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주에 있는 그 남자의 부모가 운영하는 세탁소에서 하루 열다섯 시간 이상을 일했다. 그곳에 간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모든 걸 후회했다. 땅에 발을 딛고 서 있는 게 분명한데 도무지 모든 감각이 실제 같지가 않았다. 누가, 언제 보러 올지도 모르는 공연을 준비하는 연극배우처럼 매일매일 앞만 보고 일했다. 서울의 붉은 가을 풍경이 떠오를 때면 보드카를 마시고 잤다. 남자를 탓할 일도, 미국 공기를 탓할 일도 아니었다.
그곳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어떤 일이 계기가 되긴 했는데 딱히 해결할 방법도 없었고 해결한다고 해도 달라질 게 없었다. 그 모든 것에 관해 입을 딱 다물어버리고 싶은 순간도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세탁소 사무실에 있는 접이식 의자를 펴놓고 앉아 남자와 얘기를 했다. 남자는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두 다리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남자의 머리칼을 쓰다듬어주려고 손을 내미는 순간 남자가 얼굴을 들어 이민국 관리 같은 얼굴로 딱 한 가지 질문을 했다. “돌아갈래요 아니면 여기서 살래요?”
아는 사람을 통해 나를 뉴저지로 보내준 것도, 취직을 시켜준 것도, 당장 쓰라며 용돈을 챙겨준 것도, 왔다 갔다 하는데 필요한 서바이벌 영어 표현을 적어준 것도 그 남자였다. 남자는 마치 무슨 담당 사회복지관처럼 믿기 어려울 만큼 조용하고 깨끗하게 모든 일을 처리했다.
낯선 외국의 공항이나 기차역에 버려진 어린아이처럼 처음엔 모든 게 두려웠다. 지금까지 잡고 있었던 두꺼운 손바닥이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주변을 둘러봤다. 사람들이 모두 나만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도 데려가지 않아 결국은 소리 나는 인형처럼 하루 종일 쇼윈도에 서서 삼백육십 도 회전하는 기분으로 거리에 서 있곤 했다. 벽에 걸린 커다란 시계만 쳐다보면서.
한 끼의 식사를 해결하는 일, 한 잔의 커피를 사는 일, 버스를 타는 일, 지하철을 타는 일이 무슨 대작전이라도 수행하는 것처럼 모두 다 어려웠다. 겨우 지하철 세 정거장을 이동하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미션이라는 듯이. 그사이에 몸의 모든 감각들이 다 열리면서 그동안 쌓인 찌꺼기들이, 어떤 기운들이 다 빠져나가버렸다. 난 완전히 힘이 빠졌고 한편으로는 가벼워졌다.
해캔섹의 봉제공장은 아무래도 내가 오래 있을 곳이 못 되었다. 다만 거기서 만난 친구들은 내가 힘든 일이 있거나 아플 때 삼십 분도 넘게 전화로 수다도 떨어주고 이런저런 도움도 주고 싶어 했다. 세탁소에서 나와 봉제공장으로, 봉제공장에서 네일샵으로 떠도는 와중에도 마음 한켠에는 언제나 나한테는 계동의 글짓기 교실이 있다는 생각, 또 철없는 엄마 김 작가도 있다는 생각이 들고 그것이 큰 의지가 되는 게 신기했다.
뉴욕에서 강 하나 건너에 있는 뉴저지라는 곳의 어떤 거리가 마치 1970년대 서울 시내 풍경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뉴욕제과, 종로한의원, 아모레 뷰티샵, 영진세탁소, 24시간 해장국 같은 이름을 단 한국 가게들이 모여 있는 거리에 있는 셀리네일샵이 내가 일하는 곳이었다. 누군가 하늘나라에서 나를 도와주고 있다는 증거가 있다면 끊임없이 일자리는 찾을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했다. 주인도 한국인이고, 주로 한국인 손님들이 많은 곳이라 영어를 못해도 큰 지장이 없었다.
네일아트는 해캔섹의 봉제공장에 다닐 때 그 근처에 있는 뷰티 아카데미 학생을 커피숍에서 만나 용돈 정도를 주고 ‘야메’로 배웠다. 네일샵에서 일하는 한국 여자들이 인기가 있고 돈벌이가 괜찮다는 소문만 믿고 시작한 일이었다. 뭔가 쓰겠다던 사람이 줄칼을 들고 남의 손톱이나 다듬으며 시간을 보낸다는 게 마땅치 않기는 했지만 서울에 있었다고 해도 술만 마시고 있을 게 뻔했기 때문에 그리 나쁜 것도 아니었다. 거울을 보면서 혼자 떠들었다. 내가 누군가! 미국이라고 해서 기죽을 사람이 아니지! 그러나 그건 단지 구호일 뿐이었다. 너무 힘들었고 완전히 기가 죽었고 모든 것들이 다 공포의 대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