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유럽여행에서 돌아온 그다음 해, 즉 1984년 여름 다케다(武田)씨와 F는 구사쓰(草津) 국제음악 아카데미에 참가했다. 이 음악제는 여름 몇 주간 군마현(群馬?) 구사쓰 고원에서 열리는 음악가 육성하기 강습(夏期講習)으로, 1980년에 바이올리니스트 도요다 고지(豊田耕?)가 실행위원장 등을 맡아 시작한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아카데미였다. 독일에 오래 체류했던 도요다 고지의 인맥을 통해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음악가들을 강사로 초빙했다. 다케다씨는 도요다 고지의 바이올린 강습을 듣기 위해, F는 바흐 <수난곡>의 복음서 기록자 배역으로 유명한 스위스인 테너 에른스트 해플리거Ernst Haefliger의 성악 강습을 받으러 거기에 갔다.
모처럼 세계적으로 뛰어난 음악가들이 오는데 강습하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으니까 거기에 맞춰 음악제를 열고 일반청중에게도 공개했다. 장소는 겨울엔 스키장이 되는 고원지대인데다 근처에는 구사쓰 온천도 있어 음악 애호가들이 피서를 겸해 묵기에는 최적이었다.
그런 장소에서 유명 음악가의 레슨을 받으며 여름을 보내겠다는 다케다씨와 F를 나는 선망해 마지않았다. 물론 일반청중으로 참가해서 연주를 즐길 수야 있겠지만 그건 정직(定職)도 없는 나로서는 부끄러워해야 할 사치라 생각했다. 이런 사고방식은 내 뼛속까지 스민 콤플렉스 탓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연주가도 아니고 음악연구자도 아닌 내가 그런 어울리지 않는 곳에 가봤자 어색해져서 상처만 입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내 마음을 뒤흔들어놓는 정보가 있었다. 그 여름의 초대작곡가가 윤이상이었던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무더운 교토에서 뭉기적거리고 있던 나에게 구사쓰에 간 다케다씨가 그림엽서를 보냈다. 8월16일 개막일 프랜시스 트래비스Francis Travis(1921~ )가 지휘하는 군마 교향악단 연주회가 열렸고, 거기서 하이든Franz Joseph Haydn(1732~1809)의 <바이올린 협주곡 다장조>와 <교향곡 제94번 ‘놀람’>, 그리고 윤이상의 <오보에와 하프를 위한 이중협주곡>(1977)이 연주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글 한 줄이 씌어져 있었다. “연주가 끝난 뒤 F씨는 울면서 내게로 달려왔습니다.” 좀 우스꽝스러웠을 그 모습이 눈에 선했다.
원래 소심하고 경계심이 강한 나는 윤이상이라는 예술가한테로 기울어진 내 마음을 다케다씨나 F가 이해해줄지 어떨지 자신이 없었다. 음악에 관한 전문지식이 있고 나 같은 사람보다는 훨씬 더 자주 좋은 음악을 접해온 그들이 윤이상 음악에 대해 “따분하다”거나 “결국 민족음악이군”이라거나, “정치의식은 참을 수 있지만 예술적으로는 이류다”라거나 하는 평가를 내리면 어떻게 응답해야 한단 말인가. 오그라드는 듯한 기분이었다. 물론 음악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개인의 감성에 달려 있다. 그들이 평가하지 않더라도 내가 좋다면 그만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것만으로는 해소되지 않는 응어리가 내 흉중에 맺혀 있었다.
그걸 제대로 표현하기가 어렵지만, 굳이 말하자면, 분단민족의 일원, 군사독재국가의 국민, 정치범 가족, 재일조선인이라는 존재조건에 의해 규정된 나의 그 음악적 감성의 보편성이 시험당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윤이상이 “이류”라면, 거기에 경도당한 나 자신도 이류라는 의미가 아닌가. 나는 나 자신을 구속하고 있는 개별적인 존재조건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지만, 윤이상이 그랬던 것처럼 그 존재구속성과의 치열한 갈등을 통해 보편성에 도달할 수 있기를 바랐다. 좀 거창하게 말하면, 그 바람이 공감을 얻을지 어떨지 시험대 위에 올랐다는 느낌이 들었다.
F는 자신의 감성에 매우 충실한 사람, 쉽게 얘기하면 “좋은 건 좋고, 싫은 건 누가 뭐래도 싫다”는 사람이다. 또 F는 그 당시에는 일본의 조선식민지 지배, 조선민족의 분단, 군정과 민주화 투쟁 등에 대해 평균적 일본인이 지닌 정도의 얕은 지식밖에 없는(왜냐면, 거의 지식이랄 게 없었으니까) 사람이었다. 즉 그녀는 윤이상의 정치적 측면을 평가하려 해도 할 수 없는 사람, 그 예술적 측면만을 볼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윤이상 음악을 듣고 감격한 나머지 “울면서 달려왔다”는 것이다. 그 이상 정직한 반응이 없다. 그 얘기는 나를 다소 고무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구사쓰 국제 페스티벌 기간 중인 8월 24일 ‘윤이상의 밤’이라는 콘서트가 예정돼 있었다. 그때까지 일본에서는 히비야(日比谷) 공회당에서 열린 시민집회에서 <광주여 영원하라!>가 연주된 적은 있지만 그의 작품을 정리해서 들려주는 콘서트가 열린 적은 없었다.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나는 과감하게 구사쓰에 가기로 했다. 먼저 교토에서 도쿄까지 신칸센으로 가서, 우에노(上野)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군마현 오지까지 가는 꽤나 먼 길이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도착해 보니 8월 하순의 고원은 투명하고 맑아서 벌써 가을 기운이 가득했다.
주변에 산재한 펜션에는 일본 전국에서 모여든 음악 관계자와 학생들이 투숙하고 있었다. 나는 다케다씨와 F가 묵고 있는 펜션에 들어갔다. 겨울은 스키객들을 상대하는 간소한 숙소였다. 학생들이나 먼 데서 온 연주가들은 낮에는 스키장 주변의 산장에서 레슨을 하고 저녁에는 콘서트장으로 모여들었다. 콘서트가 끝나면 각기 숙소로 돌아가 마음껏 비평을 주고받는 것이다.
(계속)
--------------------------
필자 소개
서경식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부터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으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만남』, 『시대를 건너는 법』, 『고뇌의 원근법』, 『교양, 모든 것의 시작』, 『후퇴하는 민주주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경계에서 춤추다』 등이 있으며,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2002년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일본 이탈리아 문화원에서 시상하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
역자 소개
한승동
1986년부터 잡지 <말>에서 일하다 1988년 창간된 <한겨레>에서 지금까지 민족국제부, 사회부, 정치부(외교통일)를 거쳐 문화부 책·지성팀에서 일하고 있다. 1998년 초부터 2001년 초까지 3년간 도쿄 특파원으로 있었다. 국제부장을 지냈고 문화부에서 타블로이드판 섹션 ‘18.0’ 팀장을 하다 지금은 선임기자 노릇을 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걷어차기』, 역서로 『우익에 눈먼 미국』(데이비드 브록), 『부시의 정신분석』(저스틴 프랭크), 『세계를 움직이는 인맥』, 『시대를 건너는 법』(서경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