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급한 목소리로 K의 남편이 전화를 걸어온 건 그로부터 몇 주 뒤였다. “좀 와주실래요. 병원에 입원했어요.” 하필이면 K가 죽어라 하고 나만 찾는다는 거였다. “약도 하나도 안 먹었더라구요. 저 정말 미치겠어요. 영인 씨가 도와주지 않으면 제가 먼저 죽을 것 같아요.” 그때 본 K의 남편은 집에서 봤을 때보다 얼굴이 수척해 보였고 착한 사람 같았다.
K는 가족들의 출입마저도 통제된 정신병동에 들어가 있었다. 신분 확인이 끝나고 문이 열렸다. 다른 병동과 달리 정신병동 환자들은 모두 복도로 나와 혼자서 재미있게 놀고 있었다. 누워 있는 건 환자, 서 있는 건 간호사, 식의 구분은 무의미했다. 오가는 간호사들이나 환자들이나 움직임이 많기는 매한가지였고 병동 안은 멸균된 상자 속처럼 희고 깨끗했다. 아무도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행복해 보이고 편안해 보이는 저들이 환자들이라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K는 온통 흰 방 안에 그림처럼 누워 책을 읽고 있었다. 일반 병동의 병실과 달리 방 안에는 아무런 편의시설이 없었다. K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고 K가 고개를 들어 날 봤다. 그녀의 몸은 이중 밴드로 침대에 묶여 있어서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그녀가 나를 보며 말했다. “수학2, 그 개새끼 죽여야 하는데. 우리가 졸업하기 전에 죽여야 하는데.”
나는 웃었다. 미안한 말이지만, K는 몹시 행복해 보였다. 우리가 한때 경멸하던 선생님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머릿속이라니. 그러나 K의 태도는 금세 변했다. “눈에서 불이 보여.” K가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넌 안 보여? 미치겠어 저 불 때문에. 어떻게 좀 해주라.” K는 손을 들어 불을 쫓으려고 했다.
“잠옷만 입고 한밤중에 24시간 하는 동네 식당에 가서 술을 달라고 했다는 거예요. 술을 안 주니까 쌍욕을 하면서 손님들, 주인한테 대들었다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저 지금 회사에 좀 가봐야 해서. 죄송합니다만 몇 시간만 복도에 좀 앉아 계세요. 간호사들이 찾을지 몰라서.” 가방을 들고 일어서는 K의 남편에게 물었다. “왜 가족들은 아무도 오지 않죠?” “저도 모르겠어요. 다 바쁜가 보죠 뭐. 아무래도 저 여자를 나한테 내버린 거 같아요.”
내가 나온 뒤 병동의 문이 자동으로 닫혔다. 자동판매기 커피를 한 잔 뽑아들고 병원 복도 의자에 앉았다. 수시로 사람들이 지나갔다. K가 몸이 괜찮아져서 다시 만나게 되면, 우리가 서로 사랑하던 예전에도 잘 썼고, 지금도 아주 잘 쓴 글이라고 생각한다는 내 입장을 분명히 말해주고 싶었다. 세상에 그렇게 쉬운 일을 안 해서 친구가 정신병동에 들어가다니, 난 정말 미친 인간이었다.
병동의 문이 수없이 열렸다가 닫혔다. 나는 몇 번이나 열린 병동 문 안으로 들어가 K를 데리고 나오는 상상을 했다. 풀밭으로 데려가 레몬향이 나는 사탕을 하나씩 입에 물고 책을 읽고 같이 무엇인가를 쓰는 상상을 했다. 눈 내리는 도서관 마당에 앉아 낄낄거리며 수다를 떨던 시간이 되살아났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하면 K가 무엇 때문에 그 지경이 됐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얼마나 끔찍한가. 가까운 사람이 미쳐 돌아가는데 나는 그냥 술이나 마시고 건성건성 살았다.
K가 병원에서 퇴원한 뒤 우리는 한 번 더 만났다. 기온이 높아져서 대낮엔 움직이기가 불편할 정도로 더웠다. 약 때문에 내내 잠만 잔만 잔 것 같았다. 눈두덩이, 입술, 어깨, 손등 할 것 없이 전체적으로 통통하게 부어 살찐 애벌레처럼 보였다. 겉모습은 그랬지만 그녀의 내면은 가느다란 실에 매달려 간당거리고 있었던 것 같다. 의욕도 없어 보였고 갈등도 없어 보였다. 어쩌다 입을 열어 말을 한다고 해도 두 단어 이상은 연결을 시키지 못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녀는 내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았고 뭔가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때서야 내가 그때까지 K에게는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얘기들을 지껄이기 시작했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재능이 있다, 천재적이다, 성공할 것이다, 너는 옛날부터 남달랐다, 니 편지를 받았던 날 내 인생은 달라졌다… 아무리 얘기를 해봐야 K는 이미 다른 세상에 가 있었던 것 같다. 며칠 뒤에 K는 찜질팩 판매사원인 남편이 자는 사이에 전망 좋은 강변도로변의 12층 아파트에서 풀쩍 뛰어내렸다. 그녀는 완전히 부서졌다. 그게 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