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팔 수 없는 땅
성호의 시대에 토지〔農地〕는 일부에 의해 과점(寡占)되어 있었고, 그 일부란 귀족화한 양반이었다. 농민 중 자작농은 일부에 불과했고, 70퍼센트 이상이 소작농이었다. 그들은 소출의 50퍼센트를 소작료로 지주에게 바쳤다. 궁핍한 농민은 토지를 매각했고, 그것은 다시 지주들에게 집중되었다. 결과적으로 농민은 토지에서 축출되어, 스스로를 노비로 팔거나, 죽거나, 유민이 되거나, 도둑이 되었다. 농민이 토지에서 이탈한다는 것은 조선이란 국가 체제의 위기를 예상케 했다. 당연히 토지의 분배를 주제로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대책을 제출했다. 성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대책으로 유력했던 것이 ‘한전론(限田論)’이었다. 곧 일정한 면적의 토지를 상한선으로 정하고 그 이상의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박지원(朴趾源)의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는 한전론에 관한 대표적인 논문이다. 성호는 「한민명전(限民名田) (3권, 천지문)에서 한전론을 검토한다. 그는 이 글에서 한(漢)의 동중서(董仲舒)에서 원(元)의 정개부(鄭介夫)에 이르는 한전론의 역사를 간단히 개괄하고 한전론의 골자를 소개한다. 한전론은 모든 농민에게 일정한 면적의 전지를 일정한 기간 동안 지급하고, 그 기간 중에 불어난 토지는 형제, 자질(子姪), 인척에게 강제로 분배하는 제도다. 만약 상한선을 넘어 토지를 보유할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럴 경우 관에서 몰수하여 가난한 백성에게 그 땅을 팔고, 땅값의 반은 국가가 차지하며, 반은 지주에게 지급한다. 성호는 이 주장을 반박한다. 즉 토지를 많이 가지고 있을 경우 권력이 강해지기 마련이고, 권력이 강해지면 법을 무시할 수 있다. 가난한 백성에게 팔겠다고 하겠지만, 토지의 소유자가 이미 고장에서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데 누가 감히 그 토지를 사려고 들겠는가?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만약 형제, 자질에게 나누어준다고 하자. 형식적으로 나누어준 것이라면, 어떻게 그 불법을 따질 수 있겠는가? 이런 이유로 성호는 한전론은 실행될 수가 없다고 한다.
성호는 자신이 일찍이 「균전론(均田論)」을 지어 ‘균전’을 주장했다고 말한다. ‘균전’이란 무엇인가? 성호가 말하는 「균전론」은 『곽우록(藿憂錄)』에 실린 「균전론」을 말한다. 그는 『곽우록』의 「균전론」을 바탕으로, 다시 『성호사설』에서 「균전」(7권, 인사문)을 썼다. 먼저 『성호사설』의 「균전」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균전」의 첫머리에서 성호는 “왕도(王道) 정치가 경계(經界)를 지향하지 않으면 구차할 뿐이다”라고 말한다. ‘경계’는 토지의 경계선을 정해 토지를 나누는 것이다. 그것은 곧 ‘토지의 공평한 분배’를 암시한다. 이어지는 “빈?부가 균등하지 않고 강약의 형세가 다르다면 어떻게 나라를 평화롭게 다스릴 수 있겠는가?”라는 문장은, 개개 인민의 부와 힘이 균등한 형태로 존재해야 국가의 운영이 평화로울 수 있다는 의미다. 수긍할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성호는 토지의 균등한 소유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왜냐? 이 사람의 토지를 빼앗아 저 사람에게 줄 수가 없는 법이니, 그것은 각자 자기가 점유한 토지를 자기의 소유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토지를 사적으로 소유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토지의 균분은 불가능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성호는 말한다. 토지는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다!
무릇 천하의 전지(田地)는 왕의 땅이 아닌 것이 없다. 백성들이 각각 그 전지를 자기 이름으로 차지하고 있는 것은, 왕의 땅을 한때 강제로 점유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원래 본주인이 아닌 것이다. 비유컨대 아버지의 살림살이 도구를 여러 자식들이 나누어 차지한다 하자. 어떤 자식은 많이 차지하고 어떤 자식은 적게 차지하겠지만, 아버지가 골고루 나누어 가지라고 명한다면 많이 차지한 아들이 감히 그냥 뻗대며 차지하지 못하는 법이다.
모든 땅이 왕의 것이란 생각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토지 공개념이다. 토지의 사유란 남의 땅을 한때 강점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어찌 땅만 그렇겠는가. 인간의 삶 역시 장마 뒤 숲 속에 피었다가 사그라지는 버섯과 다를 바 없다. 잠시 세상에 머무르고 떠날 인간이 ‘자연’을 소유한다는 것은 실없는 농담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토지는 원천적으로 사유할 수 없는 것이다. 이 탁월한 발상을 현실에 적용하려 한 사람이 있었다. 성호가 인용하는 왕망(王莽, BC 45~AD 23)이다. 왕망은 천하의 전지를 왕전(王田)이라 했으니, 토지는 사유되는 물건이 아님을 선언하고, 부자의 토지를 빼앗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려고 했다. 성호는 이에 대해 ‘만약 왕망의 뜻이 이루어졌다면, 또한 충분히 성인이 남긴 뜻을 성사시킨 일이 되었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왕망은 황제의 자리를 찬탈했기에 유가로부터 비난을 받았지만, 성호는 도리어 그의 개혁을 높이 평가한다. 성호는 “거실(鉅室)과 호족(豪族)들이 왕망의 개혁을 기꺼이 감내했겠는가?”라는 말로 기득권 세력의 저항과 개혁의 실패를 압축한다. 경제적 평등이란 근본적인 개혁을 추구하는 자에게는 죽음을! 이것이 인류사를 통해 기득권층이 실행해온 일이었다.
왕망의 왕전 사상을 성호는 고스란히 받아들인다. 그래, 왕망은 실패했다. 하지만 왕망의 개혁이 실패했다 하여 다시 시도하지 않을 수는 없다. “천하의 임금이 된 사람은 모든 백성을 꼭 같이 갓난아이〔赤子〕로 보아야 하는 법이다. 땅을 공평하게 나누어주려는 마음을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니, 어찌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면서 그냥 내버려둘 수 있단 말인가?” 이 생각을 구체화한 것이 성호의 균전론이다.
이제 『곽우록』에서 성호의 균전론의 핵심을 가져오자. 그의 아이디어는 이렇다. 먼저 한 가족이 평균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재산을 계산해서 그것에 맞추어 일정한 토지를 1호(戶)의 영업전(永業田)으로 삼는다. 영업전은 ‘영구히 농사를 지어 먹는 전지(田地)’란 뜻이다. 이렇게 법을 정하여 실행하되, 법을 시행할 즈음에 땅을 많이 가진 자에게서 땅을 빼앗지 않는다. 땅을 못 가진 자에게도 영업전보다 더 주지 않는다. 땅을 많이 가져서 팔고자 하는 사람은 영업전을 제외하고는 허락한다. 토지의 매매를 자유롭게 하되, 오직 그 매매에 영업전이 포함되어 있는지만 철저히 살핀다. 만약 영업전이 포함되었다면 그 땅을 사는 자도 처벌하고 파는 자도 처벌한다. 이렇게 영원히 팔지 못하는 토지가 있으면 결국 토지의 소유는 균등해진다. 왜냐? 토지를 파는 자는 항상 빈민이다. 부자들은 빈민의 땅을 사들여 토지를 넓힌다. 빈민이 땅을 팔지 못하게 하면 부자들은 땅을 넓힐 수가 없게 된다. 빈민의 토지는 근검에 의해 조금 늘어날 가능성이 있지만, 부자들의 넓은 땅은 상속을 통해 쪼개진다. 이렇게 되면 결국 모든 인민이 균등한 토지를 갖게 될 것이다. 이것이 「균전론」의 대략이다.
성호는 「한민명전」에서 자신이 「균전론」을 저술했지만, 역시 “천천히 오랜 시간 실행한 뒤라야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사이에 반드시 그 계획을 저지하는 자가 나올 것이니 시행할 수 없기는 것은 매한가지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 역시 실현이 불가능한 일인 줄 알았던 것이다. 다만 “사람들이 혹 균전론을 지켜서 바꾸지 않는다면, 반드시 도움이 되는 방도일 것이다”라 말했지만 그것이 헛된 희망이었음은 후대의 역사가 입증한다.
토지제도의 개혁은 성호만이 아니라, 다산과 연암 등 우리가 아는 이른바 실학자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과 『일성록』, 『승정원일기』에 무수히 등장하는 개혁적 사고를 가졌던 사람이면 모두 바라마지않는 것이었다. 그 개혁은 백성이 굶주리지 않고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단을 마련해주고자 했지만, 그것은 결코 실천되지 않았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 개혁의 아이디어를 실천할 정치 세력이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