 아니라, 여러 종류의 예술가를 등장시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예술가의 존립 가능성과 현대 사회에서의 예술의 가능성을 묻고 있다. 이 소설집의 제목과 표제작이 웬만큼 그 질문에 답하고 있지만, 공연 기간 중에 실어증에 걸려 배역을 박탈당한 어느 배우의 이야기를 담은 「실어失語의 시간이 오다」역시 그 질문에 대한 작가의 의중을 드러내고 있다.
이 소설집에서 내 관심을 끄는 것은, 자칫 지겨울 수도 있는 ‘예술의 지속불가능성’에 대해서가 아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지속가능성은 그것이 지속가능하기 위해 항상 지속불가능성과 대면(대결)해야 정상이고, 마찬가지로 예술의 지속불가능성 또한 선언적으로나 과장적으로 강조되고 되풀이될 게 아니라, 예술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고민으로 극복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호영송은 소설가 내지 소설의 죽음을 어떻게 돌파하고 있는가? 「모국어의 센 물살, 내 마음속에 흐르네 - 작가일기 1」에 나오는 몇 대목을 인용한다.
ⅰ) (…) 모국어의 힘이 강렬하다고 해보아야, 거센 세계화의 시대에, 코리아의 한 작가가 말하는 모국어의 힘이란 무엇일까. 한국어도 좋지만, 이젠 영어를 공용어로 쓰는 게 어떠냐는 담론이 동시대 작가들의 제안으로 인터넷에 퍼져가는 이 시대에 모국어는 무슨 힘을 갖는가?
ⅱ) 조지프 콘래드가 영어로 써서 위대한 영문학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는 것이 그의 조국 폴란드에 대한 배신이 될 수 있는가? 시인 조지프 브로드스키가 소비에트 러시아를 떠나 미국으로 가고 거기서 영어로 써서 노벨 문학상을 탄 것은 러시아에 대한 배신인가?
ⅲ)그는 요즘 와서 자신의 문학적 여정을 되돌아보면서 몹시 안쓰러운 기분이 되곤 했다. 그의 딸이 영어를 쓰는 청년과 사귈 때만 해도 그 생각까진 못했는데, 영어를 상용어로 쓰는 청년이 사위가 되고 난 후엔, 사위는 장인의 작품을 읽고 싶어 했고, 장인은 사위에게 자신의 작품을 읽히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그런데 그 일이 간단치 않았다. 사위는 한국어를 몇 마디도 할 수 없는 한국어 문맹이었다. 남준은 사위 에릭슨에게 자기의 작품을 영어로 읽힐 게 없었다. 그는 여러 권의 책과 수십 편의 단편을 썼지만 영역된 게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다른 나라의 사정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호영송에 따르면, 한국에서 운위되는 소설가 내지 소설의 죽음은 ‘영어로 글쓰기’에 의해 극복된다. 정말이지 이 소설집 속에서 “한국에서 한국말로 써야 독자가 얼마나 되겠냐? 베스트셀러라야 삼만 부나 오만 부 팔리면 끽인데 말이야”라면서, 영어로 글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소설가는「모국어의 센 물살, 내 마음속에 흐르네 - 작가일기 1」의 주인공만 아니다. 때문에 이 소설집을 읽는 동안 독자들은 “영어 공부 열심히 하면, 그 실력 남 주나요? 나중에 영어로 연극 대본도 쓸 수 있는 것 아녜요?”(「뒤늦은 추적」), “영어로 쓸 생각이 아니라면 한국에 돌아오라구!”(한 장의 흑백 사진)와 같은 작가의 강박과 수시로 마주치게 된다. 「소설 속에 살고 싶어 한 사람」에 나오는 폐업한 소설가 장 선배와 후배 소설가 윤남준의 대화도 그렇다.
“야, 사실, 백남준은 머릴 잘 썼지. 게다가 결단력도 좋았고. 만일 백남준이 그 재능을 가지고 계속 이 바닥에서 뒹굴었어봐라. 뭐? 무대에서 피아노를 때려 부숴? 허허, 서울 명동에서 그랬다면 당장 경찰서나 정신 병원에 실려 갔을 거야.”
“그럴까요?”
“당연하지! 그 시절엔 피아노 한 대 없는 중학교도 많았는데 특수 기물 파손죄, 아니면 정신 감정을 받아야 할 판이지.”
“그러니까 예술도 결국 사회적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 이거군요.”
“그러니까 너…윤…남쥰도 한국적 리얼리즘을 하든가, 억울하면 뉴욕에 가서 영어로 소설 써!”
장 선배가 내 이름의 남준을 남쥰이라고 혀 꼬부라진 발음을 했다.
「모국어의 센 물살, 내 마음속에 흐르네 - 작가일기 1」에 등장하는 소설가 주인공은 ‘영어로 글쓰기’가 독자를 배가해 준다고 믿는다. 그런데 방금 인용된 「소설 속에 살고 싶어 한 사람」에서는 영어로 글쓰기가 독자층을 세계적으로 넓혀줄 뿐 아니라, ‘한국적 리얼리즘’의 울타리를 벗어나게 해주는 수단일 수도 있다는 주장으로 확장된다(호영송이 뜻하는 ‘한국적 리얼리즘’이 뭔지 확실하진 않지만, 이 소설집의 앞머리에 실린 「뒤늦은 추적」에 따르면 70∼80년대의 “프로파간다 같은 작품”을 지칭하는 듯). 그런 주장이 좀 더 노골화된 작품이 「죽은 소설가의 사회」이기도 한데, 아래는 출판동네의 자유기고가인 조 선생과 소설가 H의 대화다.
(…) 한때 대학시절엔 작가가 되려는 희망으로 장편 습작을 하고, 이왕이면 세계 문학 속으로 진출하려면 영어로 쓰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서 헤밍웨이, 스타인벡을 원서로 읽으려고 낑낑대기도 했다. 특히 『노인과 바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그리고 『분노의 포도』를 얼마나 자주 펼쳐들었던가? 그런데 나는 장편을 겨우 한 번 마무리했고 그것을 어느 신문에 투고했었는데, 이런 소설을 쓰려면 차라리 이민을 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기묘한 심사평을 보고 정말 이민을 해야 하나, 소설을 그만둬야 하나 하면서 고민한 적도 있었다.
“넌 내가 보기에 책을 내주는 편집자나 출판인으로 한국 문학에 기여하면 좋겠다.”
난 H의 그 말이 서운해서 되받아주기도 했었다.
“하지만 한국 문학이 내 눈에 들어올 만큼만 수준이 높아지면 나도 좋겠다.”
“허, 그 말을 김동리나 황순원이 들으면 어쩌려고?”
“그 사람들, 서운하지만, 울타리 안 작가 아니야?”
“그럼 『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는?”
“그 책이야말로, 이 한반도, 남쪽이거나 북쪽이거나, 이 좁은 한반도에서나 좋아할 이야기책이지! 그리고 그 사람, 사실 작가라기보다 정치가 아닌가?”
“야! 너 독한 소리 막 하네.”
“아마, 번역의 장벽 어쩌구 하겠지만, 『임꺽정』을 영어로든 불어로든 기막히게 번역해 봐. 그런다구 그걸 누가 읽어주기나 하고, 현대 소설이라고 평가해주겠나?”
작중의 주인공들이 강박적으로 호소하는 ‘영어로 글쓰기’ 주장을 호영송이 온전히 믿고 있지 않다는 것은「모국어의 센 물살, 내 마음속에 흐르네 - 작가일기 1」이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작가들에게는 소설의 죽음이 곧 ‘한국어의 죽음’이며, 한국 작가들에게 ‘소설의 죽음’은 영어로 글쓰기를 선택하고 나서야 재생할 수 있는 예술이라는 작가의 문제의식은 굉장히 묵시적이다. 암울하지만, 그런 과정이야말로 한국어의 미래라는 생각을, 나는 지울 수가 없다. 「작가의 가방」에 나오는 한 대목을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조 작가는 일본의 이노우에 야스시를 좀 읽어보라구.”
“네?”
“아마 자네는 일본말을 모를 테니 번역으로라도 읽어보게. 내 제자 한 사람이 『돈황』의 번역을 했던데, 내가 읽어보니, 번역도 읽을 만하더군.”
“네, 말씀대로 꼭 읽겠습니다.”
“조 작가는 영어는 좀 하나?”
“아휴! 겨우 사전을 찾아가며 읽어야 하는 형편이죠…”
“뭐, 억지로 공부하라는 건 아니네만, 일본말이든 영어든 … 작가가 외국어 하나는 하는 게 좋지. 외국어를 통해서 자신의 모국어의 모습을 객관화시켜 볼 수 있으니까. 게다가 우리나라엔 번역 안 된 외국의 걸작도 많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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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