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치, 불의(不義)의 실천
성호는 『성호사설』 곳곳에서 사치에 대해 비판한다. 지나칠 정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발언이 잦고 강력하다. 그만큼 사치 문제를 절실히 생각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사치는 도대체 누가 주도하는 것인가? 먼저 「부귀한 생활을 부러워하다(慕效富貴)」(10권, 인사문)라는 글의 서두를 보자.
선비가 관직에 있지 않으면, 서울이나 서울 가까이에서 살 수가 없다. 서울은 지체가 높고 부유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무릇 결혼이나 상례(喪禮)의 복식이며 음식이 사치스럽지 않을 것이 없다. 이 때문에 선비도 그것을 보고는 부러워 본받게 된다. 이 때문에 힘이 바닥이 나고 재산이 아주 거덜이 난 뒤에야 본받는 것을 그만두게 된다. 오직 영남 지방만 부지런하고 검소한 풍속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부지런하면 재산이 바닥나지 않고, 검소하면 절약하게 된다. 그래서 가산을 길이 전해줄 수 있으니 어찌 낙향(樂鄕)이 아니랴.
관직을 얻지 못하면 서울이나 경기 일대에 살 수 없다. 성호의 시대가 되면 치열한 당쟁의 결과 영남 지방의 남인이 마지막으로 정치권력권에서 탈락한다. 서울과 경기도, 그리고 충청도의 일부 양반만이 벼슬을 할 수 있었다. 이마저 18세기 끝자락으로 가면 벼슬이 가능한 사람은 서울 사람으로 국한되고 만다. 바로 이 서울의 양반, 곧 경화사족(京華士族)은 좋게 말해 아주 세련된 문화를 형성했다. 북경에서 수입한 상품을 소비하는 주축이 바로 이들이었다. 정조는 서울의 경화세족의 생활상을 이렇게 말한다.
근래 사대부들 사이에는 괴상한 풍습이 있으니, 반드시 우리나라의 틀을 벗어나 멀리 중국인이 하는 것을 배우려는 것이다. 서적은 말할 것도 없고, 날마다 쓰는 생활도구까지도 모두 중국제를 사용하고, 이것을 다투어 고상한 풍치로 삼는다. 예컨대 먹이나 병풍, 붓걸이, 의자, 탁자, 청동으로 만든 솥이며, 술잔, 술그릇 등 온갖 기이하고 교묘한 물건을 좌우에 펼쳐놓고, 차를 마시고 향을 사르며 애써 고아한 분위기를 연출하니, 일일이 다 말하기 어려울 정도다.〔『홍재전서(弘齋全書)』 175권, 『일득록(日得錄)』 15, 「훈어(訓語)」 2〕
서적과 집기, 골동품 등 모두 북경 수입품이다. 어떤가. 요즘 서울의 부호들이 수입품으로 집을 칠갑하는 것이나, 수천 수억 하는 명품으로 몸을 포장하는 것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특히 남에게 보여야 할 의식, 즉 결혼식과 장례식에서 사치는 과도하게 이루어진다.
문제는 경화세족의 사치가 그들만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성호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이 문벌을 숭상하여 경상(卿相)의 자식은 반드시 경상이 되고, 부귀하고 교만한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은 죽을 때까지 부귀하고 교만하게 살다가 죽는다. 갈수록 더욱더 사치스럽게 살지만 자신은 그런 줄을 모른다.”〔「사치하는 풍속(侈俗)」, 7권, 인사문〕 이들은 영구 집권층이고, 사치는 생활 그 자체다. 삶이 갈수록 더 사치스러워져도 그것이 사치인 줄을 모른다. 이들 문벌가의 사치는 당연히 모방의 대상이 된다. “땅뙈기도 녹봉도 없는 집안도 그들과 벗이 되고 혼인을 하면서, 죽을지언정 질박하고 검소한 삶을 꺼리고 애써 그들의 사치를 따라잡으려고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남들이 비웃는다는 것이다.”(「사치하는 풍속」) 좀 구체적으로 보면 이렇다. “수레나 말, 의복, 집, 음식에서 남만 못한 것을 아주 큰 수치로 안다.”(「사치하는 풍속」) 그래서 “가난한 선비가 집에서 채소만 먹다가 남을 대하면 떡 벌어지게 차려놓고 먹는다든가, 곤궁한 아낙이 평소 때 묻은 옷을 입고 있다가 손님을 보면 화려하게 화장을 하는 법”(「사치하는 풍속」)이니, 이 모두가 겉치레 하는 풍습인 것이다.
원래 사치는 귀족의 몫이다. 귀족의 현시적 소비는 자신의 사회적 위상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가난뱅이의 사치는 모방적 소비다. 자신의 경제적 능력을 초과하는 모방적 소비는 경제적 몰락으로 귀결된다. 가난한 백성들은 빚을 내고, 전지와 집을 팔고, 굶주리다 죽거나 유민이 되거나 도둑이 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양반의 경우는 그 코스가 사뭇 다르다. 양반은 ‘불의’의 실천이란 엉뚱한 곳으로 나아간다.
성호의 지적을 들어보자. “사치에는 반드시 재물이 있어야 한다. 재물이 부족하면 별별 수단으로 재물을 구하되, 불의(不義)의 수단도 돌아보지 않는다.”(「사치하는 풍속」) 사치하는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재물을 구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불의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정조의 말을 참고하자.
사치하는 풍습이 요즘처럼 성한 적이 없었다. 더할 수 없이 가난한 자라 할지라도 집 안의 온갖 살림살이며, 옷이며, 음식을 모두 나름대로 꼴을 갖추려고 한다. 저들 밭을 갈지도 베를 짜지도 않는 사람의 재물이 어디서 나오는 것이란 말인가. 이 때문에 천 가지, 백 가지 방법으로 반드시 이(利)가 나오는 굴을 뚫으려 한다. 수령이 되면 오직 자기 이익을 챙길 생각을 하여, 간악한 짓을 하고 죄과를 범하며 하지 못하는 짓거리가 없다. 정말 한심한 일이다.(『홍재전서』 175권, 『일득록』 15, 「훈어」 2)
밭을 갈지도, 베를 짜지도 않는 양반의 사치스런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정조는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는다. 그것은 밭을 가는 사람과 베를 짜는 사람의 생산물을 빼앗기 때문이다. 양반은 백방으로 재화가 흘러나오는 구멍을 뚫는다. 수령 자리가 바로 그런 구멍이다. 이것이 조선 양반의 사치스런, 아니 우아한 삶이 가능했던 원리다.
정조는 “지금 사람은 지금 사람의 옷을 입어야 한다”라는 옛사람의 말은 절실히 새겨들어야 할 말이고, 사치하는 자들이 조선에서 태어났으면 마땅히 조선의 본색을 지켜야 하는 법이니, 죽을 힘을 다해 중국인을 본받는 것, 곧 중국의 상품으로 사치하는 것은 결코 온당치 않다고 지적한다(『홍재전서』 175권, 『일득록』 15, 「훈어」 2). 사회 상층부가 생산하는 농민을 쥐어짜서 수입 사치품을 소비하는 생활을 즐기고, 중간층이 그것을 모방하는 국가와 사회가 온전할 리 없다. 정조는 사치의 폐단은 장차 말할 수 없는 결과를 낳을 것이고, 또 어떻게 해결할 수도 없을 것이라 개탄했던바, 조선은 정조의 탄식이 있고 난 뒤 1세기를 무기력하게 뭉개고 지내다가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성호는 과거를 회고한다. 옛날에는 “높은 벼슬아치일지라도 거개 가난하고 천한 처지에서 나왔고, 임금도 임금이 되기 전에는 평민의 신분으로 험한 일을 두루 겪어 그 간난(艱難)함을 알았다”. 이런 이유로 지나치게 사치하는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저 어린아이들은 가난하고 천한 삶, 험한 일을 겪어 알 리가 없다!(「사치하는 풍속」) 생각해보라. 조선 초기 왕들은 창업의 고통을 알았다. 과거는 그래도 공정하게 시행되었고, 가난한 집안에서도 합격자가 나왔다. 그때 사회와 나라는 그래도 건강했다. 하지만 조선에 벌열, 곧 영구집권층이 생기자 사치가 번지기 시작했고, 조선은 몰락을 길을 걷기 시작한다. 성호가 수다스럽다 할 정도로 많은 언어를 소비해가며 사치를 비판했던 것은, 지배층의 사치가 백성의 수탈 위에 있고, 가난한 백성은 결국 국가와 사회를 몰락하게 만드는 요인이었기 때문이다.
현시적 소비인 사치는 인간성의 어떤 본질적 국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특정한 사회 관계가 아니면 구체화하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은 모두 편하고 사치스럽게 살고자 한다. 그것은 타고난 본성이 그렇게 시키기도 하고, 또 습관과 풍속이 그렇게 변화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두보(杜甫)의 시에 “귀한 자가 없으면 천한 사람도 슬퍼할 것 없고, 부자가 없으면 가난 역시 넉넉할 뿐이라네(無貴賤不悲 無富貧亦足)”라 하였다. 천하가 모두 천하고 가난한 사람이라면, 근검하게 하는 것이 무어 어렵겠는가?〔「백성은 먼 앞날을 생각해야 하는 법이다(民生遠慮)」, 10권, 인사문〕
편안하고 사치스런 삶을 추구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인간성의 본질이다. 하지만 그것을 특정 형태로 만드는 것은 사회적 관계다. 귀족?부자의 건너편에 천민과 빈자가 있는 사회가 모방할 사치의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모두 천한 사람, 모두 가난한 삶이라면 모방할 대상도 없다. 하지만 아마도 당분간 귀족과 부자가 없는 세상은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