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전시에 맞는 사진이 될지 보셔야겠죠? 뵙고 의논드리려구요.”
“이메일이나 택배로 보내주셔도 됩니다.”
“그게… 형에겐 아직 말을 꺼내지 못했습니다. 확정되기 전까진 메일도 곤란하구요. 죄송합니다.”
새 사진을 밖으로 내놓기가 조심스러운 모양이었다.
“하필 제가 내일부터 출장인데, 어머니께서 마음이 급하신지 늦으면 안 된다고 미리 여쭤보라고 하셔서 전화부터 드립니다. 일주일 후에 뵙고 보여 드려도 될까요?”
승은 날짜가 충분하니 괜찮다고 했다. 동생은 다녀와서 바로 연락하겠다고 공손히 답했다.
“그런데… 형의 목소리도 동생분과 비슷합니까?”
“네?”
아닙니다. 승은 생각잖게 튀어나온 자신에 말에 당황하여 얼굴을 붉혔다.
“실례가 안 된다면, 사고에 대해서 좀 들을 수 있을까요?”
잠깐 침묵한 동생은 자신이 그때 유학 중이어서 세세히 모른다고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어머니의 권유로 사진을 보이기로 했지만, 형 모르게 전화부터 해서 걱정스러운 목소리였다.
“여러 정황이 궁금해서 그럽니다. 팔뚝의 흉터도 그렇고…”
“모든 일이 마무리가 아직 안 돼 있어서요. 요즘 형 건강이 더 나빠졌어요. 강 서영 씨를 빨리 찾아야 해서 마음만 급하고 염려스럽습니다.”
동생은 문득 멈추더니, 낮게 말했다.
“어떤 가능성이든 놓칠 수가 없어요. 안 그래도 제가 곧 티베트로 떠날 참이었습니다.”
승은 잡았던 방문을 놔버렸다.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세상의 길이란 길은 다 없어져 버린 것 같고 이 집만 머릿속에 똬리를 틀어서 미친놈처럼 다시 왔는데, 역시나 닫힌 방문 앞에 쪼그린 신세였다. 청년의 집 흙 마당은 햇살에 부풀어 허옇게 출렁이고, 화단의 나무와 물통들도 허공에 둥둥 떠다녔다. 이곳에 있으면 모든 게 허상 같고, 시간마저 익숙하게 그에게 들러붙어 주지 않았다.
몇 번을 불러도 모른 척하는 청년 때문에, 승은 돌 지경이었다. 닭은 그새 친숙해져서 그의 발에 똥이라도 갈길 만큼 가까이서 거치적거렸다. 수십 장의 천연색 사진을 남기고도 녀석은 여전히 알 수 없는 얼굴로 털갈이 깃을 날리며 유유자적 돌아다녔다.
몇 끼를 굶은 배가 꼬르륵거릴 때마다 찡그리면서도 승은 자리를 지켰다. 집착이 강한 성격이 일에는 도움이 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에서는 칼날이 되어 자신을 벤다는 걸 알면서도 속수무책이었다.
사실은 집착이 아니라 공포였다. 눈앞이 캄캄하도록 고열을 앓으며 청년을 부둥켜안고 지낸 이후로 밤마다 눈앞이 지옥이었다. 유리를 만나서 몸의 욕구를 풀어도 자유롭지 못했고, 더 이상 유리를 만나는 것도 싫었다. 승은 오기도 버리고 깐죽이며 꼬드기는 짓도 버렸다. 청년과의 연결점이 그림이라는 생각으로 방 앞에 죽치고서 끈질기게 그쪽으로 말을 시켰다.
“이봐, 너 사이비 광신도지?”
방안은 잠잠했다.
“문 좀 열라구! 넌 오줌도 안 싸니?”
닭이 마루를 쪼거나 날개로 치면 방문이 열리다가 승의 기척에 다시 닫혔다. 청년의 손가락엔 흰색 물감이 묻어 있었다. 간곡히 말을 시키던 승은 어깨를 늘어뜨리고 잠잠해져 버렸다. 닭이 휘젓고 다니는 소란을 빼면 집은 적막했다. 힐끗 웃으며 곧 말문을 틀 것처럼 거만하게 오가는 닭을 쳐다보다가, 승은 방문을 박찬 뒤 힘껏 당겼다. 의외로 문고리가 쉽게 빠졌다.
어둑한 바람벽 아래 청년이 웅크리고 있었다.
“이 봐.”
청년이 천천히 돌아봤다. 오싹 소름이 끼쳤다. 승은 한순간 영혼이 떠난 사람의 얼굴을 봤다 싶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듯 무엇엔가 함몰된 청년의 얼굴은 캄캄했다. 귀신에 씐 몰골 그대로였다.
방안으로 들어선 즉시 청년의 시선을 피해 엎드렸다. 그리고 고산지대의 부족들이 영혼을 불러다 놓고 함께 앉아서 담배를 돌려 피우던 모습을 생각하며 숨을 죽였다.
얼굴을 돌렸지만 승을 인식하지 못한 청년이, 다시 얼굴을 반대쪽으로 틀며 일 분여에 걸쳐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서서히 숨소리가 높아가더니 떨리는 흐느낌으로 바뀌었다.
인간의 눈에는 기가 있어서, 무엇을 바라보면 대상은 반드시 그 눈길을 좇아 고개를 돌리는 법이었다. 승은 시선을 바닥에 깔아놓고 소리만 좇았다. 청년의 흐느낌은 울음소리는 아니고 어떤 호흡법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흘렀다. 마당의 닭은 찍소리도 없었다.
문득 청년이 몸을 늘였다. 승이 첫날에 문틈으로 엿봤던 자세와 똑같이, 청년은 반쯤 뜨인 눈으로 벽 구석에 길게 엎드리며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천천히, 위태로울 만큼 곧추세운 고개가 한 지점에서 멈추자 정적이 왔다. 그리고 길고 낮은 호흡. 폭이 넓고 울림이 세찬 호흡.
소리는 방이 울리도록 커져갔다. 그것은 도저히 인간의 소리랄 수 없게 거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