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는 매주 수요일 밤마다 찾아왔다. 쥐색이나 밤색의 프라다 기지의 트렌치코트에 커다란 꽃무늬 머플러를 세련되게 매고 다녔다.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수요일 밤만은 ‘프리’라고 했다. 뱃살이라고는 없는 밋밋한 허리 주변은 업스타일의 타이트스커트를 입어도 아주 잘 어울렸다. 허리를 굽히고 앉아도 펴고 앉아도 편편한 배는 정말이지 환상이었다. 게다가 향이 진한 향수 냄새는 그녀의 카리스마를 여지없니 내뿜었다.
O는 케어를 받는 동안 내내 책을 읽었다. 오, 여기 독서광이 계셨군. 나는 반갑고 또 반가웠다. 그녀는 댄 브라운의 신작 소설을 한 손에 들고 계속 읽었다. 동그랗고 긴 계란형의 손톱 모양보다는 양쪽 모서리가 각이 지고 앞쪽 손톱 부분이 편편한 각진 형을 원하는 걸로 봐서 컴퓨터를 많이 다루는 직업을 가진 여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은행 직원, 아니면 비서, 아니면 놀랍게도 고급 공무원, 아니면 뭘까? 손톱이 시작되는 부분에 큐티클도 없고 전체적으로 각질도 없고 손등에 주름도 없는 걸로 봐서 집안일을 직접 하는 여자 같지는 않았다.
“댄 브라운 소설 재밌나요?” 질문을 하는 쪽은 오히려 나였다. “그냥 읽는 거죠 뭐. 누구나 읽으니까요. 책 좋아하시나 봐요?” 돈 키호테 얘기를 하고 싶어 입술이 달싹거리고 얼마나 웃기는지 꼭 한번 읽어보라고 얘기하고 싶지만 참는다. 그러나 O가 돈 키호테를 읽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다. 모르지, 또 집에 가면 하트 무늬가 잔뜩 박힌 파자마를 입고 밥통을 다리에 낀 채 수저질을 하며 만화책을 읽을지도.
O는 기본 케어가 끝나면 손톱 끝부분에만 화려한 마블 디자인이나 큐빅을 붙여 마무리하는 방식을 좋아했다. 자주색 기본 컬러에 흰색 큐빅을 한두 개만 붙여주고 톱코트를 잔뜩 발라주면 O의 입꼬리가 귓가로 찢어져 올라갔다. “전보다 훨씬 낫네요.” 그게 칭찬이었다. 팁을 포함해 계산을 하고 다시 트렌치코트를 입고 머플러를 두르고 네일샵을 나갈 때까지 우리는 멍하게 앉아 O를 쳐다봤다.
O가 한 손으로 비즈 장식을 밀고 출입문을 나가기 전 다시 얼굴을 돌려 인사했다. “다음 주에 봐요.” 그녀가 문 밖으로 나가 핸드백에서 자동차 키를 꺼내는 걸 보는 순간 N과 나는 케어 도구들을 정리하며 O의 말투를 흉내 내느라 정신없었다. “뉴욕에서 성공한 모양이지. 완전 재수 없지 않아요 언니?” N이 입을 비죽거렸다. “그냥 읽는 거죠 뭐. 누구나 읽으니까요.” 나도 O의 말투를 따라 해봤다. 몇 년을 미국에서 살면 저렇게 차갑고 멋진 인간이 되는 걸까, 그게 몹시 궁금했다. 어쨌든 분위기 하나는 끝내주는 손님 O. 나는 고객리스트 관리 노트에서 그녀의 이름을 찾아 날짜와 시간 그리고 케어 받은 내용을 적고 노트를 덮었다.
하루 중 깊은 밤이 되기 직전의 몇 시간, 셀리네일샵 앞의 차도 주변 거리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퇴근하고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 저녁 약속이 있는 사람들, 친구들 만나러 나온 십대 애들이 길거리에 서 있었다. 여기가 미국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친근하고 어쩌면 더 한국스러운 풍경이 거기 있었다. 조금만 눈을 돌려 보면 사방이 너무 어두웠고 조금씩, 스멀스멀, 안 좋은 기억들이 떠올랐다. 스타벅스에서 냉커피를 사 마시고 깨끗하게 닦아둔 투명 플라스틱 컵 속에서 김 작가가 준 편지, 할머니가 준 편지를 꺼내 읽었다.
그리고 손톱 케어 도구들을 닦고 소독하고 정리하면서 수없이 편지를 썼다. 사랑하는 김 작가님께, 아니 보고 싶은 할머니에게, 아니 저 세상에 있는 전직 간호사 K에게 편지를 썼다. 그러다가도 써봐야 쓰레기밖에 안 된다는 생각이 들면 괜히 옆에 앉아 졸고 있는 N에게 짜증을 부렸다. “넌 틈만 나면 자니? 도무지 지적인 활동이라는 걸 안 해.” 그러면 N은 입에 거품을 물며 “언니나 해”라고 대답하고는 의자 위에 올린 다리의 방향만 바꾸고는 계속해서 잠을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