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모두가 죽는다』는 시간에 관한 소설이었다. 인간에게 주어진 제한된 시간을 길게 늘여놓은 뒤, 존재의 비밀을 탐구하고 존재의 한계를 극복해보려는 시도였다.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이 제한 없이 늘어난다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는 걸까. 훠스카는 구원받은 걸까. 구원이고 뭐고 주어진 시간도 거부하고 K처럼 높은 데 올라가 뛰어내려 죽어버리는 인간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나는 무한히 살고 싶은 인간의 욕망도 존중하지만 중간에 빨리 끝내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도 존중한다. 그러나 K는 너무 빨랐다.
소설의 여주인공 레진느는 훠스카를 사랑하게 되면서 현실과 환영을 혼동했다. 아니 현실에서 환영을 봤다. “세계는 느닷없이 순식간의 환영의 행렬에 지나지 않게 되고, 그녀의 손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그들은 나란히 걷고 있었다.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은 고독이었다.”
이 소설을 읽고 있으면 온몸이 습기로 축축하게 젖어오고 이내 도시 전체가 공상과학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한 장면처럼 부슬부슬 내리는 비에 젖는 것 같았다. 나는 계동에서부터 경복궁까지, 경복궁에서 광화문까지 걷고 또 걸었다. 빠리의 밤거리를 걷는 레진느의 옆에는 너무나 오래 살아 지쳐버린 훠스카가 있었지만 내 옆에는 흰 잠옷을 입은 K가 서 있었다. K는 더 이상 피를 묻히고 있지는 않았다. K의 손은 몹시 따뜻했다. K의 손에서 전해지는 그 따뜻한 기운, 나는 그 느낌을 평생 잊고 싶지 않았다.
날씨가 화창하던 날 K의 유골을 안장한 납골당에 갔다. 작은 철제 서랍장 세트들이 꽉 차 있었다. 지지고 볶고 살던 인생들이 겨우 마지막에 가 닿는 곳이 작은 철제 서랍 안이라니! 문에 붙어 있는 작은 사진들이 을씨년스러웠다. 사진을 하나씩 확인하며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이동해가면서 K가 있는 곳을 찾기 시작했다. 그 납골당에서는『인간은 모두가 죽는다』 따위의 책은 읽지 않아도 인간이 결국 어떻게 될 것인가에 관한 해답을 다 알 수 있었다. 아무리 돌아가신 분들이 모여 있다고, 그렇다고, 그 흔한 음악 소리조차 들리지 않다니.
K는 사진 속에서 귀엽게 웃고 있었다. 재잘거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목소리가 들리면서 귀가 쟁쟁했다. 나는 K가 준 노트와 꽃다발을 놓고 걸어 나오다가 다시 돌아가 K의 입술에 뽀뽀를 했다. 그 느낌을 잃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K가 자살한 이유가 단순히 글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글을 쓴다는 일에 대한 열망을 품게 되는 순간부터 그 사람은 환자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 일 외에 다른 일에서 손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임신 초기의 울렁증처럼 평생 구역질이 날 것 같은 기분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거기서 정도가 심해지면 바보가 된다.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못하고 앞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그저 병을 앓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내가 더 심각한 환자였다. 그러나 K가 나보다 더 유약했고 훨씬 순수했다.
나는 술을 마시고 바닥을 기어다녔다. 파리하게 마른 외국 남자가 다가와 나에게 말을 시키기도 했다. “언니 집 어디예요? 응? 어디예요? 내가 데려다줄게.” 어디서 언니라는 말을 배운 걸까, 그 말을 가르친 놈이나 배운 놈이나 미친놈들이 따로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말이 얼마나 많은데 겨우 그런 말만 지껄여? 너 누구야?” 나는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과 몸을 부딪치고 말싸움을 하고 삿대질을 했다. 사람들이 미친년이라고 쏘아붙였다.
사람들이 상대해주지 않으면 하늘을 향해 높이 솟은 빌딩 꼭대기의 네온사인이 내 대화 상대였다. 길거리에 놓인 벤치도, 공중전화도 내 대화 상대였다. 날씨에 따라 모든 게 달라 보였다. 초점도 뿌옇게 흔들렸다. 현실과의 거리 조절을 위해 늘 어딘가를 응시하려고 노력했다. 겨우 초점을 맞춰 도시의 어느 한 지점을 응시하면 살찐 고양이와 비둘기 천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