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돈 키호테 영감님께 감사를
K가 죽은 그해 어느 때보다 멋진 가을이 왔다. 슬프거나 마음이 미어진다거나 하는 감정들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칼에 벤 손바닥의 상처를 꿰맨 뒤 한 달쯤 지났을 때 찾아오는 경미한 가려움증 정도, 겨우 그 정도였다. 손바닥의 상처를 들여다보며, 너는 죽었구나, 한마디 하고 점점 높아지는 파란 가을 하늘을 올려다봤다.
다만 이제는 뭔가를 빨리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조바심, 이미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을 다잡아봤지만 결국 아무 일도 못 하고 시간만 때웠다. 여전히 계동 아줌마들이랑 술이나 마시고 회사 직원들과 영화나 보러 다녔다. 그러던 어떤 날 계동 글짓기 모임에 나오던 아줌마 한 분이 갑자기 글짓기 교실로 뛰어와 선을 보라고 했다.
“미국에서 조카가 왔어. 꼭 한국 여자랑 결혼하고 싶다는데, 얼른 영인이 니 생각이 나잖아. 둘이 잘만 되면 김 작가가 나중에 미국으로 가도 되고. 아니면 너희들이 나와서 살아도 괜찮고. 식구 단출하고 좋잖아.” 너무 앞서간다는 표현이 딱 맞았다. 그러나 나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 남자를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생각해보면 그건 단순한 호기심 이상의 그 무엇도 아니었다.
남자는 미남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얼굴이었다. 그런데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특이한 분위기가 있어서 몹시 대하기 어려웠다. 종로에서 처음 만난 날도, 그다음 만날 날도 남자는 미국 얘기는 별로 하지 않았다. 뭘 물어보면 그냥 한결같이 “똑같죠 뭐 서울이랑” 하는 식으로 대답했다. 주말에는 대학로에 가서 영화도 보고 길거리의 좌판 앞에 놓인 작은 의자에 나란히 붙어 앉아 타로 점도 쳤다. 길거리의 즉흥 연주도 구경하고 불닭도 먹고 막국수도 먹었다. 비교적 조용하고 편안한 데이트였다.
보도블럭 위쪽의 팬시한 가게들 출입구 쪽에 쌓여 있는 붉은 낙엽 색깔이 얼마나 예쁜지 입속에 넣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마로니에 공원을 산책하고 길을 건너 서울대병원 입구 쪽에 있는 커피숍에 들어갔다. 어두워진 뒤라 창밖은 불빛 천지였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전화가 왔고 남자는 짧게 한두 마디 영어로 굿모닝 어쩌구 하다가 손목시계를 보고 시간을 확인하고, 주춤 일어나 미안하다고 말하고는 커피숍 밖으로 나가서 전화를 받았다.
중간키에 말수가 적은 남자가 마로니에 공원 쪽을 바라보며 전화를 하는 풍경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창 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밤하늘이 매우 맑고 바람이 불 때마다 빨강색 나뭇잎들이 검은 새처럼 사선으로 날아올랐다. 그 남자의 실루엣과 광활한 미국 땅덩어리, 그리고 자유롭고 개성적인 미국인들의 얼굴이 오버랩됐다. 바로 그 순간에 난 미국이란 곳에 가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벌써 내 몸은 미국에 가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인생 뭐 별거 있나. 글이야 미국 가서도 얼마든지 쓸 텐데. 정말 그런 단순한 생각이 다였다.
그리고 채 겨울이 오기도 전에 달랑 트렁크 두 개를 들고 미국으로 갔다. 세계문학전집 중의 한 권으로, 그때까지 읽지 않고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고 밀어두었던 두께가 6센티미터나 되는『돈 키호테』한 권만은 챙겨 갔다. 그때 김 작가가 생전 처음 나에게 편지를 줬다. 그리고 계동 글짓기 교실 아줌마들이 돈을 모아 담은 봉투도 건네주었다. 봉투에는 ‘영인이 만세!’라고 씌어 있었다.
무엇보다 잊을 수 없는 건 안채 할머니가 준 편지와 꼬깃꼬깃하게 접은 만 원짜리 세 장이었다. 할머니의 돈에서는 찝찔한 막걸리 냄새가 났다. 아들딸 셋만 낳고 잘 살라는 할머니 편지는 또 어떻고.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누가 어딜 간다고 할 때 돈을 주는 걸까. 내내 불쾌하고 또 미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