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대 여자애들 몇 명이 몰려 들려왔다. 지갑에서 용돈을 꺼내 눈앞에서 흔들며 손톱에 하트와 아이러브유를 새겨달라고 떼를 썼다. 지들끼리는 영어로 떠들고 우리들한테 얘기할 때만 한국말을 했다. “야 니네들 똥꼬가 다 보이겠다.” 사장님이 애들을 쳐다보고 웃으며 한마디 했다.
애들은 건강하고 행복해 보였다. 얼굴도 예쁘고 몸도 예쁘고 어디 하나 예쁘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광택이 없는 메탈릭한 흰색 매니큐어를 두 번 덧바르고 그 위에 검은색으로 알파벳 I를 쓰고 붉은색으로 하트를 그려주었다. 건조기에 손톱을 대고는 머리를 맞댄 채 떠들고 있는 발랄하고 상큼한 나이의 애들을 보고 있으려니까 인생이 다시 후줄근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정말 후줄근한 인생은 따로 있었다. “내가 저놈들과 여태껏 보지 못한 맹렬한 싸움을 벌일 테니까” 하고 부하인 산초 판자에게 큰소리를 뻥친 뒤 대결에 나서는 돈 키호테 영감은 번번이 사람을 잘못 봐 결투다운 결투를 벌이지 못한다. 그냥 자기네들 갈 길을 가는 사제들을 납치범들로 오해해 싸움을 걸었다가 부하인 산초만 흠씬 두들겨 맞게 만들어버린다. 그러다 진짜 싸움꾼인 청년 비스카야를 만나고 “이 비스카야 주먹맛에 확실히 죽어볼 테야”라는 으름장과 함께 진짜 싸움이 벌어질 것 같은 으스스한 분위기가 전개된다.
둘이서 칼을 치켜들고 단박에 죽여버리겠다고 고함을 치는 장면에 이르면 나도 이번에야말로 진짜 싸움이 벌어지려나, 어깨에 힘을 주고 누런 책에 집중하는 사이, 우습게도 작가인 세르반테스는 “그러나 불행한 일은 바로 이 순간, 이 대목에서 싸움 사건을 종결하지 못하고 이 이야기의 작가가 이야기를 끝맺는다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자기는 “제2의 작가”라고 말한다. 이게 도대체 뭔가, 이 싸움의 결과를 다음 장에서 확인하라니, 진짜 웃기는 구성이 아닐 수가 없다. 그리고 다음 장에서 확인해보니 한 번 먼저 내리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돈 키호테는 “여지없이 패배하여 땅에 떨어지는 처참한 몰골이 되”고 만다.
아이고 참, 한심한 돈 키호테 영감 걱정을 할 즈음 N이 소리친다. “언니야 밥 먹어” 미리 주문해놓은 해장국을 찾아온 N이 네일샵은 잠깐 휴식중이라는 표지판을 내걸고 밥을 차렸다. 그러고 보니 시간이 꽤 흘렀고 창밖은 벌써 깜깜해졌다. “오늘은 더 이상 예약 손님이 없으니까 밥 먹고 치우고 한 시간만 더 있다 들어가라.” 다크서클이 생긴 사장님의 눈가, 다리 아프다고 투덜대는 N, 나도 뒷목이 뻐근하고 허리가 아팠다. 그때 갑자기 밖에서 누군가 쾅쾅거리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우린 그게 누군지 다 알았다.
우리 셋이 다 좋아하는 손님 L이었다. 그녀는 화가 지망생으로 뉴욕에 있는 예술대학에 다녔다. L은 네일케어를 받으러 오는 게 아니었다. “넌 꼭 우리 밥 먹을 때 오더라.” 그러니까 L은 밥 얻어먹으러 오는 것이었다. N이 핀잔을 주었지만 L은 절대로 기가 죽지 않는다.
“언니들 잘 있었어?” 물감 냄새 잔뜩 나는 몸으로 돌아가면서 포옹부터 하고 좁디좁은 마루짝으로 무조건 돌진해 들어와 궁둥이를 대고 앉아서는 무조건 우리가 먹는 음식에 젓가락을 들이댔다. “사장님 오늘 완전 화장발 죽인다. 마스카라 너무 잘했다. 야, 이 밥 좀 봐. 언니들은 모를 거야. 내가 처음 여기 왔을 때 얼마나 여기 들어와보고 싶었는지. 언니들은 한국 사람들이잖아. 내가 밖에서 언니들 밥 다 먹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언니들이 이 안에서 막 떠들면서 밥 먹는데 진짜 들어오고 싶었다니까.”
L은 말이 많았다. “이거 다 식당에서 시켜온 밥이야. 그리고 우리만 한국 사람이니? 뉴저지에 한국 사람 천지잖아.” N이 또 한마디 했다. “그래도 이 커튼 뒤에서는 특별한 한국 얘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단 말이야. 아 너무 좋아.” L은 체구에 맞지 않게 엄청나게 많이 먹었다. 금세 밥 반 공기가 사라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