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나한테 꾸벅 인사를 하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바로 그 안방 화장실로 들어갔다. 한참 동안 샤워 소리가 들렸다. 그사이 K는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와서는 태연히 소파에 앉아 책을 집어 들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남자는 머리를 수건으로 닦으며 마치 집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냉장고에 가 물을 꺼내 마시고 냉장고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 프라이팬에 볶고 지진 후 커다란 접시 위에 한꺼번에 올려놓고 신문을 읽으며 먹었다. 내가 멍한 채로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나에게 한마디 했다. “친구분, 식사하셨어요?” 바로 그때 K가 남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들고 있던 책을 냅다 식탁 쪽으로 집어던지며 말했다. “너나 처먹어 이 개 같은 살인자 새끼야. 사내 노릇도 못하는 새끼가.”
강남의 전망 좋은 아파트는 모래 바람이 불고 굶어 죽은 동물의 뼈가 나뒹구는 변방의 사막처럼 황량했다. 완벽하게 꽉 들어차 있던 가구며 가재도구들은 금세 살인 사건 현장처럼 흩어진 채 나뒹굴고 멀쩡하던 사람들은 금세 죽이겠다고 덤벼들 것만 같았다. 모든 게 다 종이로 만든 가짜침실, 가짜 벽, 가짜 꽃병 같았다. K의 남편이 귀가하기 전이 현실인지 내 상상이 현실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목이 비틀린 채 피를 흘리며 죽어 있는 K가 그 아파트 안에 누워 있는 그림이 자꾸만 떠올랐다. 아니면 K의 남편이 욕조 안에 들어가 엎드린 채 죽어 있거나.
그 집에서 빠져나와 약국으로 가 상처 치료에 필요한 약을 사는 동안 내내 그런 상상에 시달렸다. 그날도 술을 마시지 않고는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나는 자고 있는 김 작가의 머리맡에 K의 전화는 무조건 바꿔주지 말라는 메모를 남겼다. 그리고 계속해서 술을 마셨다. 그날 밤은 아무리 술을 마셔도 잠이 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책을 읽었다. 13세기에 태어나 아직 죽지 않고 빠리의 거리를 돌아다니는 인간 레이몽 훠스카가 등장하는 소설『인간은 모두가 죽는다』를 펼쳐 들었다. 훠스카는 “1848년에 어떤 숲속에서 잠들었다가 그곳에서 그대로 육십 년을 보내고는 그 뒤 삼십 년간 정신병원에 수용돼 있었던” 사람이었다. 삼십 년간 정신병원에서 한 일은 침실 청소와 글쓰기였다. 그는 침실 청소를 할 때면 무척 행복했다. 그는 늘 회상록을 썼지만 결국 없애버렸다. 그 긴 불사(不死)의 인생에 대해 훠스카는 한마디로 말했다. “불사는 곧 저주입니다.”
연극배우로 살면서 인간관계에, 인생에, 조금은 지친 레진느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 훠스카에게 “죽음에서 구원해달라”고 소리친다. 그리고 반대로 공기처럼 떠다니기만 하는 불사의 인간 훠스카는 이 세계에 “존재하게 해달라”고 소리친다. 훠스카의 존재를 믿지 못하는 레진느는 “꿈이 아닌 거죠?”라고 거듭 묻고 훠스카는 단번에 세면대로 가 면도칼을 들고 목을 그어버린다. 자신이 존재한다는 걸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목에서 시뻘건 핏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이 대목을 읽다가 붉은 줄을 죽죽 긋고는 책을 덮어버렸다. 더 이상 피를 흘리는 장면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K는 그후로 의외의 시간에, 새벽이나 근무시간, 아무 때나 전화를 걸어와서는 횡설수설하다가 전화를 끊는 일이 많았다. 한동안 전화가 뜸하다가 잊을 만하면 또 걸려오곤 했다. 차라리 소식을 모르는 게 나았다는 생각이 든 건 갑자기 회사 근처로 찾아온 초여름의 어느 날, 무더운 버스정류장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책을 읽고 있는 K의 얼굴을 본 순간이었다. 그녀는 딴 나라 사람처럼 무심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그녀를 회사 건물 지하의 커피숍으로 데려가 안정감 있게 책을 읽을 수 있는 자리를 찾아주고 다시 사무실로 올라갔다. 근무시간이 끝나자마자 바로 퇴근을 해 커피숍으로 내려가보니 K는 소파에 앉은 채 탁자 위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하는 일 없는 여자들이 수돗물을 틀었다가 잠그기를 반복하는 싱거운 일상, 손톱 정리를 하다가 칼에 베는 정도의, 도무지 상처라고 말하기에는 어려운 일들을 상처라고 규정한 채 유치한 톤으로 쓴 K의 노트가 커피 얼룩이 번진 채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