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여기서 아예 아르바이트를 해라.” 사장님의 말에 L이 뛸 듯이 좋아했다. “내가 여기서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을 만큼 시간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생리통이 너무너무 심해서 배를 쥐어뜯으면서도 작품을 해야 한다니까. 뜨거운 방바닥이 너무 그립고 어떤 때는 펑펑 소리를 내며 운다니까 진짜. 나 집에 가고 싶어.” “야, 우리 사장님 생리 얘기 안 좋아하셔.” N이 또 한마디 했다. “자 빨리 무슨 얘기든 해봐. 그리고 냉장고에 있는 한국 음식들 다 내놓으란 말이야.” “미쳤구나 너.” N은 계속해서 핀잔을 주었다.
L은 케어 도구들 뒷정리도 하고 가격표를 새로 써 예쁘게 장식해 벽에 붙였다. “화가가 맞긴 하네. 똑같은 펜으로 그리는데 우리가 그린 거랑 완전 다르다.” N의 감탄사에 L도 보조개를 드러내며 웃었다. “내가 반드시 셀리네일샵을 소재로 한 작품을 만들어 첫번째 개인전 때 소개하겠어. 내가 여기서 얻어먹은 밥이 얼만데.”
그때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글래머러스한 몸매를 지닌 미국 여자가 진한 화장을 한 얼굴을 출입문 안으로 들이밀었다. “여기서 일할 수 없을까요?” L이 사장님의 얼굴을 한번 쳐다봤다. 통역을 해야 하는데 사장님의 의중을 모르니까 사장님의 얼굴을 볼 수밖에. “쟤 여자 아니고 남자다. 가라 그래.” 눈썰미 하나는 끝내주는 우리 사장님, 그 여자가 문을 열고 나간 뒤 우리는 다 창에 붙어 서서 여자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다리에 심상치 않은 근육이 보였다. “사장님 그런 거 어떻게 알아요?” 앞치마를 벗는 우리의 사장님의 시원시원한 대답은 이랬다. “태어나서 지금껏 사람만 봤는데 그걸 모르니. 니네들이 달고 있는 건 눈이 아니고 뭐니. 콧수염 자국도 선명하던데.”
홀딱 볶고 나니 금세 밤 열시가 넘어버렸다. “나 간다.” 사장님이 핸드백을 들고 샵을 나섰다. 샵 앞에 차가 와 서 있다. “하루 종일 일 하느라 지쳤는데 나 오늘 밤 죽었다 얘들아, 저 인간이 어디서 비아그라를 구했단다.” “아, 사장님 좋겠다. 부러워요.” 사장이 탄 차가 주택가 쪽으로 커브를 돌았다. 식료품을 파는 가게 말고 다른 가게들도 불이 꺼져 있었다. 미국 애들이 고함을 치며 지나가는 자동차, 어두운 거리, 검고 깊은 하늘을 쳐다봤다.
손에 팸플릿을 잔뜩 든 한 여자가 가게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뒤따라 들어갔더니 여자가 팸플릿을 주면서 네일샵 안에 타이 마사지샵 코너를 같이 운영해보면 어떻겠느냐고 묻고 있었다. 우리는 더 이상의 공간이 없어 그런 건 꿈도 못 꾼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여자가 대답하길 자기는 이 넓은 미국 땅에 자기 공간이 단 한 곳도 없다고 말하면서 명함을 놓고 나갔다.
여자 셋이 모이면 무슨 얘기를 할까. 얘기는 이상하게 연애 얘기로 치달았다. L은 남자를 묘사할 때 섹스를 잘했다, 못했다는 얘기부터 했고 N은 착하다, 착하지 않았다는 얘기부터 했다. 나는 글을 잘 썼다, 책 읽는 걸 좋아했다는 식의 얘기부터 했다. 갑자기 탁자 위에 올려둔 전화기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나를 미국에 데려온 세탁소 남자에게 전화를 하고 싶었다.
그 남자는 정말 이상한 남자였다. 그 남자가 나에게 생일 선물로 준 게 야외용 튜브였다. 야외용 튜브 따위를 생일 선물로 주다니, 나는 신경질을 내며 그걸 버리고 왔다. 바람이 꽉 차면 그 안에 물을 넣고 그 속에 들어가 몸을 담글 정도의 크기였다. 어디 마트에서 선물로 받은 걸까, 무슨 의미가 있는 선물일까 고심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게 사실이었다.
“내가 얼마 전까지 사귀다 끝낸 남자애는 머리도 좋고 공부도 잘하고 부자인 데다가 센스도 있어, 섹스는 또 얼마나 잘하는지, 내가 완전히 맛이 갔잖아. 그런데 문제가 뭔지 알아. 마약에 미쳤어. 내가 어떤 돈으로 공부를 하는데 우리 엄마 아빠 뒤로 넘어지는 꼴은 못 보겠더라구. 그래서 끝냈잖아. 후회는 없어.” L은 얼굴도 예쁘고 마음먹은 대로 사람을 사귈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